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성찬식(聖餐式)(2)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흑토들의 시선이 단번에 이쪽을 향했다.
그 눈이 경계의 빛으로 물들었다. 알베르트는 앞으로 치고 나갔다.
목표는 선녀가 만드는 두 번째 월편이다.
“침입자다! 잡아라!”
흑토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고개만 간신히 움직일 뿐, 움직임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그들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이다.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다.
월편을 앞에 둔 채, 알베르트는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꼈다. 월편에 닿는 것이 빠를까, 그렇지 않으면 놈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빠를까. 근소한 차이로 후자가 먼저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발검했다. 두 검이 맞물렸다. 손에 닿는 충격이 생각보다 작다. 기묘하게 휜 녀석의 검은 알베르트의 손목을 노리고 있었다. 거리를 벌린다. 물러나는 곳은 월편이 있는 방향이다. 월아와 맞물린 녀석의 검을 튕겨낸다. 알베르트는 선녀와 월편을 뒤로 한 채 월아를 들었다.
“뭐냐, 네 놈은? 어째서 흑토의 신복을 입고 있는 거지?”
“…….”
굳이 말을 해줄 필요가 있을까. 알베르트는 놈의 검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든 것은 연검이다. 변칙적인 움직임을 꾀하는 검이다. 다행히 연검이라면 사희의 검을 본 적이 있다. 상대하는 데 힘이 들지언정, 괴롭지는 않으리라.
“그렇군.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선녀님. 왜 의식 도중에 검은뱀님을 언급하시는가 했더니.”
움직이지 못하는 흑토를 둘러보던 월중 장로는 입을 열었다.
“아직도 달콤한 꿈을 꾸고 계시는군요. 신교와 이설교의 화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었던 거죠. 신교냐, 혹은 이설교냐. 두 종교 중 한 종교가 남을 때까지 우리의 분쟁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우습다는 듯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장로님.”
“알겠네. 그럼 나는 월편을 챙기지.”
연검이 길게 늘어진다.
검은 검기가 담긴 연검이 알베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알베르트의 손이 움직였다. 연검과 함께 흑토장의 손이 땅에 떨어졌다. 마무리를 가하려는 알베르트의 월아를, 녀석은 어깨로 틀어막았다. 잘라낸다. 그러나 흑토장의 움직임이 빨랐다. 어중간하게 들어간 월아는 녀석의 팔을 잘라내지 못했다.
흑토장이 물러난다. 뒷걸음질에 맞추듯이 떨어졌던 손이 달라붙었다. 벌어졌던 살점이 다시 붙는다. 어느새 회복된 것인지, 연검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검을 튕겨낸 알베르트는 월중 장로의 발걸음을 막았다. 노리는 것은 목. 일점 찌르기를 향해 월중 장로는 손을 들었다.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손바닥을 파고든 월아는 팔을 완벽하게 베어낼 수 없었다. 다시 힘을 싣는 찰나, 흑토장의 연검이 다가왔다. 마무리를 짓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월아를 회수한다. 카라랏, 하고 검신을 휘감는 연검을 알베르트는 튕겨냈다.
“나도 합류하지, 흑토장.”
“장로님의 손을 빌리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자세를 바로잡는 두 남자를 본 알베르트는 짧게 혀를 찼다.
주공은 마기에 물든 월중 장로의 주먹이다.
흑토장의 연검은 조공이다. 연검의 변초는 읽어내기 힘들다. 월아의 빛을 끌어내고 있었지만, 이 둘은 베어지지 않았다. 월아가 지닌 힘이 통하는 건 어떤 조건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빛을 거둔 알베르트는 가슴을 향해 들어오는 정권을 막았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둘은 분명 사룡보다 아래다. 하지만 몸을 쓰는 일에 능숙했다. 죽지 않는 몸. 어디를 버리고, 어디를 희생해야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 그 전법에 익숙했다.
아마도 이런 몸이 아니라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공세로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몸을 무른다. 둘의 움직임은 연계에 가까워서 알베르트도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알베르트의 등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운신에 제약이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며 싸운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흑토장의 연검을 쳐낸다. 순간적으로 내공이 빠진 연검이 흐느적거린다.
하지만 재차 내공이 깃들고, 연검이 빳빳해진다. 크게 돈다. 닥쳐오는 연검을 튕겨내던 알베르트는 문득, 선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위험하다. 연검을 튕겨내는 경로에는 선녀가 있다. 피할 수 없다. 선녀는 이미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를 우선시하면 월중 장로가 빠져나간다.
월편과 선녀.
선녀는 무엇보다 월편을 우선시하라고 했다. 하지만 월편과 선녀를 저울에 올린다면……. 알베르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켜야 할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튕겨 나간 연검을 쳐낸 알베르트는 선녀의 앞에 섰다.
“아, 드디어…….”
두 번째 월편을 손에 넣은 월중 장로는 알베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제단 너머의 어두운 빛이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한데, 손에 쥔 월편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신비한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월중 장로는 선녀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수를 취한 걸까? 선녀는 여전히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월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자아내는 세 번째 월편에서도 신비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월편이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다.
“장로님.”
흑토장의 목소리에 월중 장로는 고개를 돌렸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는 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바깥의 창을 확인했다.
창밖을 본 월중 장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물속에 떠 있던 달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갈라진 두 물줄기 사이로 한 여인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고깔모자와 칠흑 같은 로브.
별무리 지는 은빛 머리가 아름다운 그녀의 손에는 붉은 지팡이가 잡혀 있었다.
“여기가 월궁인가. 그러네. 늪지 속에 숨겨진 달의 궁이라. 제법 머리를 썼구나.”
재밌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는 마녀는 유피에르 바토리였다.
*&*
낡은 나룻배 위에서 늙은 쥐는 술병을 쥐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달이 떠 있었다. 늪지 위에서 흔들리는 나룻배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잔을 채우고 있었다. 달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건 꽤 운치 있는 일이다. 거기에 평소 마시는 싸구려 술도 아니다. 낙양에서도 이름난 기루에서만 취급한다는 백주다. 이 한밤중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품삯으로 건네준 술이다.
잔을 채운 늙은 쥐는 입으로 술을 가져갔다.
역시 고급술은 향부터 다르다. 코끝이 찌르르해지는 술 향기에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동행자였던 아가씨는 나룻배에 있지 않다.
그 망할 여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답게, 당치도 않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늪지 위에 펼쳐진 마법진은 흘러나온 마나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애가 아니라 용 새끼였군. 그 할망구, 제자는 안 받는다고 들었는데.”
늙은 쥐가 탄 나룻배 앞의 늪지는 마치 절벽처럼 깎여 내려가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수직으로 꺾였다. 떨어지는 물은 안쪽으로 고이지 않는다. 바깥쪽으로 그대로 밀려나는 늪지는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도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해야 할까.
늪지를 반으로 가른 마녀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아래에서 드러난 커다란 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늪지 안쪽에서 그녀의 머리카락만이 은빛으로 빛난다. 마치 별무리가 떨어지는 것 같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했다.
“뭐, 재미난 걸 봤으니 됐나.”
덧붙여 좋은 술까지 얻었다. 끌끌거리며 혀를 찬 늙은 쥐는 백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
창과 맞닿은 유피에르의 손이 월궁 안쪽으로 들어온다.
별무리가 지는 은발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수막(水膜)을 통과하는 것 같다. 제단 앞으로 들어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흑토 부대원과 기도를 올리는 선녀. 그녀의 앞에서는 세 번째 월편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늪지에 투영되던 달이 사라진 탓일까. 신비한 빛은 더는 깃들지 않았다. 남은 건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월토 장로와 흑토장. 그리고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알베르트다.
먼저 움직임을 취한 건 월중 장로였다.
녀석은 들어오는 유피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베르트가 반응했다. 마기에 둘러싸인 권이 닿기 전에 월아가 맞물린다. 쿵, 하고 알베르트의 몸이 밀려났다. 뒤에는 유피가 있다. 충격을 줄일 수 없다. 날아오는 알베르트의 등을 향해 유피는 손을 들었다.
은빛 마나가 가느다란 실을 만들어낸다. 날아오는 알베르트의 등에 몇 겹의 실타래를 만들어냈다. 유피를 앞에 둔 채 알베르트의 몸이 멈췄다.
“괜찮아?”
“알은 사실 바보지 않아? 어련히 내가 막을 텐데 말이야.”
걱정했더니 핀잔만 돌아왔다.
“뭐, 쓸만한 움직임이었던 건 칭찬해줄게.”
월중 장로의 곁으로 흑토장이 다가온다. 월중 장로는 빛을 잃은 월편을 확인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그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달과 함께 물줄기를 가른 유피의 마법 때문일까, 월편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래, 어디 보자. 선녀는 주동자가 아닌 모양이네.”
“흑토는 선녀님이 제압했어. 우리의 적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방해물은 이 두 사람이구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벨 수 있겠어?”
“베는 것뿐이라면 가능해. 하지만 뒤가 없어.”
“뒤는 나한테 맡겨. 작아도 좋아. 계속 토막 내, 알.”
“알았어.”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빙글 돌았다.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 지팡이는 강렬한 붉은빛을 냈다. 현자의 돌에서 나온 은빛 마나는 실처럼 변해 그녀의 주변에 떠올랐다. 그것으로 준비가 끝났는지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함께 싸우는 건 십만대산 이후로 처음이네.”
“그건 함께 싸운 축에 들지도 못해.”
“어머, 우리 집사는 꽤 눈이 높구나?”
귀여운 웃음소리가 났다. 유피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월토 장로는 월편을 던졌다. 제단 위로 두둥실 뜬 월편에 검은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선녀는 아직 의식이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흑토들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모른다.
“전위는 맡길게, 집사.”
“아가씨의 뜻대로.”
주인의 의지에 답하듯이 월아는 빛을 머금었다.
알베르트의 움직임 달라진다. 타고 올라오는 연검을 튕겨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검을 쥔 손을 노린다. 월아에 닿은 손가락이 토막 난다. 땅에 떨어진 연검을 왼쪽 손으로 회수한 흑토장을 보호하듯이, 월중 장로가 나온다. 떨어진 손가락은 그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유피의 은빛 실과 닿은 손가락은 지면과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손가락은 발버둥 치듯이 꿈틀거렸지만, 실은 한층 더 옥죄였을 뿐이다.
무인이 문제가 아니다.
노려야 할 대상은 그 뒤에 있는 마녀다. 하지만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들어오는 연검을 전부 쳐내는 건 물론이고, 그에 맞추어 들어가는 월중 장로의 합도 소용이 없다. 움직임이 읽히고 있다. 불사의 몸을 이용해 싸우는 방법도 무리다. 뒤를 봐주는 마녀의 마법은 교묘하기 짝이 없다. 찌르기를 막아낸 손목 위로, 은빛 실이 드리워진다. 흑토장은 손을 뺐지만, 이미 늦었다. 오른쪽 손목이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손목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금 전과는 움직임이 다르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도 아닐 터인데, 두 사람의 움직임은 합이 너무 잘 맞는다. 치고 나가는 무인의 뒤를 은빛 실이 막아낸다. 마녀의 이목이 쏠린 틈을 타 진입을 시도하면, 배후를 무인에게 빼앗긴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다. 둘이 붙어야 간신히 겨룰만한 적인데, 든든한 조력자가 들어오니 균형이 단숨에 무너졌다.
이대로 가면 쓰러지는 건 이쪽이다.
흑토장의 오른쪽 손을 내주고 나서야 월중 장로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월편을 지키며 싸우던 때와는 아예 다르다. 실력이 뛰어난 무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흑토들을 돌아본다. 아직 그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성찬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달을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월중 장로는 두 번째 월편은 손에 쥐었다. 거기에 깃든 빛은 선녀가 만든 신성한 빛과는 다르다. 마기에 물든 것처럼, 어두운 빛이 깃든 월편을 그는 입으로 가져갔다.
월중 장로를 둘러싼 풍경이 일그러졌다.
농후한 마기가 요동쳤다. 일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몸 안의 마기가 끓어오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알베르트는 다급히 유피를 돌아본다. 그녀도 이 흔들림을 느꼈는지, 고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월중 장로를 둘러싼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낯익은 기운이다.
소하 언덕에서 느꼈던 바로 마몬의 마기다.
“아아, 그렇지. 이 힘이다. 보고 있는가, 선녀여? 가능하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 이설교가 추구했던 힘이다! 이 힘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더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기에 둘러싸인 월중 장로의 몸이 변화한다.
신복 아래에서 검은 뿔이 튀어나온다. 바깥으로 드러난 피부가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본신과는 다르다. 그 모습은 이제 마족이 아니라 악마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유피.”
“조심해, 알. 나도 지금은 대단위 마법은 다룰 수 없어.”
유피의 호흡은 깔끔하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서기 위해 다룬 마법은 그녀의 몸에 부담이 심했던 모양이다. 제단 뒤쪽에서 옅은 달빛이 쏟아졌다. 갈라졌던 물이 돌아오면서 그 안에 투영된 달도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선녀를 향해 달빛이 떨어졌다. 그녀가 자아내는 세 번째 월편에 빛이 돌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월중 장로가 도약했다.
노리는 것은 유피가 아니다. 그 움직임을 읽은 알베르트는 선녀의 앞으로 뛰었다. 손이 떨어진다. 일순간 크기를 부풀린 월중 장로의 손은 거인의 주먹과 같았다. 받아낼 수 없다. 몸이 튕겨 나간다. 뒤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선녀와 함께 알베르트는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