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월궁(月宮) (105/200)

 # 105

월궁(月宮)

공동 안쪽은 축축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 물이 새고 있는 건지, 물기에 뒤덮인 벽면이 점차 늘어갔다. 알베르트의 어깨를 의자 삼아 앉은 실프와 운디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길을 가리키면서도 둘은 시간이 날 때면, 알베르트의 볼을 콕콕 찔러댔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나, 천칭?’

[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마스터의 예상이 맞습니다.]

‘그런가. 몇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나?’

[최소 수천입니다.]

‘…….’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예상도 다르지 않았다.

핏자국으로 보이던 검은 자국이 남아 있는 곳은 감옥만이 아니었다. 공동의 바닥이 검게 물든 땅이었던 건, 원래 지면이 검은색이었던 게 아니다. 모두 사람이 흘린 피다.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선녀가 사실대로 말해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진실을 말입니까? 오히려 마스터의 입을 막으러 들 것 같습니다만.]

‘그럴 사람은 아니네.’

[이 광경을 보고도 선녀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너무 낙관적입니다, 마스터.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족은 아주 사악한 존재입니다. 이들은 힘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다시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속단은 금물이네. 우리가 본 것이 전부는 아니라네.’

[그렇죠. 전부는 아니겠죠. 얼마나 더 잔인한 광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퍽 기대되는군요.]

신교는 과연 그걸 알고도 방치한 것일까, 아니면 그 광경을 직접 만든 것일까.

전자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베르트는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후자가 맞다. 이신설교는 무언가 끔찍한 것을 숨기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이 공동만 해도 그렇다. 신당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을 거로 누가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까? 혹시 이것도 빙산의 일각인 게 아닐까?

악마를 불러오는 월편.

불사의 몸이 된 신도.

이들이 모신다는 천지신명과 달토끼.

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베르트는 알 수 없었다.

공동 안쪽에는 거무튀튀한 색으로 빛나는 문이 있었다.

미스릴로 된 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눈이 익다. 이런 문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다. 기억을 되짚던 알베르트는 눈앞의 문이, 유피의 성 지하에 있던 문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사부님의 유산이 남겨있던 바로 그 무덤의 문과 말이다. 문 위에 어린 문양까지도 똑같다. 하얀 토끼와 검은 뱀. 음양패에 새겨진 문양처럼 두 동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내공을 흘려본다.

이전과 다르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뻗은 팔을 따라 두 정령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실프와 운디네는 알베르트를 흉내 내는 것처럼, 문을 향해 작은 손을 뻗었다.

작은 빛이 공동 안으로 들어왔다.

살며시 열린 문을 본 두 정령이 알베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에헴, 하고 팔짱을 낀 두 정령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정도는 돼야지, 하고 으스대는 것처럼 보였다. 알베르트는 열린 틈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 안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흑백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지면, 벽, 천장. 실내를 장식한 장식물까지도 흑과 백을 제외한 색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복도를 밝히는 빛도 하얀색이다. 기묘한 불쾌감이 알베르트의 등을 자극했다. 흑백으로만 꾸며진 건물. 여기가 월궁인 걸까?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누군가가 알베르트의 옆머리를 잡았다. 에일린의 정령인 실프다. 실프는 이런 곳에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는 듯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백과 흑으로 칠해진 문이 있었다.

에일린은 이 통로가 선녀님의 방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문 안쪽에 선녀가 있는 걸까. 알베르트는 복도 좌우를 확인했다. 누군가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문까지 다가갔다. 알베르트의 발에서 떨어진 흙과 물기가 하얀 복도에 남았다. 너무 쉽게 흔적이 남는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분다. 떠오른 물기는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알베르트가 남긴 흔적을 운디네와 실프가 지웠다.

에헴, 하고 다시 팔짱을 낀 두 정령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의 시선에는 두 정령의 턱과 목밖에 보이지 않았다.

“…….”

무시한다.

문고리를 돌려본다. 찰칵, 하고 문고리는 잠금장치에 걸렸다. 안쪽에서 잠겨있다.

에일린은 따로 열쇠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알베르트는 두 정령을 보았다. 실프와 운디네는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 노려보던 두 정령은 문고리로 다가왔다. 알베르트의 손을 툭툭 친다. 떼라는 것 같다. 문고리에서 알베르트가 손을 놓자 실프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달칵,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에 앉은 두 정령은 다시 알베르트를 보았다. 이제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아예 위로…….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 알베르트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고리에 앉아 있던 두 정령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원망 어린 운디네와 실프의 시선을 외면했다.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흑과 백이 고루 섞인 특이한 방이었다. 한쪽에는 침실과 지반이 내려간 공간이 있었다. 움푹 팬 땅에 그려진 것은 달토끼다. 시선을 들어 천장을 확인해보니, 그곳에는 검은 뱀이 있었다. 벽면에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벽화는 달토끼와 검은 뱀의 이야기였다.

시작은 간단했다.

한 토굴에 달토끼와 검은 뱀이 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작은 빛무리가 가득했고, 두 동물은 다툼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다음 그림에서는 달토끼와 뱀이 이빨을 드러내고 다툼을 시작했다. 다툼은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졌고. 결국, 뱀은 토굴을 떠났다. 상처 입은 달토끼는 이곳에 남았다. 달토끼의 곁에는 작은 빛무리가 남았을 뿐이다.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이 벽화에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달토끼는 남았고, 뱀은 이곳을 떠났다는 이야기 정도다.

벽화에서 눈을 돌린 알베르트는 정령들을 확인했다.

실프와 운디네는 한 가구의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다. 안에 선녀가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언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 모양이다. 두 정령의 손을 거든다. 가구 안쪽에는 검은 신복이 가득했다. 흑토가 입고 있던 바로 파수꾼의 옷이다. 신복을 툭툭 건드리는 실프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정령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탓이다.

흑토의 신복으로 갈아입은 알베르트는 정령의 안내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눈에 띄는 구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하얀 복도와 검은 벽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알베르트는 나아갔다. 길을 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을 열고 나오면 이전의 복도와 마찬가지인 통로가 이어진다. 실프와 운디네의 안내가 없었다면 길을 진작에 잃지 않았을까. 5개 정도 되는 복도를 통과했을 때쯤. 알베르트는 한 방에 들어와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병풍(屛風) 위로 떠 오른 두 정령은 앞을 훔쳐보듯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건지, 병풍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후문에서 들어오다니, 긴급한 회신이라도 있는 건가?”

이쪽이 외부인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알베르트는 낮은 목소리를 냈다.

“월중 장로님의 명입니다. 선녀님을 맞이하러 나가라 하셨습니다.”

“선녀님을? 본당(本堂)으로 안내하는 건 내 역할이라고 들었다만…….”

이상하다는 듯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말로 속일 수 있을 거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잠깐의 시간만 벌면 충분하다.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월아로 손을 옮겼다.

“예식의 순서는 달라지지 않았을 터다. 월중 장로님께 한 번 물어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월중 장로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녀님?”

“에일린을 대신해 제 곁을 지키느라 고생 많았어요, 소월. 식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만 쉬고 오세요.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혹시 괜한 배려였나요?”

안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리지만 강인한 어조는 분명 목표로 했던 여인의 목소리다.

“아, 아닙니다! 선녀님의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녀의 목소리에 소월은 두 손을 마주 모았다. 고개를 숙인 그는 소리 없이 방을 뒤로했다.

“들어와도 좋아요.”

그녀의 허락을 받은 알베르트는 병풍 안쪽으로 들어섰다.

방 중앙에는 하얀색의 신복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선녀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머리 뒤로 길게 늘어진 베일이 보인다. 대조되는 흑백 때문인지, 이상하게 눈이 아팠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 능숙하시네요. 아니면 이것도 달토끼님이 귀띔해주신 건가요?”

“달토끼님은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니랍니다. 제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 않으니까요.”

기도를 마친 선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가가 작은 호를 그렸다.

“알베르트 라나. 선녀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란.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그럴 분위기는 아닌 것 같네요.”

알베르트의 알아본 선녀는 자신의 곁에 날아온 정령을 향해 손을 들었다. 운디네와 실프가 그녀의 손가락에 앉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두 정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선녀님.”

“곧 성찬식이 시작됩니다. 나가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란이예요.”

침착한 선녀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재차 말을 이었다.

“선녀님은 모르시는 것 같지만, 성찬식의 뒤에는 월중 장로가 있습니다. 저희의 짐작이 맞다면 그들은 월편을 이용해 악마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역시 그랬나 보군요, 안타까운 사람. 결국, 등을 짓누르는 짐에 먹혀버렸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전 여기서 떠날 수 없습니다, 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저희 이신설교의 싸움입니다. 아이가 검을 들겠다면, 저 또한 회초리를 드는 수밖에 없어요. 어긋난 길로 걸어가고 있는 피붙이를 바로 잡는 것도 어머니의 역할입니다.”

“회초리가 검을 이기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습니다만.”

“실례인 말을 하네요, 란. 이래 보여도 전 꽤 강하다고요.”

선녀는 양손을 들더니, 팔에 알통을 만들었다. 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굴곡이 생겨났다.

“이상하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즐겁게 웃었는데.”

“…….”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이 늘었다.

선녀는 웃음기 없는 알베르트의 얼굴을 보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월중 장로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지나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에일린에게 따로 조사를 부탁했던 건데……. 란이 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온 걸 보면 에일린이 실패한 모양이네요. 그녀는 무사한가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신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마 초상 장로가 이끄는 백토와 함께 내려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때까지만 월중 장로를 막으면 된다는 이야기군요.”

“막다니요? 여기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성찬식이 시작되니까요.”

“선녀님. 그곳은 적지입니다.”

“란은 믿음이 부족하네요. 제가 맨몸으로 성찬식을 치르러 갈 리 없잖아요.”

선녀는 입가를 찡그렸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제 계획을 듣고 싶다면 먼저 대답해주세요, 란. 당신은 절 도와주러 온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절 데리러 온 건가요?”

“당연히 선녀님을 지키러 온 겁니다.”

“그렇다면 성찬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절 도와주세요. 그게 절 지키는 길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찬식을 치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양보하지 않는 선녀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완강하던 초상 장로를 떠올렸다.

도대체 성찬식이 뭐길래, 이들은 이 의식에 묶여있는 걸까?

“제가 월편을 만들지 않으면 저희는 또다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요. 쓰러진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성찬식을 진행해야만 합니다. 월편을 지키는 것 또한 선녀의 책무니까요.”

“…….”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선녀는 한 걸음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양양에서도 그랬다. 그녀는 꽤 고집이 셌다. 성찬식은 곧 시작된다. 자리를 비운 흑토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를 설득할 시간은 부족하리라.

“고집불통이시군요.”

“그게 제가 짊어진 무게입니다.”

“혼자서는 무리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달토끼님의 인도를 따라갈 뿐이에요. 그 고행길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이 또한 달토끼님이 바라시는 순교겠지요.”

알베르트는 월아의 칼자루를 쓰다듬었다.

유피는 선녀가 신교의 알력다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건 그녀 혼자서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아마도 신도들과 힘을 합쳐 불순세력을 정리하라는 말이었겠지. 그 수야말로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리라. 하지만 선녀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제가 졌습니다. 선녀님에게는 빚이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차례입니다.”

소하 언덕에서 월아가 힘을 빌려줬던 것은, 아마도 선녀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힘이 아니었다면 알베르트는 소하 언덕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유피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초의 계획은 포기한다.

이렇게 된 이상 선녀를 도와 월중 장로와 그 세력을 무너뜨린다.

“란은 손해 보는 성격이네요.”

“선녀님만 하겠습니까?”

알베르트의 대답에 선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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