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성찬식(聖餐式)(1)
“월편을 만드는 것은 성찬식의 절차가 끝난 후입니다. 란은 식이 끝날 때까지 본당 2층에 숨어 계시다가, 때를 맞춰 난입해주세요. 첫 번째 월편은 막지 않아도 됩니다. 흑토 부대원들에게 돌아가는 월편에는 제가 수를 써놓겠어요. 제 생각대로 된다면 잠시나마 그들에게서 자유를 뺏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이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한테 맡겨주세요. 흑토 전원이 월중 장로의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미 포섭된 상태라면요? 선녀님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전부 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절 이런 식으로 대할 필요가 없었겠죠.”
“…….”
그 점에 대해선 맡겨달라는 듯, 선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 월편이에요. 흑토장과 월중 장로는 제가 만든 월편을 먹은 게 아니에요. 두 분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월편을 만들고 있는 저는 전력이 될 수 없어요.”
“두 사람을 제압해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요, 란. 두 사람은 강합니다. 가능하시겠어요?”
“그건 괜찮습니다. 시간은 저희의 편이니까요.”
흑토장과 월중 장로.
알베르트는 두 사람만 해결하면 된다는 말이다. 굳이 이길 필요는 없겠지. 백토 부대를 이끄는 초상 장로와 에일린이 내려온다면 당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녀님. 만약 제가 없었으면 흑토장과 월중 장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달라지는 건 없어요. 흑토 부대를 무력화한 저는 초상 장로와 에일린을 기다렸을 거예요.”
“선녀님.”
“괜찮아요. 흑토장도 그렇지만, 월중 장로도 절 죽일 수는 없어요. 물론 몹쓸 짓은 조금 당할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녀가 입에 담은 몹쓸 짓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죽이지만 않는다는 거지, 그 외의 일은 망설임 없이 행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선녀의 목소리는 태연자약했다.
“진짜 무모하신 분이군요.”
“그게 선녀의 책무입니다. 제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까요.”
선녀가 이런 사람이니까 알베르트는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동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약자와 병자를 위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던 그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란.”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한 공동을 지나왔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하얀 면사 너머로 선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물끄러미 알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란도 그 광경을 본 모양이군요.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건 저희 이신설교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그 참사를, 신교가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적게 잡아도 수천. 지면의 색이 바뀔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내린 곳이다.
흔들리는 알베르트의 눈을 앞에 둔 채 선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벽면에는 하얀 달토끼와 검은뱀을 그린 문양이 있었다. 두 동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오래된 이야기랍니다. 이신설교는 원래 두 가지 종파로 이루어진 종교였죠. 조화를 추구하는 달토끼를 모시는 신교(神敎)와 순환을 상징하는 검은 뱀을 모시는 이설교(以設敎)가 있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맥을 이어오던 이신설교는 과거, 두 종파로 다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월궁의 소유권을 두고 사투를 벌였고, 그 끝에 달토끼를 모시는 신교가 승리했습니다. 월궁에서 쫓겨난 이설교는 머나먼 타지로 떠났고, 그들은 그곳에서 맥이 다했다고 전해지죠. 후일,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교는 이설교의 남은 생존자를 찾았고, 그들을 다시 받아들였어요. 그것이 현재의 이신설교입니다.”
선녀의 손길을 따라 검은 뱀은 하얀 토끼에게서 벗어났다.
멀리, 멀리, 북쪽을 향해 올라간 뱀은 천장을 향해 그 위치를 옮겼다.
“공동에 남은 핏자국은 당시의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이에요.”
“종파 전쟁이 벌어졌던 장소군요.”
“그래요. 부끄럽게도 이곳을 적신 피는 미숙했던 우리 가족들의 피랍니다. 어리석었지요. 저희도 그렇지만, 이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토굴을 그대로 보존해놓았습니다. 다시는 같은 가족끼리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하지만, 하고 선녀는 덧붙였다.
“시간이 흘러 저희는 다시 종파 전쟁을 반복하고 있네요. 이것도 시대의 흐름이라는 걸까요. 하다못해 흑토는 저와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 말씀은…….”
“그래요. 월중 장로와 흑토는 이설교의 몇 남지 않은 후예랍니다. 제가 직접 그들을 중원으로 인도했습니다.”
“…….”
“이설교가 바라는 종착지는 월편을 통해 얻는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있습니다. 불로장생의 몸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 힘은 이 대지에서만 누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해요. 이전의 선조들이 했던 과오를 반복하듯이, 월중 장로의 바람은 끔찍한 결말을 초래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이미 그 결말을 두 눈으로 봤으니까요.”
“결말이라는 건…….”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또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두 손을 마주 모은 선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한 것은 이신설교라는 종교의 비화다. 아마도 장로급 인물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할 이야기다. 외인인 알베르트가 알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란이 밝혀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해도 괜찮아요.”
천장을 타고 올라갔던 검은 뱀이 다시 내려온다. 원래 자리로 돌아온 뱀은 꽈리를 틀었다.
그 모습을 보던 토끼는 그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샤아, 하고 뱀이 이빨을 드러냈지만, 토끼를 물지는 않았다. 단순한 위협. 그런 뱀을 토끼는 핥았다.
최악의 형태로 나아가는 두 종파와는 달리 문양의 벽화는 사이가 돈독해 보였다.
“곧 소월이 절 데리러 올 거예요. 잊지 마세요, 란. 첫 번째 월편은 손대서는 안 됩니다. 흑토가 제 월편을 먹지 않으면 제 힘도 소용이 없어요. 란이 지켜야 하는 월편은 두 번째부터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반드시 월편을 최우선순위로 지켜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선녀님.”
선녀의 당부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식의 시작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정령들의 안내에 따라 알베르트는 본당 2층으로 들어섰다.
루미에르 교의 신전과도 비슷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돔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과 본당 내부를 밝히는 샹들리에. 정문에서 제단으로 이어지는 융단의 좌우에는 촛대가 가득했다. 제단을 앞에 둔 계단의 밑은 이전에 봤던 방과 마찬가지로 지반이 살짝 내려가 있었다.
신전과는 다르게 제단의 뒤쪽에는 다프네 여신님의 조각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투명한 창문이다. 바깥이 보이는 창 너머에는 신성한 달이 본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속에 떠오른 이름 없는 은빛 달.
그 웅장한 모습에 압도당한 알베르트는, 이곳이 왜 월궁이라고 불리는지 깨달았다.
달을 눈앞에 둔 궁.
경건한 느낌마저 드는 은빛 달은 궁 안의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당의 정문이 열렸다.
문 바깥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선녀와 연검을 찬 호위무사. 초상 장로가 입었던 신복 차림의 남자였다. 그 뒤를 따라 흑토 부대가 들어선다. 융단의 양옆으로 갈라진 그들은 검을 내려놓았다. 열이 만들어진다. 좌우 다섯. 만들어진 줄은 열. 본당에 들어온 흑토의 수는 100명이었다.
제단의 앞으로 나아간 선녀는 지반이 내려간 곳에서 멈췄다.
“성찬식을 시작합니다.”
신비한 힘이 담긴 것 같다. 조용히 자아냈을 터인 선녀의 목소리가 본당 전체에 울렸다.
떨어지는 달빛을 받으며 선녀의 몸에서 경건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선녀의 등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날개가 솟아났다. 성마력. 선과 악을 상징하는 날개의 색은 사람의 이중적인 면모와 같았다. 일순간 알베르트는 선녀의 모습이 성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다.
“약속의 땅에서, 오늘 달토끼님께서 은혜를 내릴 지어니.”
월중 장로는 흑토장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흑토를 돌아보았다.
“천지신명의 종복이 그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월중 장로의 중후한 말이 본당에 울렸다.
제단을 바라보고 있던 흑토 부대의 좌열이 무릎을 꿇었다.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의 종복이니라.”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의 종복이니라.”
흑토의 대답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다.
이들의 목소리에 신비한 힘이 깃든 게 아니다. 본당의 건물 양식이, 사람의 목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이 은혜를 몸에 입은 자. 위대한 뜻을 헤아릴 지어니.”
선녀가 말을 잇자, 흑토장이 대답을 받았다.
“천지신명의 종복이 그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제단을 바라보고 있던 흑토 부대의 우열이 무릎을 꿇었다.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의 종복이니라.”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의 종복이니라.”
본당을 울리는 목소리와 비례하듯이 달빛이 선명해진다.
창을 투과한 달빛이 선녀의 얼굴로 떨어졌다. 두 손을 마주 모은 그녀의 입술이 목소리를 자아냈다.
“달토끼님과 검은 뱀님은 항상 우리의 곁에 있으니, 천지신명의 자비와 아량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합니다.”
“그리하여 천지신명이 우리를 내려다볼 지어니.”
“그리하여 천지신명이 우리를 내려다볼 지어니.”
문답이 이어진다.
“죄를 짊어지고 먼저 앞에서 나아가는 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이에게 이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는 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이에게 이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막힘 없이 이어지는 예식을 앞에 두고 압도된 알베르트와 달리, 운디네와 실프는 장난치기 바빴다. 서로의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고, 주먹다짐을 벌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령들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장난. 서로 뒤엉키던 두 정령은 알베르트의 앞까지 굴러왔다. 툭, 하고 실프의 몸과 알베르트의 얼굴이 부딪쳤다.
얼굴에 닿는 충격에 알베르트는 간신히 예식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여전히 선녀와 흑토의 목소리는 본당을 울리고 있었지만, 숨이 막힐 것 같던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실프는 운디네를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서로를 향해 뛰어간 두 정령은 손을 잡고 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무심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천지신명이라는 건 정령을 말하는 게 아닐까?
만물에 깃든 신성한 기운.
의지를 갖게 된 정령들만큼 그 말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을지도 모른다.
난간 아래로 보이는 본당이 조용해졌다. 예식이 끝난 걸까? 그렇다면 이제 알베르트의 차례가 가까웠다.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은 선녀의 등에는 여전히 날개가 자리 잡고 있다. 달빛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마력이 색이 뚜렷해졌다. 두 손을 마주 모은 그녀의 기도에 답하듯이 물 위에 투영된 커다란 달이 반응했다.
창을 통해 내려오는 달빛과 이에 성마력으로 답하는 선녀.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다프네 여신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성녀의 모습이 이러할까. 알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본당의 흑토들은 말없이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달빛과 성마력이 겹치는 자리에서 하얀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흡사 마법과도 같은 모습이다. 허공에서 맺히기 시작한 작은 물기는 선녀의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눈물 한 방울 정도나 될 것 같은 방울이 거듭해서 생겨난다. 맺히고, 맺히고. 모이기 시작한 물방울은 이내 절편과 같은 크기로 섞이기 시작했다.
[저게 월편인 모양이군요.]
‘월편? 아니, 저건…….’
성수에 가깝지 않은가? 하지만 알베르트의 의문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커다란 물방울은 이내 하얗게 굳어갔다. 월편. 달토끼가 내렸다는 성물이 선녀의 앞에서 만들어졌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월중 장로는 제단 앞으로 나왔다. 선녀가 만든 첫 번째 월편을 바라보던 그는 흑토를 향해 말했다.
“이가 바로 달토끼님이 내리시는 월편이니. 이를 몸에 받아들이는 자, 천지신명의 종복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월중 장로가 손을 쥐자 공중에 떠 있던 월편이 부서졌다. 잘게 잘게 흩어진 월편은 각각 작은 떡으로 변하더니,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흑토들의 앞으로 날아갔다.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자.”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자.”
구호와 함께 고개를 든 흑토들은 월편을 입으로 옮겼다.
목 안쪽으로 월편이 넘어간다. 첫 번째 월편은 흑토에게. 선녀의 생각대로다. 변화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 걸까. 다시 고개를 숙인 흑토들은 이전과 마찬가지인 자세를 취했다. 선녀는 이제 두 번째 월편을 자아내고 있었다. 최대한 상황을 지켜본다. 물방울이 맺히고, 떠오른 방울은 모이기 시작한다. 월편이 되어가는 물을 확인한다.
흑토의 모습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지금이 약속했던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베르트는 2층에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