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뱀의 꽈리(1)
알베르트는 양양 성의 객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썩어빠진 고문 기구로 장식되어 있던 유피의 성과는 다르다. 깔끔하게 정리된 객실 안에서는 부드러운 허브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초상화다. 거미줄은 물론이고,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다. 매일 청소가 행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객실은 방의 크기가 작은 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벨 오빠가 꽤 신경 써준 모양이야.”
“마나의 흐름도 괜찮구나. 여차하면 후원을 쓸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말이야.”
두 마녀는 정리된 객실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유피의 요청대로 방의 중앙은 텅 비어 있었다. 의식을 치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세실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얀 가루를 뿌렸다. 어떤 동물의 뼛가루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문밖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집사장 로버트입니다.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와.”
달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객실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검은 연미복이 중후한 인상과 잘 어울렸다. 세련된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그는 유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건강하신 모습을 봬서 기쁩니다, 유피에르 황녀님.”
“로버트 할아범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한쪽 무릎을 꿇은 로버트는 예를 갖췄다. 노집사는 유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신 겁니까?”
“실력 좋은 의녀가 봐줬어. 예전처럼 갑자기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유피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의 주름은 깊게 패여 있었다.
“혹여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내가 아직도 몸이 아픈 아이로 보여?”
“이 할아범의 눈에 비친 황녀님은 언제까지고 아이랍니다.”
“황녀님에게 할 말은 아니네.”
말과는 달리 노집사를 바라보는 유피의 눈은 부드러웠다.
“산의 마녀님도 자리에 계셨군요.”
“안녕, 로버트.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니 너도 이제 할아버지가 다 되었구나.”
“누구나 늙어가기 마련입니다. 마녀님처럼 늘 아름다울 수는 없죠.”
세실리아와 인사를 나눈 로버트 집사장은 마지막으로 알베르트를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청년. 연회장에서 봤을 때는 스켈레톤이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온전한 사람이었다.
“소문의 집사가 자네인 모양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알베르트 라나라고 합니다.”
“로버트 달튼이다. 아벨 황자님의 집사를 맡고 있다네.”
악수를 한 집사와 노집사는 씨익 웃었다.
“가문 이름이 특이하군. 란이라면 사군자의 난초를 말하는 것 같은데.”
“종종 들은 말입니다.”
알베르트의 웃음이 쓴웃음으로 변했다.
그런 집사를 보며 로버트는 턱 밑에 손을 괴었다.
“한데,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단 말이지. 사군자를 성으로 쓰는 가문이라…….”
“로버트 할아범.”
흠, 하고 생각에 잠긴 로버트를 유피가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시간이 있다면 옛날이야기 좀 들려줘.”
“옛날이야기 말씀입니까?”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 황자님으로부터 충분한 시간을 받은 터다. 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은 충분했다.
“사희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무덤 수호자를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신화의 시대를 풍미했던 4명의 흑도인.
그중에서 홍일점이었던 사희에 대해서 로버트는 입을 열었다.
“사희는 흑도의 꽃이라고 불렸던 무인입니다. 본명은 한소소(漢昭笑). 출신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활동한 곳이 낙양이라는 것에 이견을 갖는 학자는 없습니다. 사희가 다루는 무공은 일인전승으로 뱀의 움직임을 모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세외세력이었던 뱀의 신녀(神女)가 그녀의 스승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뱀의 신녀는 연검을 다루지 않았다고 들었어.”
“황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뱀의 신녀는 독과 암기에 능했던 무인이었죠. 검술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사희의 스승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혹시 언니는 알고 있어?”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할아범이랑 나누렴.”
세실리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는 의식을 치를 마법진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까마귀라고 불렸던 흑살귀와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문헌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명호를 얻은 뒤 무림에서 활동한 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죠. 항간에서는 무림의 정세를 보고 크게 실망한 그녀가 강호를 등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지냈다는 설이죠. 물론 천마님이 무림에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만.”
“이후의 행보는 어땠어?”
“사희는 천마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홍마대와 마찬가지로 격동의 바람을 가져온 그들은 전설이 되었고, 지금은 그 시기를 신화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죠. 분명 아름다운 시대였을 겁니다. 지금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말이죠.”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다. 입을 다문 로버트를 보며 유피는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알려줘. 사희는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십만대산으로 향했다고 들었어.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그 건에 관해서는 지금도 이야기가 많죠. 사희가 배신했다는 말도 있고, 천마님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안배라는 말도 있고, 조금 얼토당토않지만…….”
“그러네. 사희는 천마님의 연인이라는 말도 있었지.”
그 말을 받은 것은 세실리아였다.
마법진의 준비가 끝난 건지 그녀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그건 음모론이잖아.”
“어머,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다? 천마님 정도라면 사랑하는 연인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그게 흑도의 꽃인 사희라면 제법 모양새가 난다고 생각하는데?”
“연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희와 천마님이 각별했던 사이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마님이 흑령인(黑鈴印)과 자신의 검을 사희에게 맡기지는 않았겠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에 알베르트가 참전했다.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사부님의 이야기를 떠올린 그는 말했다.
“제가 느끼기에 사희는 천마의 연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물론 독문 무공을 전수했다기보다는, 조언을 해주는 정도 말입니다.”
“사제지간이라…….”
“재밌는 가설이군. 확실히 그런 추측이 담긴 문헌도 있었네.”
“…….”
쳇, 하고 재미없다는 듯 세실리아는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사랑 이야기를 꺼내서 불타오르고 싶었던 것 같다.
“준비는 끝났어. 바로 시작할 거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 로버트 할아범.”
“알고 있습니다, 황녀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의 경호는 로한이 맡을 겁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로버트는 바빠지는 두 마녀의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아, 그래. 그랬었지. 알베르트. 자네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서 봤던 것 같네.”
“책에서 말씀입니까?”
“그렇네. 분명 「사군자」라는 이름이었는데, 인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기억에 남아 있네.”
뜻밖의 이야기였다.
“혹시 그 책을 제가 볼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군. 내 필요하다면 가져다주겠네.”
“감사합니다. 로버트 집사님.”
“별거 아니라네.”
흔쾌히 승낙한 로버트 집사는 객실을 뒤로했다.
문고리를 건 알베르트는 완성된 마법진을 확인했다. 두 마녀가 다루는 마법진은 서클 마법의 마법진과는 달랐다. 오망성과 육망성을 그리는 마법진과 달리, 그녀들의 마법진은 나무의 뿌리가 퍼져가는 마법진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월아를 준비하렴.”
마법진 중앙에 마련된 거치대에 알베르트는 월아를 올렸다.
낡은 검과 칼자루에 붙은 하얀 뱀 장식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마법진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앞에 둔 채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행하는 의식은 몽환(夢幻)의 술 중 하나야. 만약을 대비해 마지막으로 확인할게. 집사가 도전하는 경계의 세상은 사희의 정신세계와 월아의 악몽이야. 맞지?”
“그렇습니다.”
세실리아의 발치에서 보랏빛의 마나가 흘러나왔다.
뿌리에 닿은 마나는 곧 마법진 전체에 옅은 빛을 불어넣었다.
“나는 두 악몽의 경계를 허물 거란다. 즉 집사가 마주하는 세상은 두 세계가 겹쳐져 있다고 생각하면 돼. 성공적으로 악몽을 통과한다면, 한 번 더 반복할 이유는 없을 거야.”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가능해. 여기에는 마녀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같이 갈 거야.”
마법진 바깥에 서 있던 유피가 알베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월아를 앞에 둔 채 유피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무릎 위로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올렸다.
“악몽에 진입한 그 순간만큼은 나도 둘을 도와줄 수 없어. 악몽을 조율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 문제에 관해서는 유피에게 일임할 거란다.”
“객잔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봐. 만약 사희와 조우하게 되면 싸우지 마. 알겠지, 알?”
“최대한 도망쳐라, 그 말이지?”
세실리아의 손에 맞춰 객실의 불이 꺼졌다.
어두워진 방 안에서는 마나를 머금은 마법진만이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어. 언제든지 시작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알베르트는 월아의 위로 손을 얹었다.
하얀 뱀이 고개를 든다. 축객령을 내리고 싶은지, 사희는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스터, 아시겠지만 저는 악몽 속에서는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네. 악몽이 끝난 후에 다시 보게나.’
[부디 무운을.]
송곳니가 알베르트의 손등을 꿰뚫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어두워진다. 의식이 추락한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베르트는 알고 있었다. 그 직전에, 부드러운 손이 알베르트의 손등을 덮었다.
“가자, 알.”
알베르트의 의식은 곧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
기분 좋은 햇살이 알베르트의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심코 잠이 들어버릴 것만 같은 따뜻함이다. 몸은 부드러운 모포에 둘러싸인 것처럼 기분 좋은 포근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거웠던 머릿속이 놀랄 정도로 상쾌했다. 간밤의 잠이 무척이나 달콤했던 모양이다. 악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알베르트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즐거우신가 보네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알베르트는 웃음을 멈췄다.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낯간지러운 상냥함을 담은 목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리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포근한 모포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옆자리를 보자 거기에는 익숙한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유피에르 바토리.
은빛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녀가 알베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알베르트.”
“!?”
알베르트는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난 속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유피에르와 알베르트를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아, 하고 유피에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가리고 있던 유피에르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유피에르의 나신으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나신을 본 알베르트의 시선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과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얇은 허리.
손을 대면 분이 묻어나올 것 같은 하얀 피부는 시선을 붙잡는 마성적인 매력이 깃들어 있었다. 굳어버린 알베르트를 내버려 둔 채 유피에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걸어두었던 속옷을 천천히 입은 그녀는 그 위로 새하얀 사제복을 걸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에요? 일단 옷부터 챙겨 입어요.”
말을 잇지 못하는 알베르트와는 다르다.
유피에르는 옷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익숙한 동작으로 빼냈다. 별무리가 지는 것처럼 은발이 흘러내렸다. 신성 제국의 국교, 루미에르 교의 로사리오가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흔들렸다.
“정신이 들면 내려와요. 아침 식사는 제가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를 바라보던 유피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알베르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걸까, 작은 발소리는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알베르트는 유피에르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차갑게 식은 뒤에야 그는 간신히 목을 울릴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건 내가 할 말 아닐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알베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도 유피가 있었다. 침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조금 전의 유피에르와 달리 익숙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투명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이쪽의 유피가 진짜 유피에르 바토리다.
「알이 어떤 눈으로 날 보고 있는지 잘 알았어.」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이다. 알베르트는 드래곤을 앞에 둔 용사의 심정을 깨달았다.
“아니,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 저건 유피가 아니잖아? 유피는 저렇게 크지 않잖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침대에 같이 있던 유피에르는 성장한 유피의 모습이다. 아마도 알베르트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 같다. 유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간 유피에르는 자신과 닮아 있었지만,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네. 미안하게 됐어. 내 몸매가 빈약해서 말이야.」
“…….”
그 부분을 화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