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마녀의 외출(1)
알베르트와 헤어진 지아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품에는 그가 주고 간 돈주머니가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안쪽에 있던 동전의 수는 소녀의 생각을 몇 배나 뛰어넘는 개수였다. 이 중에서 금액 대부분은 그녀의 뒤를 봐주는 문파에 넘겨야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빈민가를 떠나는 건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길잡이를 하면서 받은 돈은 소녀가 지금까지 벌어온 돈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이만한 돈이 있다면 양양으로 떠날 수 있다. 거기에 양양은 소문보다 더 친절한 장소 같다. 알베르트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어도 될만한 곳인 건 확실했다.
양양에 가면 일단 몸부터 깨끗이 씻자. 모아놓은 돈으로 옷도 새로 사고, 객잔 같은 곳에서 떳떳하게 일하자. 일자리를 구하고 나면 정착이다. 마음이 들뜬다. 그곳이라면 잡종이라 불리는 자신도 어깨를 당당히 펴고 살아갈 수 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일단 돈이 얼마나 모였는지 확인하자. 같이 지낸 소(騷)와 토(土)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늘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떠나자. 문파의 사람들이 오기 전에 움직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산일까지 시간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녀가 바깥사람의 길잡이를 하고 돈을 받았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이곳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빈민가의 풍경이 익숙한 길로 변해간다.
길목 한쪽에 낯익은 쓰레기통이 보였다. 지아는 무심코 발을 멈췄다. 요 며칠간 알베르트를 기다렸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와 함께 빈민가를 돌아다닌 건 일주일도 안 됐지만, 지아는 그 시간이 벌써 먼일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세상 물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어떤 바보가 빈민가에 혼자서, 그것도 그런 옷을 입고 들어온다는 말인가.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그의 길잡이를 하고 있을 때,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었다.
만약 지아가 작은 함정을 준비했다면, 바깥사람인 알베르트가 살아남을 길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설마 저택의 시종을 맡은 알베르트가, 그렇게 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아쉬워서 그러는 걸까?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해준 사람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지아를 어린애라고 무시하지도 않았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쓰고 보지도 않았다. 지아라는 소녀를 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있었다.
“…….”
다음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는, 빈민가의 꼬마가 아니라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혹시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그는 자신이 남자인 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 지아는 문득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빈민가 특유의 악취가 아니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 해가 진 뒷골목과 지저에서 맡아본 기억이 있는 냄새다. 그게 무슨 냄새인지, 소녀는 알고 있었다.
낡은 문 아래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집을 앞에 둔 채 소녀는 발을 돌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녀의 뒤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녀의 발을 막은 남자는 아는 사람이다. 항상 수금하러 오는 문파원이다. 남자를 본 지아의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지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속이 뒤틀리는 아픔에 소녀는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맞은 배를 감싸 안았다. 히끅, 히끅 하고 자신이 낸 것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내가 왜 너 같은 꼬맹이를 신경 써야 하는 거냐?”
“죄, 죄송합…….”
“많이도 챙겼군. 어디 긴히 쓸 곳이라도 있었나 보지?”
지아의 옷에서 돈주머니를 꺼낸 남자는 자신의 품에 챙겨 넣었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걸까? 아직 정산일은 멀었는데. 누가 알려준 걸까? 의심 가는 건 누구지? 소와 토? 아니, 그 아이들이 그럴 이유가 없다. 통증이 심해서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지아의 머리로 남자의 발이 올라왔다.
“아, 으…….”
“됐다. 곧 친구들의 곁으로 보내주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죽는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라 여기서 죽는다. 이 사람은 애초에 그녀를 죽이러 왔다.
“사, 살려…….”
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을 자아내는 그녀의 얼굴로 따뜻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입안으로 들어온 그것은 비릿한 맛이 났다. 흐리멍덩한 시계 사이로 붉게 변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야……!?”
머리에 실려있던 남자의 발이 넘어간다. 남자의 몸이 지아의 위로 떨어졌다. 남성의 몸에 눌린 지아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간신히 호흡을 재개하는데, 그녀의 얼굴 앞으로 붉은 고깃덩어리가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던 남자의 머리였다.
“……!”
우욱, 하고 지아는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주변이 시끄럽다. 목소리가 커지고, 고기를 잘라내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몸이 뜨겁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무언가가 옷을 적시고 있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지아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귀를 막고 싶은데, 막을 수가 없다. 남자의 시체에 깔린 지아의 신체는 자유로운 곳이 하나 없었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들었지만, 소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아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생존자가 있군.”
몸을 누르고 있던 시체가 멀어진다. 간신히 눈을 뜬 지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십자패였다. 이신설교의 성물.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빈민가의 아이들에게까지 퍼진 종교. 신교의 신도들은 믿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안심했다.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다.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마시거라.”
남자가 건넨 물을 마신 그녀는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온다. 붉은색으로 변한 골목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자신에게 물을 건넨 남자와 벽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지켜보는 남자. 두 사람 모두 십자패를 차고 있었다.
“미,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자.”
신교의 구호를 입에 담자,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두 남자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렇군. 꼬마 아가씨도 신도였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모, 모르겠어요.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지고, 누군가가…….”
“죽이기 시작했다는 말이구나.”
흠, 하고 남자는 턱에 손을 괴었다.
“곤란하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니 말이다.”
“네……?”
지아의 반문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남자의 손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본신을 드러낸 마족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운과는, 무언가 달랐다. 손이 다가온다. 지아의 목을 앞에 둔 채, 손은 얇은 연검에 막혔다.
“장로님. 굳이 그 아이를 죽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문제가 발생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복수의 대상은 신교지, 동포들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우리의 손은 이미 더러워졌네. 누구 하나 깨끗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그래도 괜찮네. 나는, 아니. 우리는 선조들의 한을 풀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니었는가? 대의가 앞에 있네. 죄악감을 버리게, 흑토장(黑兎將).”
“…….”
그래도 흑토장은 검을 치우지 않았다. 연검을 쓰다듬던 장로는 손을 뗐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검은 뱀께 물어보지. 우리는 모두 죄인이니, 천지신명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겠나?”
장로는 몸을 숙였다. 지아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살고 싶으냐, 아이야?”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살아남을 길이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가 재밌다는 듯 장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렇다면 이걸 먹어라.”
“……?”
장로가 소녀에게 건넨 것은 검은 절편이었다. 작은 절편은 신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지아는 절편을 보고, 남자를 보았다. 장로는 손짓했다.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아는 두 눈을 감았다. 그 입으로 검은 절편이 모습을 감췄다.
*&*
방 안에는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유피에르 바토리는 벌써 며칠째, 방에 틀어박혀 서류만 훑어보고 있었다. 번 사건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따로 모아 둔다. 써먹지 못할 자료가 너무 많다. 정보를 분류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쏟아지는 자료는 독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장시간 앉아있던 탓인지, 왼쪽 어깨가 쿡쿡 쑤셔왔다.
시선 한쪽에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있는 서류가 보였다.
이신설교라는 사교를 조사해 놓은 정보다. 저것도 전부 살펴봐야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다. 편두통을 느낀 유피에르는 찻잔을 들었다. 입으로 옮기고 보니, 찻잔에는 홍차가 남아있지 않았다. 찻주전자로 손을 가져간다. 이쪽도 가볍다. 흔들어보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용물이 전부 떨어진 모양이다.
“알, 차를 좀…….”
자연스럽게 말하던 그녀는 멈칫했다.
금낙장에 관해 알아보러 나간 집사는 이곳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녀뿐이다.
“나가기 전에 좀 채워놓고 가지.”
짧게 투덜거린 유피는 그게 생트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베르트는 분명 차를 달여놓고 나갔다. 이건 평소와 다르게 자신이 차를 더 마신 탓이다. 자리에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잖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다. 오전이 가기도 전에 다 마셔버렸다는 건가.
유피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잎을 확인해본다. 남아있는 잎은 없다. 혹시 알베르트가 따로 치워놓은 건 아닐까. 짐을 확인해보려던 유피에르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짐은 정리되어 있었지만, 가방이 너무 많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그녀는 모른다. 전적으로 알베르트에게 의지하고 있던 탓이다.
차만 마실 거면 차라리 1층에서 주문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유피에르는 문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점소이는 부재중이었다. 재료를 사러 잠시 장을 보러 나갔으니, 두 시간 정도 기다려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차를 손에 넣지 못한 그녀는 방으로 돌아왔다.
“…….”
뭔가 풀리는 일이 없다.
집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몸 상태가 나빠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것도 그 남자가 오고 난 뒤에 생긴 변화 같다.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는 것도 그렇다. 짐을 향해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풀지 않은 찻잎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얇은 스톨과 바람막이. 냅킨은 물론이고, 수건을 비롯한 세면용품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이쪽 짐은 아닌 모양이다. 다시 넣으려고 보니 이상하게도 공간이 부족했다. 억지로 쑤셔 넣어본다. 통, 하고 가방은 짐을 도로 토해냈다. 옷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가방에서 손을 뗐다. 정리는 알에게 맡기자. 응, 그 남자라면 능숙하게 처리해줄 거다.
어지러진 짐을 방치한 유피에르는 다른 가방을 확인했다.
여기는 여벌의 옷을 가져온 것 같다.
유피에르가 갈아입을 외투를 비롯해 레이디의 필수품이라는 하얀 장갑, 얇은 속옷과 베일. 챙이 넓은 모자를 비롯해 양말도 있었다. 유피에르는 양말에서 눈을 찡그렸다. 자신은 양말을 신지 않는다. 맨발을 드러내는 것은 세계수로 향하는 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준비된 양말은 목이 긴 것과 짧은 것. 색도 수수한 것과 화려한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성이 왜 이렇게 철저한 거야?”
제국의 귀족들은 여행을 떠날 때 짐을 마차로 들고 다닌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있다.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챙기고 다니면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쓴다고 했던가. 하지만 자신은 제국의 귀족이 아니다. 이렇게 많은 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걸 준비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했을 집사를 떠올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일류 집사라면 주인 아가씨가 마음을 쓰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쓸데없이 겉멋만 들었다니까. 집사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피에르는 입가를 찌푸렸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해보자.
그 남자는 어찌 된 모양인지, 그녀 앞에서는 절대 약한 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기색이라도 잘 숨기면 모를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몸이 아프면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진다든가, 내 눈치를 볼 때면 살짝 눈을 굴린다든가.
잘 보면 빈틈이라고 할만한 구석이 보였다. 억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고 할까. 최근에는 모른 척 넘기는 것도 귀찮았다. 좀 더 자신을 의지해도 좋으련만. 물론 알베르트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 그게 연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유피에르는 알고 있었다.
짐 속에서 찻잎을 찾아낸 그녀는 홍차를 탔다.
“시녀가 필요하긴 하겠네.”
단지 차를 탔을 뿐인데, 방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알베르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 모양이다. 없는 것보다 있는 쪽이 훨씬 좋으리라.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면 시더 오빠에게 한 명 소개해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다. 알베르트가 특별하다. 시더 오빠나 아벨 오빠의 입김이 닿은 사용인이라면 이것저것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피곤해질 일은 사전에 방지하고 싶다.
우려낸 차는 집사가 타준 것과 다르게 맛이 없었다.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던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한 입밖에 대지 않은 차는 결국, 전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아직 집사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남은 차는 없고, 점소이가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던 유피는 입을 열었다.
“바람이나 쐬고 올까?”
나가는 김에 현장도 둘러볼 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