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뱀의 허물
눈앞의 광경이 어두워진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작은 불빛이 드는 집안이었다. 벽난로의 불빛에 의지한 집안에는 한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벽난로 앞에 있는 무인은 도를 닦고 있었다. 곰 가죽을 한쪽에 내려놓은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생전의 녹림왕 녹일두로 보였다. 비가 내리는 창가 쪽에 앉아 있는 남자의 손에는 가면이 있었다. 까마귀를 모방한 가면을 든 그는 천살귀로 보였다. 키가 작은 노인은 책상 위의 암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검버섯이 핀 얼굴은 분명 암독제라고 불리는 무인이었다.
삿갓을 벗은 천마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따분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사희는 그 앞자리에 앉았다.
“주군.”
천마는 잔을 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말해보라는 듯 그의 시선은 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뭘 하실 건가요?”
“끝나고 나면?”
뜬금없는 질문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족과 매듭을 지은 뒤 대산에서 다시 무공을 닦겠지.”
“…….”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당연하다는 천마의 말에 도를 닦던 녹일두가 웃었다.
“역시 주군이군요. 그렇죠. 우리 같은 무인이 뭘 하겠습니까. 계속 갈고 닦을 뿐이죠.”
사희는 녹림왕을 노려보았다.
입 닥치고 있으라는 동료의 시선에 녹일두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거 말고 다른 거요. 좀 더 생산적인 일 같은 거 말이에요.”
“귀찮은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끌끌, 그렇죠. 그런 건 이 할아범에게 맡기시지요. 이후의 정세는 저희 하오문이 맡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바깥으로 나올 때가 됐으니까요.”
“늙은이는 좀 빠져 있어.”
이야기의 논점이 벗어난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는 암독제를 사희는 견제했다.
“말이 좀 험하구나, 아가야. 아이는 좀 더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어머, 내가 싸가지 없는 걸 이제 알았어? 내 스승님도 그런 말만 하다가 결국엔 내 손에 죽었어.”
“호오, 지금 날 죽이겠다고 말한 거냐?”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사희의 손이 다리로 내려갔다. 그녀의 하얀 속살과 함께 연검이 드러났다. 그에 반응하듯이 암독제의 손이 테이블 위의 암기로 향했다.
“주군의 앞이다. 둘 다 그만둬라.”
도를 닦고 있던 녹일두가 두 사람을 중재했다.
쳇, 하고 사희는 연검에서 손을 뗐다. 암독제도 암기를 확인할 뿐, 살의를 거두었다.
“일두. 넌 끝나고 나면 뭘 할 생각인데?”
“나도 주군과 똑같다. 산채로 돌아가서 최강의 도법을 만들 거다.”
“아, 그래?”
녹일두가 어떤 도법을 추구하는지 사희는 알고 있었다.
단 한 번.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는 최강의 도법. 일도에 모든 사활을 건 도법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
“정말 말이 안 통한다니까.”
싸울 때 말고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남자다.
인상을 팍 찡그린 사희는 그림자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까마귀 같은 가면은 지금 그의 얼굴에 있지 않았다. 여성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미형의 남자를 그녀는 불렀다.
“천살귀.”
“말 걸지 말아라, 뱀. 시간이 아깝다.”
“…….”
얼굴만큼이나 재수 없는 녀석이다.
“그러지 말고 와서 좀 앉아봐.”
“내 몸에서는 지울 수 없는 피 냄새가 난다. 주군의 술자리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
“안 씻은 거야?”
“아니, 아무리 씻어도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거 기분 탓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어떻게 저런 음침한 놈이 무림 최고의 살수인 건지, 그녀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뭘 할 생각이야?”
“흑살회(黑殺會)가 가면을 벗게 하고 싶다.”
“살수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 이 가면을 더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
천살귀는 가면만 쓰면 인격이 달라졌다. 그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격을 바꾼다고 말했다.
살수로 움직이는 천살귀와 일상을 지내는 천살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좋은 기회니까 말해둘게. 난 당신이 가면을 벗었을 때가 좋아.”
“고맙군.”
천살귀의 표정이 살짝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사희는 다시 천마를 보았다. 주군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끝나면 돌아가신다는 거죠?”
“너는 돌아갈 곳이 없는 거냐?”
“제가 있을 곳은 주군이 있는 곳이에요. 저도 같이 갈래요.”
“어딜 말이냐?”
“그야 십만대산이죠.”
천마신교가 자리 잡은 십만대산.
주군의 고향에 같이 돌아가고 싶다는 사희의 말에 천마는 흠,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좋아할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죠. 무공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인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주군이 있으니까.”
“이 몸과 같이 간다고 해서 함께 있을 시간은 없을 거다.”
“…….”
사희는 한숨을 쉬었다.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정말로 재미없는 사람이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예요.”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한, 이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희는 자존심을 접었다. 주군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했다.
“전 주군과 함께 있고 싶어요.”
“…….”
한껏 용기 내서 말을 쥐어짠다. 이유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살짝 물기가 맺힌 사희의 눈은 묘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흑도 제일의 꽃이라고 불리는 사희의 고백에 천마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렇군. 너 같은 딸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다.”
“네?”
“성격은 둘째 치더라도, 얼굴은 꽤 반반하니까 말이다.”
“…….”
…….
반 박자 늦게, 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를 닦던 녹일두가 킥킥거렸다. 암기를 매만지던 암독제가 끌끌거리고. 차가운 흑살귀마저 피식거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사희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잘 전해지지 않았나 보군. 수양딸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한 말이다만.”
“제가 주군보다 연상이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본좌의 나이는 네 생각보다 훨씬 많다.”
“반로환동(返老還童)까지 한 거예요?”
“뭐, 그렇지.”
“…….”
새삼스럽지만, 그녀의 주군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다 끝나면 따라갈 테니까요.”
“따라오는 건 네 마음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천마와 흑도 4인방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객잔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세월이 좀 흐른 것같이 낡은 객잔으로 변했다는 것 정도다. 창가 쪽의 테이블에는 사희가 있었다. 그녀는 바깥이 아니라 알베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너야? 이번에는 불청객도 데려왔네.”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군요, 사희.”
“말은 바로 해야지. 되찾게 만든 거겠지. 그 기분 나쁜 피로 말이야. 덕분에 머릿속이 아주 더러운 기분이야.”
테이블 위에는 술과 월아가 있었다.
술잔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사희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쪽도 기억에 있는 마녀네. 이상한 술법을 쓰던 거로 기억하는데.”
「망자로 있었던 일도 기억하고 있나 보네.」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사희는 코웃음을 쳤다.
테이블 위의 월아를 바라보던 그녀는 물었다.
“여기에 다시 온 이유가 뭐야? 그분의 검을 써서 뭘 하고 싶은 거야?”
“꿈의 끝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일찍이 사부님이 걸어갔던 길.
사부님이 제시했던 이정표를 따라 그들이 달렸던 꿈을, 알베르트는 이어갈 의무가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우리의 시대는 끝났어. 우리가 가고자 했던 시대도, 이제는 돌아오지 않아. 나는 그 멍청한 녹일두와는 달라.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다음 대로 넘기면 된다고? 웃기지도 않아. 남자들은 속 편해서 좋겠어.”
사희는 신랄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짐작했는지, 유피는 의자를 빼서 앉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은 의자를 통과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보고 속이 편하다는 건지. 그 꿈에 집착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아? 과거의 망령.」
“난 너한테 말하지 않았어, 마녀.”
「도망치기는.」
유피의 테이블에서 흐릿한 찻잔이 나타났다.
홍차향이 피어오른다.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우리가 바라는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양양에서 봤던 악마다.
마몬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괴물들이 쓰러뜨려야 할 적이리라.
“알고 있다고? 아니, 넌 아무것도 알지 못해. 네가 본 그 녀석은 선발대에 지나지 않아.”
객잔과 유피의 모습이 멀어졌다.
알베르트와 사희의 앞에 나타난 것은 무너지는 협곡이었다.
협곡 앞에는 검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 존재는 그저 협곡의 앞에 서 있었다. 거리가 상당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힘이 느껴졌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그것은, 압도적인 불길함을 주변에 흩뿌리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눈을 돌리지 마. 잘 봐. 저것이 네가 대적해야 할 대상이야.”
검은 신형이 변화를 거듭한다. 녀석의 등에서 뼈로 된 날개가 드러났다.
뼈밖에 보이지 않는 날개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다. 불길이 달린다. 검은 머리가 작열했다. 타오르는 머리와 달리 녀석의 두 주먹에서는 푸른 한기가 어리고 있었다.
마왕.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괴물과 마주 선 남자는, 익숙한 삿갓을 쓰고 있었다.
“중원을 집어삼키고, 주군과 대등하게 싸운 괴물. 네가 우리의 꿈을 이룰 생각이라면, 네가 그분의 이름을 이었다면. 너만큼은 눈을 돌려서는 안 돼.”
알베르트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건 사희의 당부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 몸이 찢겨나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것과 싸운다고?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소리였는지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자신이 얻은 힘으로는 감히 싸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저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대적이라든지, 손을 섞는다든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저런 존재와 인간은 싸울 수 없다.
전설 속의 용사나, 드래곤 슬레이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단한 용사라도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저 존재를 앞에 두고 전의를 가질 수 없었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라. 주군은 녀석을 마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더 그럴듯한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지. 자, 어때? 이것이 현실이야. 너는, 저것과 싸워 이겨야 해.”
저것이 바로 마왕.
사부님은, 눈앞의 무인들은 이런 괴물과 대적했다는 건가?
마족들은 사부님이 활동했던 시대를 신화의 시대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취를 쫓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대다. 그 시대의 무인들도 이기지 못했던 괴물이다. 그런 존재를 앞에 두고, 알베르트는 검을 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렇게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저것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도망쳐. 네가 사랑하는 아가씨의 곁으로 돌아가. 저것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행복을 즐기라고.”
“…….”
얼어붙은 알베르트를 본 사희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비틀린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전성기의 마왕이구나. 확실히 무시무시하네.」
어느새 다가온 걸까. 유피는 협곡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움직이지 않는 마왕과 천마를 살펴보던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뭐야, 알. 무서워서 말도 안 나오는 건 아니지?」
“유피는, 알고 있었어?”
유피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낸 알베르트와 달리 그녀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연한 걸 묻고 그러네. 우리 마족의 주적은 너희 제국이 아니야. 지옥에서 온 악마들이지.」
“하지만 마족은 인족을…….”
「싫어하지. 하지만 악마들에 비할 바는 아니야. 이 녀석들은, 우리 손으로 지어야 할 매듭이야.」
“…….”
저것과 싸운다고, 유피는 망설임 없이 단언했다.
“그런 게…….”
가능하냐고, 힘없이 물어보는 알베르트의 입술을 유피의 손가락이 눌렀다. 환영인 그녀의 손은 알베르트에게 닿지 않는다. 그러나 알베르트의 말문을 막기에는 충분한 몸짓이었다.
눈앞에는 그녀의 얼굴이 있다.
반짝이는 붉은 눈과 여전히 긴 속눈썹.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이목구비는 알베르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 혼자서 짊어질 필요는 없어.」
“…….”
「무서우면 내 뒤에 숨어 있어도 돼. 집사보다 아가씨가 먼저 나서는 건 당연하겠지?」
배시시 떠오른 유피의 미소에 알베르트는 손을 들었다.
양 볼을 감싸듯이 때린다. 짝, 하고 얼얼한 통증이 얼굴에 퍼졌다.
“집사가 되어서, 아가씨를 먼저 보낼 수는 없어.”
「어머, 앞에서 먼저 나가게?」
“그래야 하지 않겠어?”
눈이 뜨였다. 이 이상 그녀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저 혼자서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혼자가 아닙니다, 사희.”
우습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들이 도움이 된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신들의 후예입니다.”
“그것의 저주를 받은 이상, 저것들은 우리 후손이 아니야.”
「그거 고맙네. 나도 당신 같은 선조는 사양하고 싶었거든.」
사희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피를 향했다.
“저것과 마주하는 순간 태반은 도망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괜찮다.
알베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선녀의 연설을 듣던 그들이 어떠했는지.
지옥도에 빠진 양양에서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다시 무너진 그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봤으니까.
확신에 찬 알베르트의 모습을 보고 사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차는지 그녀는 분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왜 마왕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왜 저 존재를 저것이라고 부르며 사희가 두려워하는지.
“그랬군요. 당신은, 마왕과 대적하지 않은 겁니까?”
마왕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사부님 혼자다.
그 뒤를 쫓던 이들은 누구 하나 곁에 서 있지 않았다.
“그게 뭐?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없었어. 우리가 곁에 있어 봤자 주군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야. 저것과. 저것과…… 대적할 만큼, 우리는 강하지 못했어.”
사희는 양팔을 감싸 안았다. 마왕을 보는 그녀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곳은 사희의 정신세계다.
그렇다면 그녀가 안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감 또한 그대로 투영되겠지. 마왕이 가진 이 불길함은, 사희가 느낀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렇다. 이 자리는 감히 저것과 대적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의 시선이었다.
사희의 마음은 죽어 있었다.
사부님의 말씀 대로다. 마음이 죽은 무인은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다.
“무서운 겁니까?”
“저런 걸 보면 누구나 마찬가지야!”
높아진 목소리와 함께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사희의 주먹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알베르트를 노려보는 두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저것과 싸운다고?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와 대적한다고?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실제로 저걸 본 너희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야.」
“…….”
사희의 입가가 비틀렸다.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분노, 기쁨, 슬픔, 괴로움, 고통, 후회. 스스로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지, 그녀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떠나도 좋습니다. 뒷일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떠나라고? 이제 와서, 내가 어떤 얼굴로 그분을 뵈라는 거야?”
마지막으로 사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우리를 믿고 나아간 그분은 절대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조차, 자신은 온전하게 해낼 수 없었다.
말을 삼킨 사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알베르트는 사부님의 말을 떠올렸다.
고성에 남은 무인들을 돌려보낼 때 사부님은 뭐라고 말했던가.
사부님은 실패한 그들에게 원망의 말을 내뱉었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사부님이 했던 말은…….
“새벽이 밝아온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가거라.”
사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사부님의 전언입니다, 사희. 사부님은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실패는 당신들만 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들을 꿈으로 이끈 사부님도, 실패했습니다.”
사희의 얼굴에 비릿한 표정이 떠올랐다.
감정이 부딪히고 있는 것 같다. 알베르트의 말을 믿고 싶은 본심과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겨우 그 몇 마디를 믿으라고?”
“사부님은 원래 그런 분이지 않으셨습니까?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말수는 적지만, 앞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이런 오지에서도 사부님의 삿갓을 떠올리기만 해도 자연히 미소가 떠오른다. 만약, 사희가 사부님을 선망하고 있다면, 그 느낌은 알베르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리라.
비틀렸던 표정이 천천히 돌아온다. 웃음기를 지운 사희는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아직 너는 주군의 소매조차 건드리지 못해.”
“걱정하지 마세요, 사희.”
알베르트는 말했다.
“저는 천마입니다.”
“…….”
그 말은, 언젠가 들었던 그 말과도 비슷했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사희는 눈을 감았다.
눈 아래에서 떠오르는 광경은 그 사람과 처음으로 만났던 날의 일이다.
멋대가리라고는 하나 없는 삿갓을 쓴 붉은 머리의 키 작은 사내.
무림 초출로 보이던 그 남자를 사희는 보잘것없는 삼류 무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바보 같아, 정말.”
시작은 미약했다.
패배에 승복하지 못했던 사희는 그 사람의 뒤를 쫓았고, 곧 그 사람의 그릇을 알게 되었다. 홀로 무림에 나왔던 그의 곁에는 어느새 수많은 흑도인이 함께했고, 그 물결은 곧 파도가 되었다.
모든 것을 정면에서 무너뜨리는 그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삼 초까지 갈 것도 없다. 그 남자가 뽑는 검을 일 초라도 버틸 수 있는 자는 무림에 없었다.
그가 나아간 발자취는 곧 전설이 되었다.
그가 입에 담은 꿈은 곧 신화가 되었다.
모두가 그 꿈을 보고, 그 등을 쫓았다. 자신도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 설마, 했던 마음이 확신으로 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꿈의 끝이 다가왔다. 그 결실이 앞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천마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가 무림에 나타난 이유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희는 눈을 떴다.
앞에 있는 건 그 남자가 아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수많은 흑도인을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을 보였던 남자는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모습에 주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알베르트의 앞에 푸른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의 남자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일까. 한때 주군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알베르트를 향해 칼자루를 내밀었다.
“우리도 해내지 못했던 거야. 주군조차 실패했어. 그런데 네가 성공할 수 있겠어?”
사희의 말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희.”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쥐었다.
“남자라는 것들은…….”
정말 건방지다니까.
세상이 무너진다.
사희는 자신의 몸이 하얀 재로 흩어지는 걸 느꼈다.
꿈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다.
주군이 남긴 꿈을 우리가 좇아갔듯이, 이제 그 꿈은 눈앞의 남자가 이어가겠지. 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사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데도 만족했다. 그가 천마라는 이름을 댄 이상. 막연하게도, 정말로 막연하게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고 말았다.
이제 2대 천마는 눈앞에 있지 않았다. 월아와 함께 그는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협곡의 뒤를 이어 무너지는 객잔뿐이다. 주군과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객잔이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추억이 되어버린 장소. 자신의 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주군만큼은 예외였다.
부서지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 남자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군.
이제 저는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곳에 있는 당신은 제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요.
전언은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전 당신을 보면 할 말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비록 대산으로 함께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저는…….
사희의 의식은 곧,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지는 빛 사이로 그녀가 애용했던 연검만이 의자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