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마녀는 알고 싶어(1)
아침 햇볕이 따스하다. 떠오르는 동을 본 세실리아는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가도를 오가는 동포들은 매번 똑같다. 장사를 시작하러 나가는 장사치들과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노동자들. 무너진 거리를 수복하기 위해 공사판에 나가는 동포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똑같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특별한 것 없는 다툼을 반복한다. 다툼이 끝나며 화해하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노력한다. 별 것 아닌 일상을 그들은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했다.
사람이 산다는 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잘못을 반복하면서도 멈출 수 없고, 그것이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걸어간다.
‘그렇게 쓰러지고, 그렇게 일어나고. 그것이 순환이라는 걸세, 세실.’
재미없던 그 남자는 이제 이곳에 없다.
자신과 함께 최후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현자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남겨준 채 사라졌다. 언젠가는 저 위에 닿자고, 함께 마도의 끝을 보자고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멋대로 떠나 버렸다.
“남자는 다 바보란다. 정말로, 몇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구나.”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버린 세실리아의 눈에 문득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평소에 입던 연미복이 아니다. 어쩐 일인지 그는, 동포들이 입는 검은 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녀가 아끼는 동생은 아니다. 이 기루에서 일하는 어린 기녀다. 보기 드문 조합이다. 외출에 나서는 두 사람을 세실리아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집사는 최근 유피를 보좌하는 일 외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월아가 남긴 상처 때문이다. 그 몸에 남아 있던 월기는 자취를 감췄지만, 상흔은 몸속 깊은 곳까지 새겨져 있었다. 유피와 세실리아는 집사의 무공 수련을 허락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내공의 흐름에 상처가 반응하면, 월기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간은 찾아오는 손님들만 응대하던 집사다. 이렇듯 외출을 나가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기녀와 함께 말이다. 세실리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재밌는 생각이 났다.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세실리아는 옆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자신 있게 돌린다. 하지만 마나로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간단하지. 그녀의 손에서 보랏빛 마나가 흘러나왔다. 문의 잠금을 푼 세실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귀여운 유…… 어풉!”
“레이디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하라고 했잖아. 어디서 문을 따고 들어오는 거야?”
세실리아의 얼굴로 하얀 베개가 떨어졌다. 베개를 던진 방 안의 주인은 별무리가 지는 아름다운 은발의 여인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베개와 부딪친 코를 문지른 세실리아는 문을 닫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봤니? 네 집사가 지금…….”
“뭘 그냥 넘기려고 그러는 거야? 나한테는 중요하거든?”
유피는 반성하지 않는 불청객을 보고 쌍심지를 켰다.
흘러가듯이 넘길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동생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식의 성장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지 않아?”
이제 더는 소녀라고 부를 수 없는 동생의 모습에 세실리아는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해, 유피.”
형식적인 사과였지만 유피는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불을 내린 그녀는 얇은 네글리제 차림이었다. 잘 때는 가벼운 속옷만. 아직도 어렸을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그래서 알이 뭐?”
“여기 기녀랑 밀회를 나가던데?”
“밀회?”
유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세실리아는 이때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코를 가득 채운 냄새는 이제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향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세실리아가 기대한 향은 촛불처럼 단숨에 꺼져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단언이었다.
순간 세실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옷을 챙겨 입는 동생을 보며 언니는 재차 입을 열었다.
“어떻게 확신하니?”
“그야…….”
자연스럽게 입을 열던 유피는 멈칫했다. 무언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 볼이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게 있어. 용무가 그것뿐이면 나가주지 않을래?”
“무르구나. 정말로 무르구나, 우리 유피는.”
걸음을 옮긴 세실리아는 창가로 향했다. 그녀는 기루의 마담인 소민이가 피고 있던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연기는 올라오지 않는다. 그저 분위기를 내고 싶은 듯, 세실리아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곰방대를 잡은 그녀는 후우, 하고 애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애처럼 그럴 거니?”
“여기서 애는 언니밖에 없어.”
한껏 폼 잡은 세실리아를 유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옷을 챙겨 입은 그녀는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올라오는 향은 달달한 홍차다. 여전히 입맛 하나는 아이 그대로인 모양이다. 시선 하나 주지 않는 동생의 모습에 세실리아는 기분이 상했다. 이상하게 매몰차다. 예전에는 좀 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귀엽던 소녀가 어른이 되고 말았다.
“요즘 언니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니? 아무리 언니라도 상처받는다고.”
“언니가 계속 장난치니까 그런 거잖아. 할 이야기가 그게 전부면 이만 나가봐. 언니가 말한 집사의 연미복을 수선해야 해서 바쁘다고.”
달달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유피는 연미복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가 수복 마법이 깨진 연미복은 소매 부분이 다 헤져 있었다. 집사가 얼마나 몸을 험하게 굴렀는지, 멀쩡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미복을 쓰다듬는 그녀를 본 세실리아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보랏빛 마나가 흘러 들어간 연미복은 다시 만든 것처럼 깔끔해졌다.
“이제는 안 바쁘지? 자, 오늘 유피의 시간은 언니가 산 거야.”
“…….”
연미복의 마법은 완벽하게 수복되어 있었다. 유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오늘 하루는 언니에게 할애할게. 뭐가 하고 싶은데?”
“그야 미행이지!”
“미행?”
유피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반응에 신이 난 세실리아는 말을 이었다.
“그래, 네 집사가 오늘 뭘 하러 가는지 보러 가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취미는 없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고 그러네. 유피는 알고 싶지 않니? 널 내버려 둔 집사가 뭘 하고 있는지.”
“내버려 둔 게 아니야. 오늘은 휴가야. 알이 뭘 하든 오늘은 알 마음대로야.”
“물러 터졌어!”
휙, 하고 세실리아의 곰방대가 유피를 가리켰다.
갑자기 왜 삿대질을 하고 그래, 하고 투덜거리는 동생의 목소리를 언니는 무시했다.
“유피는 집사의 아가씨잖아! 주인님이라면 사용인의 취미 정도는 다 알고 있는 게 기본이야. 그 정도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최고의 주인님이라고 할 수 있겠어?”
“최고의 주인님?”
유피가 반문했다.
“그래, 최고의 아가씨가 되고 싶지 않아? 무릇, 일류 사용인들은 최고의 주인을 찾아다니는 법이야. 유피가 최고의 주인이 된다면 알이 저렇게 딴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을 거 아냐?”
“흐응.”
뭔가 갑자기 흥미가 동했다는 듯 유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최고의 주인, 하고 살짝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울려 줄게.”
“그렇지!”
“그렇지?”
“그래야 유피라고!”
“…….”
의심스러운 시선이 날아왔다. 유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본 그녀는 재빨리 외투를 챙겼다.
유피의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빨리 외출하는 게 좋다. 머리가 비상한 아이다. 시간을 주면 금방 이성을 되찾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아직 홍차도 비우지 않은 유피의 손을 잡고 기루 밖으로 나갔다.
*&*
어쩐지 잠은 안 자고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기루를 뛰쳐나온 두 사람은, 알베르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린 기녀의 발걸음에 맞추고 있는지, 집사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집사의 모습을 발견한 세실리아는 속도를 늦췄다. 함께 걷고 있는 기녀는 분명 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혼혈 아이였다. 세실리아에게 손이 꾹 잡힌 유피는 알베르트와 송이를 보았다. 가도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은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였다.
한 노점상 앞에서 두 사람이 멈춘다. 막 익은 고기 꼬치를 산 알베르트는 송이와 함께 군것질을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치를 입으로 가져간 두 사람은 밝게 웃었다.
“혹시 저런 아이가 취향인 거니, 네 집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은 이상성욕자가 아니야.”
유피는 한심하다는 듯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확신해? 저 집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데?”
“얼마나 알고 있긴. 대부분 알고 있어. 일 순위로 모시고 싶어 하는 주인님이 두 살짜리…….”
유피는 말을 하다 멈칫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에는 송이의 옷에 묻은 양념을 닦아주는 알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붉어진 송이가 괜찮다는 듯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알베르트는 차분히 얼룩을 지워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유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네. 그럴지도 모르겠어. 천일소화와도 꽤 친해 보였거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본 유피는 그들이 들린 노점상에 다가갔다. 알베르트가 먹은 고기 꼬치를 산다. 그녀는 입으로 꼬치를 가져가면서 말했다.
“흥미가 생겼어. 나도 협력할게, 언니.”
“그런데 유피.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처녀가 길거리에서 꼬치를 먹는 건…….”
세실리아의 항변을 뒤로한다. 유피는 알베르트의 뒤를 따라잡았다.
미행이 붙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서 걸음을 옮기는 집사와 송이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나는 영 믿음이 안 가.”
“언니는 의심이 많네.”
자신이 처음 알베르트를 곁에 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었다.
건방지게도 어린 소년이 자신을 집사로 써달라고 찾아왔다.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성에 둬도 몇 년 되지 않아 포기하고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던 소년이 어느새 청년이 되고, 지금은 자신을 옆에서 보좌하는 집사가 되어 있었다.
“믿을 수 있겠어? 동포도 아닌 인족을.”
“적어도 날 배신할 남자는 아니야.”
알베르트는 송이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사의 표정을 본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자신과 있을 때는 철두철미한 주제에, 다른 여자와 있을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 모양이다. 까닭 없이 유피는 무언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응, 결정했다. 오늘 알이 기루로 돌아오면 괴롭혀 주자. 그러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그럼 집사는 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나에 대해서?”
유피는 즉답하지 못했다.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마족의 황녀라는 것 정도가 전부지 않을까. 숲의 마녀라는 건 첫 만남 때부터 알고 있었고. 아마 제국 내에 도는 소문을 들은 것이리라. 그 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유피에르 바토리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널 믿고 따른다는 게 이상하지 않니? 언니는 영 의심스럽단다.”
“…….”
하지만 자신을 향해 바치는 알베르트의 충성은 진짜다.
그 충성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생각에 빠질 것도 없었다. 알의 고백을 떠올린 유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괜찮아, 언니. 알은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아.”
사랑.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감정이었다.
주변 가게를 돌아다니던 알베르트와 송이는 한 야외 객잔에 앉았다. 점소이가 왔다 가고 테이블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달아 보이는 과일 음료가 나왔다. 세실리아와 유피는 두 사람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점소이가 주문을 받기 위해 그녀들의 테이블로 왔다.
“뭘로 드릴까요, 손님?”
“나는 다즐링 홍…….”
“저쪽 테이블이랑 같은 거로 두 개.”
“알겠습니다!”
“…….”
“이야기 소리가 잘 안 들리네.”
무언으로 항의하는 유피의 시선을 보지 못한 건지, 세실리아는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살짝 손을 흔들자, 수정구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