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마인(魔人)(1) (9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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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魔人)(1)

낙양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의 겉모습을 담당하는 상부 낙양과 해가 뜨지 않는 도시인 지저로. 최소한의 규칙이 남아 있는 빈민가와 달리 지저는 적자생존만이 유일한 규칙이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옛 무림과도 비슷해 보였다.

강자지존(强者至尊).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걸 쟁취한다. 하지만 지저에는 가장 중요한 협(俠)이 없었다. 이곳은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순한 자원으로 취급한다. 나락의 끝자락과 같은 지저는, 무림과는 근본적인 부분부터 달랐다.

낙양의 주민들은 누구나 그렇듯 귀동냥으로 들려오는 지저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낙양 아래에 그런 도시가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풍문처럼 들려오는 흉흉한 이야기는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해가 없는 도시, 지저.

떨어지고 떨어진 자들이 모인 나락의 끝. 옛고향을 바라보는 라피엘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도시다. 상황이 여의치만 않았다면, 그녀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복잡한 소꿉친구의 심정은 느껴지지도 않는지, 아이네르는 밝은 어조로 콜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로 지저를 돌아볼 생각이에요?”

“왜? 무서워?”

“안 무서우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지저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아이네르는 심약한 부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곱슬머리가 푹 가라앉았다.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에 콜린은 상관의 손을 털어냈다.

“황자님이랑 같이 다니다 보니까, 사고방식까지 단순해진 건가요? 주먹만 나가면 뭐든 해결될 거로 생각하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

“무슨 소리야? 그런 건 남자들이나 그렇겠지.”

“아, 그래요? 저는 가끔 아이네르 님이 왜 여자로 태어난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정말. 칭찬은 단둘이 있을 때만 해라.”

“칭찬한 거 아닙니다.”

냐하하, 하고 아이네르는 웃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예쁜 사람인데, 행동거지가 완전 동네 소년이다.

“그러고 보니 너는 느껴지는 게 없나 보네? 황자님 곁에 있는 사내들은 다 그런 느낌이잖아? 나를 따르라! 하면, 우오오오! 같은 느낌말이야.”

“그걸 이해하는 저도 갈 데까지 갔나 보네요. 하지만 절 그 사람들이랑 같은 취급하지 마세요. 그쪽은 육체파고, 저는 머리를 쓰는 쪽이라고요.”

투덜거리는 콜린의 가슴에 툭, 하고 아이네르의 주먹이 닿았다.

“뭡니까?”

“너도 있다, 멍청아.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뿐이야.”

“황자님 같은 소리는 그만 하고 이만 가시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입니까?”

이 사람들과 있으면 자신도 바보가 될 것 같다. 이것도 다 황자님의 영향일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끊은 라피엘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말이야, 라피엘.”

“무슨 일인가요?”

라피엘을 따라잡은 아이네르는 말했다.

“저번에 유피에르 황녀님을 보고 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어때 보였어? 여전히 세상의 불행은 전부 짊어진 표정이었어?”

“건강하시더군요.”

두 사람을 따라오던 콜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라피엘은 유피에르 황녀님을 잘 아시나요?”

“유피에르 황녀님을 잘 아는 분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사용인 중에서는 너 말고 친한 사람이 없었잖아?”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그 황녀님과 말문을 연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았어?”

“발언에 조심하세요, 아이네르.”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라피엘은 유피에르 황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가 처음 황실로 들어왔을 때는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마황의 마지막 혈육. 지울 수 없는 혼혈의 냄새에 분개한 대신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수나 다름없는 인족의 피가 섞였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존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만약 후견인으로 위나 바토리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유피에르 황녀의 운명은 그날 결정되었을 것이다.

대신들의 중상모략 속에서도 유피에르 황녀는 꿋꿋이 황실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시간 대부분을 현자님이 계신 탑에서 보낼 뿐이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현자님의 제자가 된 황녀님은 누구도 건들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그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황녀님은 출신과는 관계없이 빛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나 바토리의 제자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피에르 황녀님은 그럴 수 없었다.

사건은 일어났고, 현자님은 죽었다. 쫓겨나듯이 황실에서 사라진 그녀는 마녀의 산으로 향했고, 지금은 현자님이 관리하고 있던 이름 없는 성에서 그분의 유지를 잇고 있었다.

“궁금하네요. 유피에르 황녀님은 현자님의 마지막 제자시잖아요?”

“동시에 숲의 마녀기도 하지. 재능만 놓고 본다면 현자님과 필적한다고 하던데?”

유피에르 황녀님은 압도적인 마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계 내에서도 몇 되지 않는 수준급의 마법을 다루는 마녀다. 처음에는 그녀의 존재를 수치로 여기던 황실도,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추문은 많았지만 말이다. 다 그들이 작업해놓은 결과물이다. 그 소문 중에는 당치도 않은 이야기가 많다는 걸 라피엘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양양이 공격을 받았다는데, 그 사태를 해결한 사람이 유피에르 황녀님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나도 들었어. 근데 사태를 해결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이네르와 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그 사태를 수습한 것이 유피에르 황녀님이라는 소문은 북부의 전선까지 닿아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나 라피엘은 두 사람의 말을 부정했다.

“무엇보다 유피에르 황녀님께서 양양에 계실 이유가 없습니다. 누군가 와서 그분을 모셔갔다면 모를까, 마계로 외출을 나오실 분이 아닙니다.”

“황녀님의 엉덩이가 그렇게 무거웠던가?”

“시더 황자님이 방문하기 전까지 성에서 움직이지 않던 분입니다. 무슨 연유로 칩거를 깨고 움직이시겠습니까?”

“흠…. 그러네. 소문이 사실이라면 엉덩이가 무거워서 몇 년 동안 숲에 계신 거잖아?”

“자꾸 엉덩이, 엉덩이 하지 마시죠. 천박합니다.”

“그럼 엉덩이를 엉덩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

“…….”

라피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꿉친구를 향해 한심한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이름 없는 성에는 아직 떠나지 못한 망자들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을 전부 해결하지 않는 한 유피에르 황녀님께서 성 밖으로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런가. 그럼 그 사태는 그 병약한 황자님이 해결하신 건가? 생각보다 제법이네. 다음에 만나면 엉덩이라도 토닥이면서 칭찬해줘야겠어.”

“아벨 황자님 혼자서 해결한 건 아닐 겁니다.”

은근슬쩍 엄청난 말을 꺼내는 아이네르의 모습에 콜린이 질렸다는 시선을 보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다.

“양양에서 일어난 사태는 몽환기에 의한 지옥도라고 들었습니다. 지옥도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사가 마계 내에서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습니까? 현자님이 안 계신 지금. 발푸르기스의 자매들 정도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겠죠.”

“엉덩이 무거운 마녀들이 움직였다는 말이야?”

이쯤 되면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하지만 자각은 없겠지. 라피엘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산의 마녀가 움직인 것 같다고 했지만,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마녀의 산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든 일입니다.”

“산의 마녀라면 에르체베트 님이던가?”

“세실리아 아그리파 님입니다.”

발푸르기스의 자매를 이끄는 그랜드 위치, 세실리아 아그리파. 벌써 몇백 년을 살아오고 있다는 마녀는, 최후의 현자였던 위나 바토리와 마찬가지로 마계에 몇 남지 않은 대마법사였다.

“북부에 있을 때가 아니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양양으로 놀러 가는 건데. 그만한 마법이라면 엄청 예뻤을 것 같은데?”

“전 빼주시죠. 벌써 대도서관이 그립다고요.”

콜린이 우는 소리를 내자, 아이네르의 얼굴이 장난기로 물들었다.

“뭐야. 또 꽁무니를 빼는 거야?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남자라고 모두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황자님 같은 사람이 특별한 거라고요.”

“흠…….”

자기와 키가 비슷한 부관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콜린은 다른 것보다 일단 몸을 단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잖아. 내일부터는 내 수련에 어울려. 일단 그 썩어빠진 근성부터 바로 잡자.”

“산뜻한 얼굴로 말해도 안 할 겁니다.”

아이네르가 말하는 수련이 어떤 것인지 떠올린 콜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수련이 아니다. 한 번 어울렸다가는, 며칠 동안 근육통에 시달려야 할지 모른다.

“애초에 그건 수련이 아니라 몸을 혹사하는 짓이에요. 그런 건 혼자 하세요. 왜 절 끌어들이는 겁니까?”

“혹사가 아니라 단련이다. 간단하게 몸을 푸는 일도 안 하니까, 네가 다른 문관처럼 입만 살아있는 거야.”

“마계의 수많은 문관 분들에게 사과하시죠?”

목소리가 높아지는 두 사람을 라피엘은 무시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사이 목표로 했던 건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관문과도 같은 커다란 대문을 가진 저택.

지저 내에서도 초대받은 이들만이 갈 수 있다는 금낙장이 눈앞에 있었다.

라피엘은 품에서 가면을 꺼냈다.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얼굴에 쓴다. 돌아보니 잡담에 열중을 올리고 있던 두 남자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위로 안경을 다시 쓴 콜린을 확인한 그녀는 문으로 다가갔다.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문지기를 향해 라피엘은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받은 문지기는 내용을 확인했다.

지저와 연줄이 닿은 고위 관리의 카드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준비한 물건이지만, 통과할 수 있는 확률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금낙장의 출입증으로 사용되는 카드는 기간제였다. 매번 막대한 돈을 들이지 않으면 기간을 갱신할 수 없었는데, 아직도 카드의 기간이 유효한지 알 수 없었다.

카드를 통하지 않고 들어가려면 관계자의 추천을 받는 수밖에 없었는데. 금낙장의 관계자로부터 추천을 받는 것은, 마른하늘에 별 따기만큼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문지기는 무심하게 카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카드에 문제는 없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문지기가 장치를 조작했다. 거슬리는 기계음과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콜린이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로 뺐다.

“저는 여기서 빠질게요. 아무래도 제 능력으로는 도움이 안 될 것 같네요.”

그런 부관의 목덜미를 아이네르는 낚아챘다.

“자자, 여기는 연약한 여자 두 명밖에 없으니, 이럴 때 남자가 앞에 서는 거야.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연약한 여자요? 그러네요. 라피엘은 충분히 연약하지만, 아이네르 님은 다르잖아요.”

“칭찬은 둘이 있을 때만 하랬잖아.”

“왜 얼굴을 붉히시는 건가요?”

금낙장으로 들어간 세 사람의 모습은 곧 커다란 문에 삼켜졌다.

한 차례의 손님이 지나간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검은 가면 안쪽에서 안광이 빛난다.

왕좌에 앉은 사룡은 대회장으로 들어오는 알베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에 들어선 알베르트는 그런 사룡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의 팔걸이에 손을 얹은 그는 무료하다는 눈치다. 도전자가 들어왔음에도 흥미 따위 없어 보인다. 그건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일까.

[무모하지 않습니까, 마스터? 굳이 이 대회에 참석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무룡대회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무언가가 걸려서 말이네.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네. 잘하면 우리가 찾는 사건의 관계자가 이 무인일 수도 있네.’

사룡의 몸에서는 조금 전의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잠자는 호랑이처럼 의자에 몸을 맡긴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느낀 게 아니다. 그 꺼림칙한 기운은 착각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기다. 그것도 내면을 자극하는 끔찍한 종류의 힘이었다.

[이길 자신은 있습니까?]

‘없다면 이곳에 나오지도 않았네.’

허리춤의 칼자루를 만진 알베르트는 몸 안의 내공을 확인했다.

주인의 의지에 답하듯이 강인한 내공이 혈도를 달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강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의 경지가 어디인지 알베르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부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여기는 유피의 성이 아니다.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마계의 수도다. 만약, 그의 전력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같은 무인뿐이었다.

[정말로 많이 변했군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네.’

[그렇죠. 자연과 마찬가지입니다. 순환을 따라가듯이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마스터가 더 인간다워서 좋군요.]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누구나 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린 알베르트는 사룡을 향해 쏘아 보냈다.

도전자의 투기에 반응한 사룡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깨 위를 덮고 있던 망토를 벗은 놈은 대회장으로 뛰어내렸다. 쿵, 하고 두 발과 닿은 비무장의 바닥이 깨져나갔다.

“자네가 사룡인가?”

사룡이 쓴 가면은 칠흑의 용이었다. 입가만 드러낸 녀석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하고 주변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 같다. 주인의 손에 몸을 맡긴 화룡검이 사룡을 향해 하얀 검신을 드러냈다.

“유언이 있다면 들어주마, 도전자.”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룡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칙칙한 현철로 만들어진 검이다.

두 무인의 시선이 교차했다.

다음 순간, 붉은 검과 검은 검이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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