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뱀이 보는 풍경 (104/200)

 # 104

뱀이 보는 풍경

흑토장은 본당을 둘러보고 있었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된 성유물(聖遺物)이 농후한 기운을 흘리고 있다. 준비는 끝났다. 잠시 후면 이곳에서 성찬식이 진행되리라. 제단 앞쪽에 마련된 자리에는 하얀 깔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선녀님을 위해 갖다 놓은 최고급 비단이다. 월편을 만드는 선녀는 이 자리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하기를 바라며, 흑토들이 마련한 작은 선물이었다. 딱히 그가 지시한 사항은 아니다. 흑토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물건이었다.

제단 너머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흑토장은 십자패를 만지작거렸다.

마음의 위안이 되어야 할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문양은 그들의 신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 길이 맞는 걸까.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자문을 그는 되풀이하고 있었다.

대사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그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사실 어디선가 자신은 길을 잘못 들리고 만 건 아닐까. 변해버린 월중 장로의 모습이 그에게 그런 후회를 가져오고 있었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건 그만이 아니다.

본당 곳곳에 서 있는 흑토들도 긴장감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성찬식 때문이 아니다. 성찬식에서 일어날 일이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대장.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다가온 흑토, 유화가 말했다.

“무엇이 말이냐?”

유화의 말에 흑토장은 반문했다. 부대원 중에서는 비교적 젊은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선조들을 위해서 검을 뽑는다는 건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북부의 캘러미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우리가 돌아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내려놓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잠시 무엇에 혹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선녀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겁니다. 분명 바른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겁니다.”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부하의 목소리에 흑토장은 불현듯 고향이 떠올랐다.

그의 고향은 다 쓰러져가는 작은 판자촌이었다.

북부로 쫓겨난 그들의 선조들이 간신히 얻은 안주의 땅. 한때는 수많은 일족이 모여있었던 땅에는 스무 가구도 안 되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마시고 입을 것도 부족하다. 야만족과 마물의 습격이 있고 나면, 어른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다. 아마도 자신의 세대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마지막 핏줄이 될 거라고. 막연하지만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찰나. 그 사람은 나타났다.

간신히 살아남은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소녀.

그대들을 쫓아낸 자신들을 용서해달라며 그녀는 척박한 대지에 무릎을 꿇었다.

이신설교와 달토끼.

집안의 몇 안 되는 어르신들이 남긴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었다.

소녀와 함께 선조들의 고향으로 돌아온 일족은 흑토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가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이 그들의 기도에 답해 사자를 보내줬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면 흑토장은 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달토끼니, 검은뱀이니. 그런 건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들의 신은 단 한 번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그들을 구해준 것은 신이 아니다.

그저 사람 같이 살고 싶던 그 부름에 답해준 것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작은 소녀였다.

그렇기에 흑토장은 선녀를 진심으로 모셨다. 이 소녀를 따라가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그 햇빛 아래에서 자신도 빛나고 싶었다.

이곳에 모인 흑토들도 다를 것이 없다.

다들 선녀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감화되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신을 섬기기로 했다.

하지만 일족을 이끌던 그 사람은 달랐다.

고향에서 그와 함께 선녀를 본 흑토장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보고 그 남자가 기뻐했던 것은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때 그의 눈동자에서 보였던 것은 분명…….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떠올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선녀님은 용서해주실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 그런 분이니까 우리는 오늘 이 시간까지 노력해오지 않았던가?”

“역시 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하지만 동포들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

돌아갈 길은 없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말았다.

“우리가 돌아갈 길은 없다.”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흑토장은 말했다.

유화는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흑토장을 바라보던 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설마 선녀님을 죽이지는 않겠죠?”

“모르겠다. 이전의 장로님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장로님은 어딘가 이상하다.”

모아두었던 월편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못 본 척 넘겼다.

월중 장로도 언젠가는 선녀님의 뜻을 헤아릴 거라고, 흑토장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달토끼의 목소리를 듣고, 천지신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 진정 동포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밖에 없다.

하지만 두 달 전, 양양 성에서 있었던 일을 기점으로 월중 장로는 변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보여주면서 웃던 월중 장로의 모습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간 상태였다.

“만약 우리의 신녀님이 이곳에 있었다면, 장로님을 막을 수 있었을까?”

“에일린이 했던 이야기 말이군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정말로 그녀가 신녀님의 후예를 찾고 있었다면 북쪽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왜 서쪽에 있는 금지된 숲으로 향한다는 말입니까? 말이 되질 않습니다.”

“아니, 소문이지만 신녀님이 사라진 곳은 북부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북부가 아니었다고요? 하지만 캘러미티는…….”

“우리 생존자들이 도망친 곳은 북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나? 전설이 사실이라면 제국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도망친 이들도 많은 것이다.”

“대장님. 루미에르 교는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건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월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동포들의 안위가 걱정되는군.”

“모르겠습니다. 장로님이 따로 내리신 명도 없습니다.”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난 건가.

흑토장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월각에 있는 동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월편이 필요했다. 월편에 담긴 신비한 힘이 아니고서는 망자를 눈앞에 둔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월중 장로의 손에 들어간 월편은 무언가 사이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금단의 힘을 쥐고 다루는 그것은 더는 월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걸 몸에 담은 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흑토장은 잘 알고 있었다.

선녀님은 그 광경을 보고도 월편을 계속해서 만드실까.

모르겠다. 유화에게는 그녀라면 우리를 용서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선녀님이라도 그들을 용서할 리 없다. 단순히 힘을 다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포를 죽였는가. 살려달라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자신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미 그들이 행한 사건은 윗선까지 알려져 있었다.

시더 황자님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끼는 시녀까지 파견했다. 꼬리를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도 월중 장로는 멈추지 않았다. 죄인과 지저의 범죄자들을 상대로만 일으키던 사건이, 무고한 동포들을 휘말리게 만들고. 힘의 한계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무인들까지 희생시켰다. 오늘은 또 어떠했는가. 그들의 처지와 다를 것이 없던 빈민가의 아이에게까지 월편을 먹였다.

월중 장로는 폭주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월중 장로는 이미 동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흑토장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분노를.

그 증오를.

자신이 막을 자격은 없었다.

흑토장은 유화가 올려다보는 천장을 보았다.

그곳에는 그들의 신이 꽈리를 튼 채 달토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지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정처 없이 부유한다. 위아래 양옆으로 기우뚱거리는 것은, 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일까. 몸이 무겁다.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도 모르겠다. 시야를 채우는 것은 눈부신 빛뿐이다. 그런가. 그녀는 이제 곧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었다.

부모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빈민가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전전하고,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 판자촌을 기웃거렸다. 자신이 혼혈이라는 것도, 무서운 폭력을 당한 뒤에야 알았다. 당시 그녀가 살아남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혼혈 아이는 어차피 내버려 둬도 죽으니까.

한량들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이 분했다.

하루살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너 따위는 기어 다니는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노력했다. 발악했다. 무시당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 알아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있는 힘껏 살아왔는데…….

다들 죽었다.

빈민가에서 간신히 만든 친구들도. 어렵사리 손에 넣은 판잣집도 무너졌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 세상은 그녀에게 상냥하지 않았다. 한없이 차갑고, 비정했을 뿐이다.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검은 연미복이 떠오른다. 화려한 고성에서 일할 것 같은 그 남자는, 자신을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그런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치고는 나쁘지 않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지아는 입을 움직였다.

“이제, 쉬어도 되겠네요. 고마워요, 알베르트 오빠.”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면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안타깝다고 울어줄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슬퍼할까? 잘 모르겠다. 아니, 나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걸 알긴 할까? 아, 그건 조금 싫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빈민가에서 힘냈다는 걸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그 남자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말랐던 눈물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정말로 끝이구나.

이대로 나는 죽는구나.

싫다.

그런 건 싫다.

죽고 싶지 않다.

이렇게 죽는 건 싫다.

“저, 저. 사실은…… 죽기 싫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죽기 싫어.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빈민가를 뒹굴며 살았다. 쓰레기를 전전하면서, 아무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해도. 단지, 살고 싶다는 전념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제야, 이제야 이곳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왜. 나만 왜…….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세상을 비난하는 말은 언제나 내뱉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언제나 저주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왜 나만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냐고.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됐다.

나이는 어려도, 그녀는 세상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 같은 아이가 울부짖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리광을 받아줄 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안해요, 오빠 잘못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죠?”

이제 그만하자.

여기에 그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멋대로 목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은 따로 없었으니까. 그나마 대화가 통했던 것은 알베르트뿐이었다.

기분 탓일까.

주변이 조금 따스해진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내세에 가까워진 건지도 모른다. 이신설교의 선녀님이 그랬다. 천지신명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다고. 그들이 믿고 지켜보고 있으니, 항상 고개를 들고 당당히 앞을 보라고 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목소리에 대답한다고 말이다.

지아는 한 번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이것이 선녀님이 말한 그들의 속삭임인 걸까. 나쁘지 않다. 내세가 이렇게 따뜻한 거였다면, 아등바등 살아갈 이유는 없었다. 아프지 않다. 포근한 무언가에 둘러싸인 기분이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으로 한 쌍의 날개가 보였다.

누군가가 있다.

아름다운 얼굴.

의식을 잃기 직전, 지아는 별무리가 지는 은빛의 선녀를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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