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낙양동천 이화정(洛陽洞天 梨花亭)(3)
알베르트가 먼저 목표로 잡은 것은 부장이 상대하는 아라크네였다.
월아의 칼자루를 잡는다. 지면을 박찬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월아를 발검했다. 푸른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알베르트의 앞에는 검은 다리가 있었다.
“?”
머릿속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몸에 축적된 경험은 자연스레 검을 들었다. 검 끝에서 아라크네의 다리가 잘려나간다. 스치듯이 지나간 월아는 4개의 다리를 깔끔하게 베어냈다.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던 알베르트는 발을 멈췄다.
좌측 다리를 잃은 아라크네의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검기나 검강을 두른 것도 아닌데, 단순히 월아에 닿은 다리는 두부 잘리듯이 베어졌다. 지독한 독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월아에 베인 절단면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라크네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부장은 그런 알베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스터.]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정신을 수습했다.
오랜만에 움직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해도 경이적인 움직임이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활성화하는 수준의 내공이었다. 가슴의 월기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알베르트의 시선이 자연스레 월아로 향했다. 검을 쥔 손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성장은 단순히 월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 검이,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일단 적을 제거하는 것부터.]
‘알고 있네.’
나아간다. 땅을 밟고 전진한다. 아라크네의 몸체가 눈앞에 다가왔다.
월아를 휘두른다. 검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다. 가시 같은 털이 자란 아라크네의 목과 월아가 맞닿았다. 가시가 잘린다. 목 안쪽으로 파고든 검날은 가죽을 찢고, 핏줄을 끊어냈다. 속살을 드러낸 근육과 뼈도 마찬가지다. 베이는 것과 동시에 얼어붙은 아라크네의 머리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빙글빙글 돈 거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깔딱깔딱, 간헐적으로 움직이던 나머지 다리가 멈췄다.
녀석의 숨통이 끊길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남은 아라크네를 확인했다.
두 파수꾼의 협공에 몰린 이라크네의 몸에는 못 보던 상처가 생겨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도 두 개가 잘려져 있다. 아라크네의 몸체를 밟고 올라간 알베르트는 두 발에 내공을 모았다. 몸체 위에서 뛰어오른다. 퍽, 하고 몸통이 터졌다.
알베르트는 행인들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반짝거리는 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아라크네의 눈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그 입이 벌어진다. 푸른 거미줄이 아라크네의 입에서 뿜어졌다. 세 번의 휘둘림.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종이처럼 찢겼다. 다리가 올라온다. 이미 늦었다. 월아는 아라크네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녀석의 머리에서 하얀 서리가 생겨난다. 아라크네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알베르트가 월아를 뽑는 것과 동시에 놈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놈의 머리에서 나온 월아에는 피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검신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은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끼고 더 강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자신이 낸 성과를 봐달라는 것 같다.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월아를, 알베르트는 검집으로 수납했다.
압도적인 힘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심장이 정신없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황홀감과 두려움이 혼재해 있었다. 이전에 유피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신검과 마검을 나누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 그녀의 말대로다. 이 검은 신검인 동시에, 마검이기도 했다.
중독될 것만 같다. 아직도 눈앞에서는 월아의 빛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손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몸을 수습한 부장이 알베르트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그 뒤로 두 파수꾼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신설교 백토(白兎) 3번대 부장 레넌이라고 합니다. 혹 실례가 아니라면 대협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알베르트는 행인들 사이에 서 있는 유피를 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 라나네.”
“알베르트 대협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이신설교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뭔가를 바라고 도와준 게 아니네.”
“저희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얼굴에 상처가 남은 레넌의 태도는 완고했다. 재차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던 알베르트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빚을 남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알겠네. 그럼 괜찮은 무기점을 소개해 줄 수 있겠는가?”
“대장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굳이 검을 사실 필요는…….”
레넌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자신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말을 이었다.
“낙양에서 잘 나가는 대장간이라고 하면 도가장(刀加莊)이 가장 유명합니다. 이름 있는 도공(刀工)들은 대부분 도가장 출신이라고 하죠.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나오는 검은 평범하다는 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일섬점(一閃店)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한데, 지금도 장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듣기로는 주인장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습니다.”
“주인장이 없다면 문을 닫은 거 아닌가?”
“아닙니다. 주인장에게는 동료 도공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운영하고 있을 겁니다. 최근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가게를 열었다면 흔쾌히 검을 팔아줄 겁니다.”
“고맙네. 찾아가 보지.”
알베르트를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레넌은 파수꾼들에게 돌아갔다.
아라크네의 시체는 아직 길가에 남아 있었다. 서둘러 치우지 않는다면 다른 마물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올 것이다.
*&*
낙양은 반론할 여지가 없는 대도시였다.
양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외성벽이 알베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은, 마치 제국의 수도인 블러드 로열의 성벽을 보는 것 같았다. 유피 왈, 둘이 타고 온 언덕길은 낙양의 서쪽 방면이라는 모양이다. 뱃길을 그대로 타고 왔다면 북쪽 입구를. 만약 동쪽으로 돌아갔다면 무너진 관문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본래 양양도 낙양만큼이나 커다란 도시였지만, 중원이 무너지게 되면서 성 일부분이 무너졌다는 것 같다. 알베르트는 보수되지 않은 양양의 성벽이 어째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외문을 넘어서자 양양과 비슷한 거리의 모습이 펼쳐졌다.
노점상들의 쾌활한 목소리가 알베르트와 유피를 맞이했다. 식욕을 돋우는 향과 신비한 먹거리가 시선을 끈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통행로 양옆으로 펼쳐진 노점상과 가게들. 도시에 들어온 행상인들은 짐을 내려놓고 객잔에서 숨을 돌렸다. 점소이들이 뛰어다니고, 술과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회포를 풀기 바빴다.
가도 곳곳에서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관중들 사이로 본신을 드러낸 마족들이 보였다. 사자를 비롯해 고양이와 개를 닮은 마족이 있다. 익살맞은 모습이다. 수인(獸人)과 다를 것 없는 그들은 입에서 불을 뿜거나 우스꽝스러운 재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악기를 켜는 기인과 묘기를 선보이는 광대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담가들까지. 대도시에 어울리는 활기가 거리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알베르트의 시선에 유피는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마족의 수도인 낙양에 온 걸 환영해, 알.”
“마족의 수도……. 그러네, 이렇게 되면 내가 유피를 제국의 수도로 초대해야겠네.”
“제국의 수도?”
델리아 신성제국의 수도 블러드 로열.
루미에르 교의 총본산이 있는 신성한 수도에 마족의 황녀를?
유피에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소리를 냈다.
“그랬다가는 재판이라도 벌어지는 거 아냐?”
“성녀님이 주관하는 이단 재판은 아무나 받을 수 없어.”
“나라면 그 자격이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렇기야 하겠지.”
얼굴을 마주 본 두 사람은 웃었다.
“일단 신교의 본부라는 신당에 가 보자. 월궁의 소재를 파악하려면 그게 맞는 것 같아.”
“머무를 곳은?”
“신당과 가까운 곳으로 잡아야지. 낙양은 양양과는 달라. 도시가 넓어서 숙소를 잘못 잡았다가는, 거리를 오가는 데만 한나절이 걸려.”
확실히 그 규모가 짐작되지 않는 대도시다.
블러드 로열과 비슷한 크기의 도시라면, 숙소를 잡는 것부터 전쟁이 될 확률이 높았다. 길거리에서 장사 중인 상인들에게 신교 본부의 위치를 수소문해보니, 신당은 황하의 물줄기가 닿은 낙양 북쪽에 있다는 모양이다.
“일섬점 말인가? 그 가게도 북쪽 거리에 있을 걸세.”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하나 사가겠는가? 지금이라면 내 특별히 한 개 값에 두 개를 주지.”
“네?”
장사 수완이 능숙한 노점상을 떨쳐낸 알베르트는 유피가 잡은 마차에 올랐다.
“이신설교의 신당으로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손님.”
도로가 정비된 탓일까, 마차는 생각보다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차 안은 착석감이 좋지 않았다. 딱딱한 가죽은 탑승자의 편의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 것 같았다. 마차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해서 말의 피로를 상대적으로 덜게 만드는 용도로 말이다.
“월아를 써 본 소감은 어때? 기대 이상이야?”
유피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허리춤을 보았다.
월순 안에 잠든 월아는 낡은 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검이야.”
“신검이 아니라?”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의 능력은 두 번째다. 자칫 잘못하면 이 검이 가진 마력에 휘둘릴 수 있었다. 사부가 사용했다는 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한다는 명검의 정체는 괴물이었다.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검이 가진 힘에 취했을 거야.”
“무기는 무기일 뿐이야. 네가 중심점만 잡을 수 있다면 괜찮아.”
“아직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야.”
“알. 널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알베르트는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심부터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과욕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욕심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알베르트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월아를 다루는 건 좀 더 성장한 이후의 이야기다. 분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방금 전 네가 보였던 움직임은 분명 월아의 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야.”
그런 알베르트를 보며 유피는 입을 열었다.
“시간이 생기면 한번 자신의 몸을 돌아봐. 알은 지금까지 열심히 뛰어왔으니까. 날 만난 이후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적당한 휴식과 수련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야. 아저씨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어?”
수련과 휴식의 조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몸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한계까지 몰아넣은 몸이 휴식할 시간을 주는 것도, 단련의 기본이었다.
“말도 안 돼, 유피. 아무리 그래도 내 몸이야. 겨우 두 달 남짓 휴식을 취한 거로 이만큼 성장할 수는 없어.”
“무인의 강함은 생사결의 순간에 얻는 깨달음으로 정해지는 것. 알. 네가 경험한 생사결이 겨우라는 말로 끝낼 수 있는 거였어?”
할 말은 그게 끝이라는 듯, 그녀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피에르의 말은 사실입니다, 마스터.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스터는 자신의 힘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자네까지…….’
한숨을 쉰 알베르트는 천천히 두 손을 폈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있었다. 의식을 내면으로 돌린다. 몸 안의 내공은 부드럽게 순환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걸리는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주먹을 쥔다. 주인의 의지를 알아차린 내공이 그 끝에 모였다. 검붉은 내공이 주먹 위에 떠 올랐다. 희미한 형체. 그것은 권기다. 주먹 끝에 맺힌 기운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유리 같은 기운이 실로 변화하고, 꼿꼿이 고개를 든 실이 각을 만들었다. 수면 위에 상이 맺히는 것 같다. 검붉은 기운은 이윽고 권강의 형태를 취했다.
알베르트는 잠시 멍하니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권강은 흔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형태가 잡힌 강기는 시더 황자의 그것과 비교해도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란 겁니까?]
‘그게 아니네.’
권강이 흩어진다. 내공을 회수한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내공의 움직임이 다르다. 마기를 사용하는 것 같은 날카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힘은, 알베르트가 스스로 손에 넣은 힘이었다.
목 아래가 뜨겁다.
가슴이 끓어오르는 느낌에 알베르트의 손이 자연스럽게 주먹을 말았다.
힘.
그토록 원했던 힘이 이 손에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