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낙양동천 이화정(洛陽洞天 梨花亭)(2)
그로부터 3일 후, 늪지를 빠져나간 배가 멈춘 곳은 낙양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뭍에 늙은 쥐는 배를 댔다. 배에서 내린 그는 작은 나루터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욱하게 끼어 있던 안개가 그나마 가라앉아 있었다. 무성히 자란 풀이 오갈 수 있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오르막길뿐이다.
늙은 쥐는 술을 꺼냈다.
술잔을 채운 그는 아직 이곳에 남은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냐? 낙양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는 낙양이 아니잖아.”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여기는 낙양에서 가장 가까운 내 나루터다.”
“항구는 어쩌고?”
“항구?”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던 늙은 쥐는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렸다.
“이제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소저였구먼. 우리 같은 소상인은 항구에 들어갈 수도 없어. 예전에도 까다로웠지만, 지금은 특히나 더 그렇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종교가 그 일대에 들어와 버렸거든. 알아들었으면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빨리 가버려라. 저기만 올라가면 낙양으로 가는 행인들이 보일 거다. 그 길만 쭉 따라가면 돼.”
“…….”
오르막길을 가리킨 그는 마지막으로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쪽 젊은이는 잘 생각해 보게.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금낙장에서도 환영할 테니.”
늙은 쥐는 다시 술잔으로 손을 옮겼다.
싸구려 술을 입으로 가져간 그는 크으, 하고 올라오는 알코올에 몸을 떨었다.
언덕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알베르트는 유피의 뒤를 따랐다. 언덕을 오르던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통, 하고 동전이 튀어 올랐다. 늙은 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동전을 잡았다.
“팁이야. 고생했어.”
“하, 상도덕이 있는 소저군.”
동전을 확인한 늙은 쥐는 누런니를 드러냈다.
*&*
알베르트는 마기에 노출된 풀을 헤치며 언덕길을 나아갔다. 만들어진 길을 따라 유피가 따라붙었다. 눈앞의 풀은 흡사 솔방울 같았다. 머리끝 부분에 있는 꽃 같은 방울을 밀면 그대로 고개가 넘어간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풀을 눕히자 정비된 도로가 나타났다.
늙은 쥐의 말대로였다. 포장된 길 위로는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전부 낙양으로 향하고 있는 걸까? 행렬에 합류한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낙양이라면 유피가 무희로 지냈던 성이구나.”
“그런 건 잘 기억하고 있네.”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의 입가가 씰룩였다.
“유피는 황녀잖아. 왜 무희로 지낸 건지 물어봐도 될까?”
“무희로 활동하고 싶어서 활동한 게 아니야. 마녀 수행의 일환이었어.”
“마녀 수행? 춤을 추는 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보네.”
“재밌는 해석이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해.”
유피의 춤은 재미나 취미로 배운 수준이 아니다.
체계적인 움직임이 잡혀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무대를 장악하고 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쇼맨십까지 완벽했다. 귀화루의 기녀들이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겠지. 그녀는 낙양 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무희였을 것이다. 그만한 실력이 그녀의 춤에는 녹아들어 있었다.
“우리가 행하는 기적은 문을 열고, 세계수의 지식을 청하는 것부터 시작해. 문 바깥으로 가져온 기적을 어떤 방식으로 완성할 것인가는 마녀 개개인의 개성이야. 가령 언니를 예로 든다면 사역마(使役魔)에 자신의 마나를 담아 공정을 보조해.”
세실리아가 부리던 보랏빛의 까마귀를 말하는 모양이다.
“반면 나는 나비를 사용하는데, 언니만큼 능숙하지는 않아. 그래서 춤을 선택한 거야. 수식을 계산하고, 공정을 따라가는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 몸을 직접 움직이면 링크의 시작선도 달라질 수 있거든.”
“그럼 춤도 세실리아 님에게 배운 거야?”
“언니에게서?”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나한테 배워도 모자를 판정이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몸을 쓰는 일은 진짜 못하거든. 언니는 무도회만 가면 은근슬쩍 도망가는 사람이야. 내가 배운 춤은……. 그러네. 어머니의 춤을 흉내 낸 거야.”
“유피의 어머니라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얼굴이나 성격은 알고 있어. 생전의 모습을 담아둔 수정구를 할아범이 줬거든. 수정구 안에는 여러 내용이 담겨 있어서 말이야. 그중에는 루미에르 교나 제국의 상식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미안.”
“사과할 필요 없어. 벌써 20년이 되어가는 이야기인걸. 어머니는 인간의 몸으로 비가 된 사람이야. 옛날에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유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그녀는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러네. 유피가 혼혈이니까 어머니는 인간이겠네. 아버지는 마왕일 테니까.”
“마왕? 아니. 마황이라고 해야지, 알.”
“마황?”
“응, 마황.”
무언가 말이 맞물리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다시 물었다.
“유피의 아버지는 마왕이지 않아?”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유피는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긴. 너희 제국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너희는 둘 다 같은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 좋은 기회니까 확실히 짚고 넘어갈게.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한 건 우리가 먼저야. 너희는 당연히 마황이라고 불러야….”
“…….”
유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족의 왕이니 마왕이다. 당치도 않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마왕과 마황. 그 말대로라면, 3차 대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렇군요, 마스터. 마왕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래. 마황이 돌아온 게 아니었네. 마족이 적대하고 있던 마왕이 돌아온 거였네.’
하면, 의문이 생긴다. 마족은 왜 마왕의 편에 섰던 걸까?
마족과 악마의 관계는 철천지원수다. 유피는 악마를 쓰러뜨려야 하는 주적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생각한다면 인족보다 더 증오하는 것이 악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두 세력이 같은 편이 되었던 걸까?
“지금 마왕은 어떻게 된 거야?”
“전설이 맞다면 봉인된 상태야.”
“봉인?”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봉인했다는 전설이 있어.”
“전설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다는 거네?”
“그래.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긴 했지만, 그 사람도 기억이 없는 모양이야. 애초에 자기가 성에 있는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이야. 악몽 속에서 사희가 말했던 걸 보면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괜찮아. 우리도 예전의 우리가 아니니까. 만약, 마왕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번에야말로 끝을 볼 거야.”
주먹을 굳게 쥔 유피의 모습은 의연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생각을 정리했다.
3차 대전쟁을 마왕이 일으켰다면, 그 마왕을 막으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전쟁 자체가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아가씨를 구하는 것도. 유피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일도 피할 수 있겠지.
아니, 상황이 그렇게 속 편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마왕이 없어도 마족이 제국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졌다. 알베르트는 무심코 허리춤의 월아로 손을 옮겼다.
“양양이 공격받았다는 모양이야.”
“누구에게 말인가?”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 있네.”
어느 정도 머리가 정리된 탓일까. 행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양으로 향하는 그들의 입에서는 양양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악마들이 말인가?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네. 행상인 정 씨의 말인데, 용하 거리가 완전 쑥대밭이 되어버렸다는구먼.”
“어허. 어찌 그런 일이. 그래, 피해는 어떤가? 다들 살아남기는 한 건가?”
“아벨 황자님께서 아주 잘 대처하신 모양이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을 펼쳐서 악마를 무찔렀다는 소문이 양양 내에서도 아주 무성하다네.”
“아벨 황자님이 말인가? 허, 그것참. 몸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먼.”
“아벨 황자님이? 이상하네. 내가 들은 소문은 또 다르다네.”
“다르다고? 뭐가 말이요, 형씨.”
행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행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코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그는 비밀이야기라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 마법 말인데. 아벨 황자님이 아니라 유피에르 황녀님이 펼치셨다는 이야기가 있네.”
“누구 말이요?”
“유피에르 황녀님 말일세. 현자님의 제자이신.”
“유피에르 황녀님? 그분이라면 마계 밖으로 추방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추방당했다고? 나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고 들었는데.”
“유피에르 황녀님이라면 진작 죽었지 않았나? 현자님과 함께 죽어서 사당에 모시고 있다고 하던데?”
알베르트는 졸지에 고인이 된 유피를 보았다. 그녀도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천하 객잔에서 일하고 있는 내 아는 동생이 해준 말이네. 그 유피에르 황녀님께서 직접 연회에 참석했다는 모양이야. 듣자 하니, 축사까지 읊으셨다고 하더만.”
“그게 사실인가? 허어. 이거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구먼.”
“그렇다네. 내 듣기로는 엄청난 미인이라고 들었네. 키는 물론이고, 가슴도 큰 분이라고. 보랏빛 머리가 아름다운 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구먼!”
“보랏빛 머리?”
“그래. 보랏빛 머리의 가슴 큰 미인이라고!”
아무래도 소문이 와전된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해, 유피?”
“뭘 어떻게 생각해. 우리 언니만 신났겠네.”
살짝 심통이 난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멋쩍게 웃었다.
하긴, 외관만 놓고 본다면 유피보다 세실리아의 모습이 황녀에 더 어울리긴 했다. 아마 마족들이 원하는 황녀의 모습은 그런 거겠지.
길가의 풍경이 바뀐다.
낙양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도로 양옆으로는 무장한 병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세 사람씩 짝을 지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그들의 목에는 하나 같이 십자패가 흔들리고 있었다.
“관병이 아니야.”
“신교의 파수꾼들 같아. 관병을 대신해서 길가를 지키고 있는 건 같은데?”
“신교가 왜?”
유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라고 해서 뭔가 알고 있을 턱이 없다. 그녀가 꺼림칙한 시선으로 파수꾼을 둘러볼 때였다. 길가 한쪽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렸다.
“아라크네다!”
“다들 조심해!”
도로 바깥에서 커다란 거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행인의 비명에 파수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길가를 순찰하고 있던 파수꾼의 수는 셋이었다. 아라크네가 나타난 곳으로 움직인 세 명의 파수꾼은 녀석을 에워쌌다. 알베르트의 기억에 있는 진이다. 모든 진의 기본이라는 삼재진. 부장의 지시에 따라 파수꾼은 아라크네를 협공했다.
“또 왔어!”
“파수꾼은 더 없는 거야?”
문제는 또 한 마리의 아라크네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부장이 진에서 빠져나왔다. 파수꾼 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괜찮은지, 그는 새로 나타난 아라크네를 혼자서 맞이했다. 남은 두 파수꾼은 상대하고 있던 아라크네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만, 녀석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전이 이어진다. 파수꾼과 아라크네의 교전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상황을 눈치챈 몇몇 행인들이 본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라크네의 다리를 맞고 날아간 행인은 부상자가 되었을 뿐이다.
좋지 않다. 다음 순찰대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걸까.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월아로 손을 옮겼다.
“알.”
유피가 그 손을 잡았다.
“월아를 안 뽑고 제압할 수 있겠어?”
“해봐야 알겠지만, 그러면 녀석들의 숨통을 끊기가 힘들 거야.”
양양에서도 그랬지만, 녀석들의 갑피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검강, 최소한 검기는 되어야 껍질을 뚫을 수 있다. 권기나 권강을 다루지 못하는 알베르트의 주먹으로는 타격을 입히기 힘들다.
왜 그러는데, 하고 눈으로 묻자 유피는 대답했다.
“월아의 빛은 너무 이목을 끌어.”
“내가 난입하면 월아가 내는 빛은 문제가 아니야.”
시선이 쏠리는 건 피하고 싶다. 하지만 파수꾼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알았어. 낙양에 도착하면 눈에 띄지 않는 검부터 하나 사자.”
고개를 끄덕인 알베르트는 아라크네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