소설리스트

108화.성찬식(聖餐式)(3) (108/200)

 # 108

성찬식(聖餐式)(3)

떨어지는 그 몸을 은빛 실이 받아냈다.

선녀는? 무사하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은 유피가 챙기고 있었다. 면사는 어디로 날아간 걸까, 선녀의 창백한 얼굴이 바깥에 드러났다. 이국적인 용모였다. 마족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인족에 가까운 생김새. 생각보다 앳된 얼굴로 보았을 때, 실제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월중 장로의 몸이 꿈틀거렸다.

손이, 팔이, 다리가, 얼굴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 몸 안쪽에서 올라오는 마기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 같다. 몸집이 커진 그는 알베르트를 향해 손을 내질렀다.

휘둘러지는 주먹은 속도가 붙어 있었다.

막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흘러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할 수가 없다. 월아가 흘리는 신비한 빛이 아니었다면, 수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깎아내듯이 놈의 손목을 긁어낸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타격을 줄 수가 없다.

월아가 닿은 놈의 살은 불타올랐지만, 그것뿐이다. 불타오른 피부를 회복하는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다. 어렵사리 입힌 상처도 새로 돋아난 살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녀석의 시선을 가리듯이 유피의 지원이 들어왔지만, 모처럼 기회를 만들어줘도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다. 이대로 가면 내공이 바닥나는 건 이쪽이다.

알베르트는 생각을 바꿨다.

틈이 나는 곳을 노리는 게 아니라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한 점을 노린다. 가슴. 노리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렇다면 목을 노린다. 튕겨 나간다. 한 번에 뚫을 수 없다는 건 안다. 점 한 곳에 충격을 쌓고, 쌓아서 한 번에 터뜨린다.

월중 장로의 손은 알베르트를 따라가기 바빴다.

간신히 닿았다고 생각하면, 뒤에서 나온 은빛 선이 그 몸을 잡아당긴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된다. 그것이 알베르트와 유피가 의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월중 장로는 소리쳤다.

“흑토장, 뭘 하는 건가?”

“장로님…….”

어째서인지 그는 멍하니 월중 장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동을 취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본당을 때려 부수는 커다란 거인. 마기를 흘러내는 그 모습은 어디를 보아도 월중 장로라고는 여길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월중 장로?”

의식을 되찾았는지, 선녀는 제단에 기댄 채 일어나고 있었다. 월편을 만드는 일은 몸에 부담이 컸던 걸까.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당신의 복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너야말로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다, 선녀. 그 척박한 대지에서 살아가던 우리의 고통을 너는 알 수 없다. 나는, 우리 선조들은 그 아픔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과거의 잘못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당시의 전쟁은 신교에게도, 이설교에게도 모두 끔찍한 형태로 끝났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제야 화합을 이루었습니다. 동포들과 함께 올바른 길로 나가고자 서로 노력했던 그간의 노력은 전부 거짓이었던 건가요?”

“화합?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너는 가족을 죽인 자들과 화합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가족을 잃은 것은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진정 동포들마저 버릴 생각입니까?”

“우리를 버린 것은 너희 신교다!”

월중 장로의 분노에 답하듯이 손이 빨라진다. 월아가 그 주먹을 타듯이 움직였다.

주먹 위로 긴 상처를 남긴다. 불길이 달린다. 하지만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재생이 시작된다.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 알베르트는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세요, 월중 장로. 지금 그 모습이 정말로 당신이 바란 건가요? 이설교의 가르침이 당신을 그 모습으로 이끈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차분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세요. 지금 당신의 모습은……. 우리의 적, 그 자체입니다.”

“이 힘이야말로 우리 이설교의 선조들이 원했던 극의다. 모습 따위 개의치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 그러면 왜 그들은 당신을 외면하는 걸까요?”

안타깝다는 선녀의 목소리에 월중 장로는 손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본당을 돌아보았다. 흑토들은 선녀가 건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다. 월중 장로를 바라보는 흑토들의 눈은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흑토장?”

“…….”

흡사 악마나 다름없는 월중 장로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눈을 돌리는 거냐. 너희도 바라지 않았느냐? 우리의 원한은 겨우 그 정도였나? 이것이 이설교의 극의다. 우리는 이 힘으로, 다시 이설교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장로님. 동포를 버리면서까지 바랐던 우리의 길이, 정말로 이런 겁니까?”

“우리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는 거냐? 선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몰락하는 것은 우리다!”

“선녀님을 말입니까?”

월중 장로의 말에 한 흑토가 입을 열었다. 알베르트의 눈에도 익은 자다.

소월.

선녀를 호위하고 있던 바로 그 흑토다.

“장로님. 선녀님을 죽인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는…….”

“이 전쟁은 그런 거다! 신교의 상징인 그녀가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는다!”

“…….”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월중 장로의 외침에도 흑토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던 소월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건 장로님이 택한 길입니다. 이설교의 신도라면 선녀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이 상황까지 와서 그런 말을……! 뭘 하는 거냐. 어서 와서 선녀를…….”

소월을 설득하는 걸 포기한 월중 장로는 다른 흑토를 불렀다.

하지만 월중 장로의 뜻에 동의하는 자는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흑토들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녀님을 벨 수는 없습니다.”

“이설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입에 담을 수 있습니까? 제가 아는 장로님이라면…….”

“장로님이 지향하시는 바가, 북부의 캘러미티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으드득, 하고 월중 장로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됐다. 너희들이 하지 않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이설교를 다시…….”

월중 장로의 말이 끊겼다.

침음성을 흘리는 그 등에서 검은 날개가 피어올랐다. 마기가 들끓는다. 이전보다 한층 더 강렬해진 마기가 본당을 잠식했다. 끔찍한 힘이다. 소하 언덕에서 봤던 마몬에 버금간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마기가 월중 장로의 몸을 감싸 안았다.

“무슨……. 웃기지 말아라. 이제, 이제야 원수를 갚을 힘이…….”

일그러지는 월중 장로의 얼굴을 마기가 덮었다.

몸 전체를 마기에 내준 월중 장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유피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여차하면 이 몸을 방패로 삼는다.

월중 장로를 감싼 마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기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거의 천장과 맞닿는 크기의 거인이 되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커진 근육이 꿈틀거린다. 꿈틀. 꿈틀. 그 눈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검은빛으로 물든 두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입에서 쇠가 긁어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어리석구나, 죄인. 하지만 그렇군. 괜찮은 육체다. 이 정도라면…….』

무심코 반응했다.

월중 장로였던 존재와 거리를 좁힌 알베르트는 뛰어올랐다. 월아가 목을 노리고 들어간다. 몇 번이나 찔러넣었던 바로 그 지점이다. 검은 불길이 검날을 막았다. 한 치를 앞에 두고, 벨 수가 없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월아에 들러붙는다.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두 눈이 알베르트를 본다. 손끝에서 검이 솟아난다. 온다. 월아, 회수할 수 없다. 뒤는 없다. 앞으로 나간다. 빛이 한층 강해진다. 불길을 뚫어낸다. 아니, 무리다. 늦는다. 이대로는…….

은빛 실이 월아와 알베르트를 잡아당겼다.

알베르트를 잡은 유피는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서 쐐기가 솟아난다. 하나, 둘, 셋. 피할 수 없다. 은빛 마법진이 지면에 떠오른다. 쿵, 하고 튀어나오던 쐐기가 마법진과 부딪혔다.

『달의 검인가. 과연, 이거라면 우리도 위험하지.』

조소 섞인 악마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좋다.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월아의 빛이 사라졌다. 내공을 거의 소모했는지,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알베르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유피가 물었다.

“바보야, 너? 자살 시도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해.”

“마지막 기회였어.”

“마지막?”

“상황을 봐서. 도망쳐, 유피.”

이 상태로는 저걸 이길 수 없다.

가능하면 시간을 번다. 그녀만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만든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수는 하나. 몸이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마기를 끌어낸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감은 남아 있다. 마기는 본래 악마의 힘. 과연 마기를 사용해서 녀석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월중 장로, 결국은…….”

악마로 변해버린 장로를 바라보는 선녀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자아냈다.

『호오, 이건 달토끼의 종복인가. 이 몸을 어떻게 끌어왔는가 했더니. 죄인 주제에, 우리를 억누르고 힘을 다룰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과연, 재밌구나. 이러니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힘에 대한 탐욕. 그 끝을 모르는 욕심이야말로 너희들의 본질이다!』

“…….”

선녀는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성마력이 그녀의 의지에 대답했다. 월편을 만들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 바람이 불면 금방 꺼질 것 같다. 우스워하는 악마를 앞에 둔 채 선녀는 전의를 다졌다. 그 앞으로 흑토장이 걸음을 옮겼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뒤를 따르듯이 무기를 든 흑토들은 악마를 포위했다.

“정(正)…….”

“죄송합니다, 선녀님. 장로님을 막지 못한 건 제 잘못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회복되지 않은 오른손은 쓸 수 없다. 왼손으로 연검을 쥔 그는 악마를 노려보았다.

흑토들을 바라보던 선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녀님.”

“달토끼님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실 겁니다. 초상 장로가 내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죠.”

“흑토 전원. 선녀님을 따르겠습니다.”

알베르트와 유피를 등진 채 흑토는 악마와 부딪혔다.

수만 놓고 본다면 절대로 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상대가 나쁘다. 힘의 차이가 너무 난다. 악마가 휘두르는 손톱에 몸이 반씩 찢겨나간다. 아무리 죽지 않는 몸이라지만, 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순식간에 포위가 뚫리고, 마치 악마가 사냥하는 것 같은 일방적인 모습이 이어졌다.

“몸이 회복되면 5분, 버틸 수 있겠어?”

“5분?”

악마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회복된다면 가능할 것 같아.”

“같아로는 안 돼. 무조건 해내야 해.”

유피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적당한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알베르트는 다시 악마를 확인했다.

흑토들 사이에서 날뛰는 녀석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몸이 커진 것과 비례하듯이 그 속도는 더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몸체가 커진 만큼, 세세한 움직임은 이전보다 못하다. 거기에 흑토들도 손을 거들어주고 있다.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널 믿을게.”

“믿는다니, 무슨 소리야? 일단 유피라도 여기서 벗어나는 게…….”

아라크네와 싸우던 백토 부대를 기억한다. 만약 백토의 무력이 전부 그 정도라면, 그들이 온다고 해도 저 악마를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차후를 기약하는 게 맞다.

하지만 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말했었지, 알? 내 체질에 대해서 언젠가는 알려준다고.”

“체질? 그게 지금 상황하고 무슨 관계가…….”

“이게 내 대답이야.”

흔들린다.

그렇게 느낀 순간, 그녀의 등에서 한 쌍의 은빛 날개가 솟아났다. 이전에 본 기억이 있다. 유피의 본신이다. 하지만 본신을 드러낸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게 여긴 알베르트가 입을 열 찰나, 있을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유피의 곁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마기가 아니었다.

주변을 따스하게 만드는 이 힘은…….

“신성력?”

입을 벌린 알베르트를 향해 유피는 손을 내밀었다.

신성력이 알베르트의 몸을 감싸 안았다. 한계에 가까웠던 몸의 피로가 사라진다. 말라붙었던 내공이 회복되고, 양손에 힘이 돌아왔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알베르트는 유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신성력을 다루는 거지? 천칭이 말했던 것이 사실이었는가? 마족의 몸으로 신성력을 다루는 게 가능한 건가? 아니, 그녀는 혼혈이다. 혼혈 마족에게는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 신성력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대답을 내지 못하는 알베르트의 얼굴로 유피의 손이 다가왔다.

짝, 하고 그 손이 양 볼을 때렸다.

“정신 차려, 알. 이 상황은 우리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어.”

“…….”

“5분, 버틸 수 있다고 했지?”

“물론이야.”

월아를 바로 쥔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그것은 이후로 미룬다. 악마와 교전 중인 흑토들은 맥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선녀가 성마력을 이용해 악마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 유피를 돌아본다.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든 그녀의 발치에서는 은빛 마법진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마나가 아니다. 성스러운 힘이 본당에 차오른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알베르트만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항전 중이던 흑토장을 내팽개친 악마는 이곳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 앞으로 알베르트는 치고 나갔다.

유피가 마법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5분. 뒤는 그녀에게 맡긴다.

전력을 다한다.

월아의 빛이 주인의 의지에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