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마녀와 악의
톡톡, 하고 규칙적인 소리가 울린다. 유피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들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도구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던 낙양의 북쪽 거리를 모방한 지도다. 위에는 안개 낀 황하가 있고, 그 아래로는 신당이 있다. 신당의 좌측에는 곽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인의 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은빛 마나가 반짝인다. 뿔뿔이 흩어지는 마나는 마치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걸까. 지도를 바라보는 유피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알베르트는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았다. 창밖의 거리는 어둠이 짙게 눌러앉아 있었다.
곽부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신당 근처에 있는 객잔에 방을 잡았다.
유피가 자주 이용했다는 북경루(北京樓)는 제법 모양새가 깔끔한 건물이었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방 밖에 내놓은 알베르트는 소리가 멈췄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음속의 매듭이 지어진 모양이다.
“날이 밝으면 도공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자.”
“신당을 방문하는 건 차후라고 생각할게.”
“그래. 확실한 게 없는 지금 굳이 신교를 들쑤셔 놓을 필요는 없어.”
양 눈을 지그시 누른 유피는 말을 이었다.
“뭔가를 추측하고 싶어도 가진 정보가 너무 없어. 먼저 관아가 이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있고, 사라진 게 도공뿐인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어.”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라는 거네.”
“그래. 내 과민반응일지도 모르지만, 그리 간단한 이야기로는 보이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건 신교가 얽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도공의 주장만 놓고 본다면 신교는 유력한 용의자야.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엇보다 범인으로 의심받을 게 뻔한 일을 그들이 그냥 저질렀을까? 역으로 신교를 음해하는 세력이 함정을 만든 것 같지 않아?”
“누군가가 신교를 범인으로 몰고 있다는 거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야. 진짜로 신교가 범인일지도 모르지.”
알베르트는 양양에서 있었던 선녀의 연설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은 성녀의 행보를 닮아 있었다. 동포를 생각하는 그녀가 있는 단체에서, 이런 사건을 벌인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들보 같은 나무가 건강하다고 해서 숲 전체가 건강할 이유는 없다. 유피의 말이 맞았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만약 신교가 범인이라면, 목적은 뭐라고 생각해?”
“아벨 오빠의 말을 생각한다면…… 역시 악마와 관련된 것이라고 봐.”
알베르트는 양양에서 조우했던 마몬을 떠올렸다. 괴물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던 존재다. 정말로 신교는 마왕을 추종하는 종교인 걸까.
“알은 가장 뛰어난 촉매제가 뭐라고 생각해?”
화제가 바뀐다. 유피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마석. 그중에서도 으뜸인 신석이겠지.”
“맞아. 그럼 그 신석과 비슷한 순도의 촉매제가 있다면 그건 뭐라고 생각해?”
알베르트는 마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잡학이라고 해도 좋을 지식은 많았다. 어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와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은 이름 높은 마법사였으니까.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당연한 거야, 알. 북부의 이교도들이 산제물을 바치는 건 힘을 원하는 거야. 루미에르 교에서 왜 산제물을 금지하고, 그와 관련된 의식을 배척하겠어? 그건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그릇된 힘을 빌려오기 때문이야.’
아가씨와 나눈 문답을 떠올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사람의 목숨.”
“좋은 대답이야. 사람의 생명력이야말로 마법에서는 최고의 촉매제가 돼. 양양에서 봤던 지옥도와 마찬가지야. 악마를 현세로 끌어오기 위해서 녀석들은 동포들의 목숨을 길로 이용했어. 이번 건도 그 연장이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너무 적어.”
적다고? 무엇이?
“아벨 오빠의 말대로 신교가 마왕의 부활을 꾀한다면, 도공과 문하생 몇 명을 납치한 수준으로는 택도 없어. 몽환기도 없이, 의식만으로 악마를 불러낸다고? 말도 안 돼. 그만한 산제물로는 일반 악마를 불러오는 길밖에 열지 못해. 마왕을 불러내고 싶다면 낙양 주민 전체를 산제물로 삼아야 할걸?”
“…….”
마족의 수도를 산제물로 바친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끔찍한 대학살이다. 멍하니 바라보는 알베르트의 시선에 유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지나쳤네. 일단 신교는 용의자 중 한 곳으로 생각해놓자. 정말로 관계가 없을지도 몰라. 도공과 이야기를 나누던 장로의 모습은 연기라고 생각하기 힘들거든. 어쩌면 신교 전체가 아니라 불순 세력이 섞여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기를 바란다. 알베르트도 마족의 버팀목이 되는 신교가 배후가 아니길 바랐다.
“내일부터는 크게 움직여 보자. 알은 늙은 쥐가 말했던 금낙장을 알아봐 줘. 싸움판에 있는 무인들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관아를 찾아가서 이번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얻어올게.”
“혼자 움직이겠다는 말은 아니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정말 겁도 없는 아가씨다. 태연한 유피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피의 짐작이 맞다면 녀석들은 평범한 세력이 아니야. 이미 낙양에 눈과 귀가 깔려 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아. 우리가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움직임을 취할 거야.”
“그래, 바보가 아닌 이상 꼬리를 드러내겠지. 몸통까지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입막음하러 들 거야.”
“어머, 내가 그런 녀석들에게 당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피의 입술 아래로 하얀 이가 엿보였다.
그거야말로 원하는 바다. 대담한 그녀의 표정에 알베르트는 말했다.
“유피.”
“알은 걱정이 많구나. 괜찮아. 나는 성안에서 보호만 받는 공주님이 아니니까.”
“유피가 강한 건 나도 알고 있어. 해코지당할 걸 염려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단순히 유피의 몸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알베르트는 다른 걸 걱정하고 있었다.
“유피가 어떤 걸 보고 살아왔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유피는 황녀잖아. 성안에서 보는 풍경과 성 밖의 풍경은 달라. 철없는 어린아이가 영웅담의 밝은 면만 보는 것과 같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밖에 나와서야 깨닫는 법이야.”
“흐응. 명문가의 집사가 할 말은 아닌데?”
“나는 슬럼가 출신이니까.”
“…….”
그녀와는 시작점이 다르다.
어린 시절 알베르트는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 끝을 보고 자랐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순수한 악의를 부딪치며 광기로 나아간다.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강제로 빼앗고, 힘이 없으면 빼앗긴다. 그것은 재물이든, 목숨이든. 저울에 재는 무겟값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루드비히 저택에 몸을 담게 된 이후였다.
“녀석들의 악의는 유피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야.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몰라. 나는 그걸 묻는 거야. 유피는 그 악의를 보고도 괜찮겠어?”
강함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심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평생을 아가씨의 곁에서 살아온 알베르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악의가 느껴질 때, 곁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강한 척하지만, 유피의 마음은 여리다. 혹시라도 그녀가 상처 입는 건 아닐까.
알베르트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걱정 어린 집사의 시선에 유피는 입을 열었다.
“알은 혼혈 황녀인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었다고 생각해?”
“그건…….”
“황좌에 오를 수도 없는 혼혈은 죽일 필요도 없으니까?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혼혈은 그 혈통만으로도 무시당하는 존재라고. 피를 중요시하는 황실은 더 하면 더 했지, 그냥 넘어가는 곳이 아니었어. 실제로 낙양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범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야. 그건 그 사람의 사후에도 달라진 바가 없어. 할아범의 유언으로 마녀의 산을 찾아가고. 위치크래프트를 배우고. 무희까지 되어가면서 나는 아등바등 살아왔어. 그런 내가, 이제 와서 그런 악의에 상처받을 것 같아?”
“…….”
“날 너무 무시하지 마, 알. 내가 지금까지 눈에 담아온 세상은 네 생각보다 더 잔인했어.”
알베르트는 유피를 가만히 응시했다.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는 곧은 시선. 앞을 바라보는 붉은 두 눈에는 강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던 마음이, 사실은 그녀를 무시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두 손을 모은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요.”
“네 사과를 받아들일게, 집사.”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유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화났어?”
“그럴 리가.”
집사의 대답을 확인한 마녀는 두 손을 마주쳤다. 짝, 하고 박수 소리가 났다.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늦었지만 씻고 쉬어볼까?”
“온수가 준비되려면 약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한번 확인해 볼게.”
알베르트는 문밖을 확인해 봤다.
온수가 담긴 통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방 안에서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알베르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다. 집사는 점원을 찾아 1층으로 내려갔다.
*&*
해가 진 길목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해지는 날씨에 호응하듯이 밤길은 진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느껴지는 건 기분 좋은 온기가 아니었다. 진흙처럼 달라붙는 농후한 냄새에 단발머리의 시녀는 입가를 가렸다. 골목 안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웅덩이를 만든다. 얼굴이 창백해진 몇몇 관병들이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그만큼 눈앞의 광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골목 안의 시체는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몇 구의 시체가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온전해 보이는 시체는 한 구. 나머지 시체는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이곳저곳이 찢겨있었다. 살점이 얼마 붙지 않은 뼈는 물론이고, 뜯어먹은 것 같은 흔적도 남아있다. 마치 맹수가 먹다 남긴 것 같은 고기 같다. 속이 울렁거린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에 하얀 손수건이 들어왔다.
“괜찮아, 라피엘?”
“저는 괜찮습니다, 아이네르.”
갈색빛의 긴 머리카락.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무인을 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중하게 아이네르의 손수건을 거절한다. 손수건을 받아야 하는 건 라피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아이네르에게 건네주는 게 맞았다. 아무리 이 여자가 자신의 소꿉친구라고 해도, 이 자리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었다. 숨을 깊게 내쉰 시녀는 다시 현장과 마주했다.
“아이네르의 생각은 어떤가요? 역시 동일범의 소행일까요?”
“이런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이는 괴물이 더? 사실이라면 너무 끔찍한데.”
범인의 손속이 날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의 희생자밖에 내지 않았던 녀석이지만. 이제는 서너 명을 넘어 희생자의 수를 짐작하기 힘든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골목으로 아이네르는 발길을 옮겼다. 찐득한 피가 신발에 달라붙는다.
골목의 모퉁이에 걸려있는 시체를 향해 그녀는 손을 뻗었다. 가슴이 뻥 하니 뚫린 그 시체는, 이 현장 내에서는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시체였다. 한 방울의 피가 손가락에 떨어졌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목숨이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으엑.”
아이네르는 시체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쪽 머리가 부서지고, 코가 있던 부분은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있다. 찢어진 입가와 반쯤 날아간 치아. 훼손이 너무 심해서 생전 그가 누구였는지 알아볼 수 없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건 뻥 뚫린 가슴 옆에서 흔들리는 물건뿐이다.
십자패.
신교의 신도들이 갖고 다니는 성물이다.
시체에서 십자패를 뜯은 아이네르는 라피엘에게 건넸다. 속이 보이는 병을 꺼낸 그녀는 십자패를 그 안에 넣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십자패는 통 안에서 달칵, 흔들렸다.
“도대체 목적이 뭘까요? 왜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걸까요?”
“목적이 뭔지는 나도 궁금해.”
이 사건을 추적한 지 벌써 2개월이 넘어간다.
어느 정도 현장에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범인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신교의 신도가 섞여 있었지만, 낙양 내에서 신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적다. 단순히 신도를 노렸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라피엘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보를 통제하기 힘들었다. 이미 빈민가 내에서는 이 불길한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빨리 범인을 잡지 않으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리라.
“혹시 무인이 범인일 가능성은 없나요? 미쳐 버린 무인들이 간혹 이런 엽기적인 일을 저지른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광인 말이지? 아니야, 라피엘. 녀석들은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없어. 꼴에 무인이라고 미쳐 날뛰어도 무공의 흔적이 남거든. 그런데 봐. 이건 무공이 아니라 그냥 학살을 벌인 거야.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말이야.”
맹수가 먹다 남긴 것 같은 시체의 흔적. 무공이 남긴 상처가 아니다.
쉽사리 시체를 확인하지 못하는 다른 부하를 대신하듯이, 그녀는 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들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살점에는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연한 살점만 물어뜯었어. 질긴 근육은 관심이 없는 것 같네. 뼈에도 집착하지 않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은 게 아니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 그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공포를 심었군요. 다른 피해자들에게.”
아이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현장을 만든 범인은 사람을 죽이면서 즐기고 있었다. 마물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없다. 그저 본능이 가는 대로 살육을 즐기는 괴물이니까.
“정말로 무인이 범인이라면, 그건 경지를 상상하기 힘든 고수야.”
“무공의 흔적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군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라면….”
“우리 고향의 괴물들 정도겠지.”
“…….”
별로 떠올리고 싶은 곳은 아니다.
라피엘의 표정이 굳은 걸 본 아이네르는 아직 골목 밖에 있는 부관을 불렀다.
“콜린!”
들어가요, 들어가! 하고 곱슬머리의 남자가 입가를 가린 채 안쪽으로 들어왔다.
“확인 좀 해봐.”
“피, 피 좀 치우고 하면 안 될까요?”
“증거 인멸을 시도하는 거야? 대담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우욱.”
입을 열자 농후한 피 냄새가 차오른다. 견디지 못한 콜린은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곳이 나빴다. 속을 다 드러낸 시체의 몸을 본 그는 성대하게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
라피엘이 손수건을 건넸다. 으으, 하고 입가를 닦은 콜린은 말했다.
“너무합니다, 진짜. 절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예요. 저는 도서관에서 책이나 정리하는 사서지. 이런 현장직은 감당할 수 없다고요.”
“불만은 내가 아니라 황자님에게 해야 하지 않겠어? 널 여기로 보낸 건 황자님이다.”
“라피엘. 황자님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더는 못하겠어요. 차라리 전장에서 창을 들겠다고요.”
심약한 콜린의 두 눈과 마주한 라피엘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황자님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부탁하는 거잖아요.”
“그래그래. 빨리 포기해라. 뻔히 황자님 성격 알면서. 그냥 웃으면서 넘기실 게 뻔하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병가라도 내는 건데. 내가 왜 사서 이런 고생을….”
궁시렁 궁시렁 혼잣말을 토해내던 콜린은 한 번 더 헛구역질하고 난 뒤에야 품 안에서 부적을 꺼냈다. 여태까지 봐온 현장에서 그러했듯이, 그는 부적을 그나마 온전한 시체의 머리에 붙였다. 붉은 피를 부적이 빨아들인다. 부적에 묻은 글자가 지워지기 전에 술식을 완성해야 했다. 그는 서둘러 수인을 맺었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이 자리에서 칙령을 내리니. 말하거라, 사자여. 그대는 누구에게 죽었는가?”
부적이 강한 빛을 냈다.
빛에 이끌리듯이 사체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손을 든 녀석은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손이 가리킨 대상을 본 세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시체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