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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낙양동천 이화정(洛陽洞天 梨花亭)(1) (8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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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동천 이화정(洛陽洞天 梨花亭)(1)

축축한 안개는 양양의 나루터를 덮고 있었다.

한때는 장강(長江)이라고 불렸던 물길이다. 아름다운 문명을 꽃피웠던 강은 이제 늪지로 변해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면서 황하(黃河)와 물줄기가 섞인 이곳은, 마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늪지였다.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온다. 농후한 마기가 흐르는 것 같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늪지는 스산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작은 물살을 일으키며 나룻배가 오간다. 나루터를 오가는 행인들을 보던 유피는 세실리아에게 물었다.

“정말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얼굴을 본 지 이제 두 달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

떨어져 있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너무 빠른 이별이다.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낙양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같이 가도 괜찮지 않아?”

“어머. 눈물부터 닦고 이야기하렴, 유피. 아무리 서운해도 그렇지. 다 큰 처녀가 이런 곳에서 울면 어떡하니?”

“언니.”

물론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장난기 가득한 세실리아의 어조에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헤어지는 이 순간에도 진정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오늘은 양양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낙양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귀화루의 기녀들과는 어젯밤 이야기를 끝마친지라, 나루터까지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나루터는 한적한 분위기였다. 유피는 그녀들에게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 아마 황녀님이 다시 숲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위험은 배가 된다. 이쯤에서 선을 끊는 게 좋았다.

“괜히 내 사정에 어울려 준 것 같아서 그래. 변변찮은 대접도 못 해줬잖아.”

“대접이라면 충분히 받았는걸? 유피의 웃는 얼굴이 언니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란다.”

“또 거짓말이나 하고 있고.”

“언니는 거짓말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마녀는 거짓과 허영의 화신이라고 가르쳐준 게 언니야.”

“그런 가르침은 잘 기억하고 있네.”

“언니가 가르쳐 준 거니까 기억하고 있는 거야.”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동생의 모습에 언니는 볼에 손을 얹었다.

조금 곤란한 듯, 기쁜 듯 그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실리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세실리아는 유피에게 다가갔다. 살짝 몸을 수그린 언니는 동생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부르려무나. 이 언니는 세상이 무너져도 유피의 편이니까.”

“…….”

유피는 세실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물기에 젖은 붉은 눈이 반짝거린다.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그녀의 응석을 받아줄 수는 없다. 세실리아는 그녀의 후드 속으로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은빛의 머리카락이 손안에서 흩어진다. 말없이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던 세실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집사.”

그 시선의 끝에는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알베르트가 있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별로 마음에 드는 남자는 아니다. 무엇보다 출신이 마음에 걸린다. 동포도 아닐뿐더러, 피가 섞인 것도 아니다. 마족의 적인 인족을 유피의 곁에 두는 것이 맞는지 그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유피에르 바토리는 알베르트 란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알베르트 란은 진심으로 유피에르 바토리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유피에게 허튼짓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란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피가 허락해 주지 않으니까요.”

“허락해 주면 언제든지 저지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

세실리아는 알베르트가 부인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대답 대신에 올곧은 시선을 돌려주었다. 예비 범죄자 아니야? 기가 찬다는 듯 세실리아는 유피를 보았다.

“정말로 저 남자를 데리고 다닐 거니?”

“저런 남자니까 같이 있는 거야, 언니. 그럴듯한 말로 의도를 숨기는 남자들보다야 100배는 낫잖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루터에 한 뱃사공이 들어왔다.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는 외눈이었다. 양양에 들어오기 전 나루터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남자다. 세실리아가 불렀다는 뱃사공이 누군가 했더니, 이 남자였던 모양이다. 안면이 있다는 듯 세실리아는 손을 흔들었다. 뱃사공은 그녀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곁에 다가온 그는 세 사람을 둘러본 뒤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목적지는?”

“낙양 성.”

“몇 명이냐?”

“두 명이야.”

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세 사람.

배에 타는 건 두 사람.

머릿수가 하나 적다. 뱃사공은 물었다.

“그쪽의 마녀는 이제 나이를 너무 먹어서 노망까지 난 건가?”

“노망은 그쪽 쥐머리에 난 거 아냐? 나는 안 타는 걸 알고 있잖아.”

소매에서 작은 빗자루를 꺼낸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빗자루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마녀를 태운 빗자루는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그럼 다음에 보자, 유피. 낙양에서의 일이 끝나면 산에 한 번 들리렴. 자매들이 네 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거든. 특히 호수의 마녀는 편지라도 한 통 보내달라던데?”

“그 아이는 여전한가 보네. 지금도 실수투성이야?”

“그건 언니가 알려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다음에 유피가 확인해 보렴.”

세실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별을 고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유피는 마지막 인사를 입에 담았다.

“몸조심해, 언니.”

“유피야말로 조심하렴.”

빗자루 위에서 두 다리를 꼰 산의 마녀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유유자적 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피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리자. 하지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깨웠다.

“안 탈 생각이라면 다른 손님을 태울 거다.”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얼굴 쪽으로 손을 가져간 그녀는 깊게 숨을 토해냈다.

이쪽을 돌아본 그녀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알베르트의 시선에 유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면 20냥이다.”

“이전에는 한 사람당 5냥이던 것 같은데. 그사이 뱃삯이 오른 거야?”

“낙양으로 가는 배는 인건비가 추가되지. 이 몸이 직접 노를 잡으니 추가 비용이 생기는 거야.”

끌끌거리는 뱃사공을 보며 유피는 돈을 꺼냈다.

“당신, 성격 나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소저.”

나룻배에 오른다. 두 사람의 무게가 추가되자 배의 몸체가 살짝 흔들렸다. 유피가 앉고, 이어서 알베르트가 자리에 앉았다. 승선이 끝난 것을 본 뱃사공은 노를 잡았다.

세 사람을 태운 나룻배는 늪지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양양 성은 재밌었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 소란이 일어났던 것 같은데.”

양양에서 일어났던 사태에 대해서 듣고 싶다는 듯, 뱃사공은 물었다.

유피는 아직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늪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동포들의 마기가 폭주했습니다. 서로 싸우고, 부수고. 부상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 틈을 타 마물이 거리로 들어오기도 했죠. 그래도 괜찮을 거로 생각합니다. 양양은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일어날 겁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군.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기 좋아. 요즘은 보기 힘든 참 젊은이군. 그래, 자네도 검을 차고 있는 걸 봤을 때 제법 실력이 괜찮은 무인인가 보지?”

“살짝 검을 다룰 줄 아는 정도입니다.”

겸손 떠는 말이 아니다. 알베르트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쥔 힘은 아직 멀었다.

그의 눈높이는 신화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닿으려면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월아의 인정을 받고 난 이후로 알베르트는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세실리아와 유피가 말하길. 월기가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는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모양이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없지만, 몸 안에는 그 상흔이 남아 있다는 말이겠지. 낙양으로 향하는 오늘 아침에서야, 그는 무공을 써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날고 기는 싸움꾼들을 봐온 내 눈은 틀리지 않아. 자네 정도라면 나름대로 별호가 있는 무인일 거라는 확신이 있어. 좋아. 내 자네의 마음가짐이 보기 좋아서 하는 말인데, 혹시 싸움판에 관심 있는가?”

“싸움판이라면…….”

양양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던 싸움판을 알베르트는 떠올렸다.

야바위꾼들이 관중들을 오가고, 즉석에서 일어난 싸움판을 마족들이 반기던 모습을 말이다. 황림당의 무인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그랬다. 갑자기 일어난 소란을 그들은 싸움판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래. 원래는 양양의 용하 거리가 괜찮은 싸움판인데. 이번 소란으로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벌이가 짭짤했는데, 당분간은 쓰기 힘들 거야.”

“확실히, 상태가 그래서는 영업할 수는 없겠죠.”

용하 거리의 싸움판이라면 알베르트의 기억에도 있었다. 악마가 활개 치던 바로 그 뒷골목이다. 인상적인 주먹 문양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게 싸움판을 의미하는 문양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그 장소에서 다시 영업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뱃사공은 알베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있는 곳은 돈이 되기 마련이야. 그리고 그런 곳에는 실력자가 모이는 법이지. 자, 어떤가. 자네도 무인이라면 실력자와 싸우고 싶지 않은가? 합법적인 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말이야.”

무인의 성장은 생사결의 순간에 있는 법.

강자와의 싸움은 알베르트로서 마다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휴식을 취한 몸을 풀기에는 적당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유피와 함께 여행하는 이상,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고민하는 그의 마음을 느꼈는지, 뱃사공은 말했다.

“강요하는 건 아닐세. 선택은 자네 몫이지.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네. 양양의 싸움판은 낙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애들 장난에 가깝지. 자네가 진정 실력자를 보고 싶다면, 낙양의 금낙장(金落莊)을 찾아가 보게. 늪지의 늙은 쥐가 보냈다고 하면 안쪽으로 안내해 줄 거야. 물론 자네가 실력에 자신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네. 그렇게 입을 놀릴 시간에 노나 더 젓는 게 어때?”

더는 듣지 못하겠다.

고민하는 알베르트의 마음을 잘라내듯이 유피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쯧쯧. 남자를 재촉하는 여자는 인기가 없지. 벌써 보이는구먼. 소저는 그 고압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하면 평생 홀로 살 팔자야.”

“방금 뭐라고 그랬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피의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그녀의 기분에 반응하고 있는 건지, 나룻배 안쪽에서 은빛 마나가 반짝였다.

“어이쿠, 무서워라. 애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소저. 좀 더 크고 나면 찾아오거라.”

늙은 쥐의 시선은 유피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모욕을 당해본 기억은 없다. 유피의 마나에 반응한 마나가 창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 알베르트의 검이 뱃사공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취소하시죠, 늙은 쥐.”

서슬 퍼런 알베르트의 기색에 늙은 쥐는 두 눈을 깜박였다.

맞닿은 것도 아니건만, 월아의 한기가 목을 스멀스멀 침식했다. 목젖 근처에서 하얀 서리가 생겨난다.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늙은 쥐는 차분히 대답했다.

“진정하게나, 친구. 그래, 내가 잘못했네. 말이 조금 헛나왔군.”

“제가 아니라 아가씨에게 사과하셔야죠.”

“미안하네. 미안하게 됐네, 소저. 내 취소하지.”

“좋아.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어.”

떠올랐던 은빛의 마나가 사라진다. 창이 풀어지고, 실로 변한 은빛의 마나는 이내 유피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녀의 기분이 풀린 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월아를 수납했다.

한기가 서린 목을 늙은 쥐는 떨떠름하게 만졌다.

월아가 떨어졌음에도 선명하게 생겨난 서리는 그 손에 묻어났다.

“제법이군, 젊은이. 내 제안을 잘 생각해보게. 자네 정도라면…….”

“시끄러워, 당신.”

유피의 말에 늙은 쥐는 입을 닫았다.

그는 만용과 용기를 구분할 줄 알았다. 여기서 고집대로 입을 열었다가는 손해 보는 건 자신이다. 쯧, 하고 혀를 찬 그는 애꿎은 노를 두들겼다.

노를 만지는 것에 열중하는 뱃사공의 모습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상해 있겠지. 어떤 말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알베르트의 시선에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유피가 들어왔다.

“…….”

눈을 두 손으로 비빈 알베르트는 다시 유피를 보았다.

유피의 손은 턱을 만지고 있었다. 그런가. 역시 눈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알도 그렇게 생각해?”

“뭘 말이야?”

설마 가슴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알베르트의 반문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평생 홀로 산다는 거.”

“음…….”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쪽이었던 모양이다.

이전 시대의 일을 생각해본다면 뱃사공의 말은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적어도 알베르트가 알기로는, 그녀는 아가씨와 싸우는 그 순간까지 홀몸이었다.

“알?”

“걱정하지 마. 유피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

유피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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