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천일소화(千日素花)(1) (76/200)

 # 76

천일소화(千日素花)(1)

“그 의녀가 천일소화라고? 말도 안 돼.”

“유피의 체질을 한눈에 알아보는 의원이 있다면, 그건 천일소화밖에 없어.”

확신에 찬 세실리아의 목소리에 유피는 미간을 좁혔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어요, 산의 마녀?”

“물론이랍니다, 황녀님.”

기 싸움을 벌이듯이 두 마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다. 조심스럽게 손을 든 알베르트는 물었다.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은 아직 몰라도 돼.”

“집사가 알아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야.”

“…….”

단숨에 격침당했다.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알베르트의 입가에 멋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미안해진 걸까, 실랑이를 멈춘 유피는 차분해진 목소리를 냈다.

“언젠가는 알려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알려줄 생각이니?”

“알은 믿을 수 있어.”

“…….”

세실리아는 알베르트를 보았다가, 유피를 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윽고 뭔가 깨달았는지 손바닥 위로 손을 마주쳤다.

“유피가 드디어 사랑…….”

“달라.”

동생의 즉답에 언니는 눈을 깜박였다.

“사랑?”

“다르다니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세실리아의 억양이 바꿨다. 그러나 유피는 얼굴을 구겼을 뿐이다.

“알은 내 가신이야.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지저 출신의 아가씨처럼 말이지. 하지만 집사는 인족이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유피의 대답에 세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허투루 꺼낸 말이 아니다. 유피의 진심을 느낀 세실리아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건 유피가 정할 일이니까. 그리고 집사.”

세실리아는 알베르트를 불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대면 죽여 버릴 테니까.”

“네?”

“다르다니까!”

유피가 새된 목소리를 냈다.

*&*

소요 거리는 용하 거리에 비해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무너진 건물도 몇 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영업하고 있는 객잔도 많다. 상처를 입은 주민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건이 있고 난 뒤인데도, 거리는 벌써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호객 행위에 열중하는 노점상들을 보며 알베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마치 잡초 같은 생명력이군요.]

‘그 표현은 조금 그렇구먼.’

[아뇨. 이 끈질김. 한 번 밟는 거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목숨줄.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잡초입니다.]

‘…….’

가차 없는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거지만, 마족을 대하는 천칭의 자세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알베르트가 이른 아침부터 가도에 나와 있는 것은 아란을 찾기 위해서였다.

유피와 세실리아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두 마녀는 용하 거리, 즉 서쪽으로 향했고. 알베르트는 소요 거리, 동쪽을 맡고 있었다. 흩어져서 찾는 편이 아무래도 효율 면에서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알베르트와 유피가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풀이 죽은 세실리아를 본 그녀가 양해를 구했다.

유피 왈. 날 보러 온 사람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언니를 생각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에서 진료를 보는 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던 알베르트는 호객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한 잡상인에게 물었다.

“의원 말인가? 이 근처의 의원들은 대부분 출장 중이라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용하 거리 쪽은 아예 난리가 나버렸거든. 의원을 찾아볼 생각이라면 그쪽으로 가보게.”

“남은 의원은 없다는 건가요?”

“음, 몇 명은 그래도 남아 있으려나. 그렇군. 천하 객잔에 가보게. 황림당이 부른 의원들이 있을지도 모르네.”

잡상인으로부터 천하 객잔의 위치를 들은 알베르트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발걸음을 옮긴다. 잡상인의 말대로라면 객잔의 위치는 멀지 않았다.

[결국, 원점이군요.]

‘무엇이 말인가?’

[양양에 와서 얻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칭의 말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그와 검을 겨누고 맞댄 것은 마족이 아니었다. 본질부터 다른 것.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알베르트는 두 눈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네. 우리의 적이 누군지 알게 되지 않았나?’

[악마가 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스터. 악마는 또 하나의 적일 뿐입니다.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악마를 도운 건 누구입니까? 마족의 사냥꾼? 그렇지 않으면 북부의 야만족? 혹은 양양의 마족일 수도 있습니다.]

‘마족 전체가 적이 아니다. 적은 그 악마를 신봉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정말 아무 소득이 아니라는 건가?’

[오히려 힘들어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천칭은 판이 커졌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와 내가 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시더 황자에게서 못된 것만 배웠군요.]

그래도 천칭은 알베르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못마땅한 목소리를 내는 것과는 달리 그는 알베르트의 힘이 되어주리라. 그것으로 충분했다. 툴툴대는 친구의 불평을 들으며 알베르트는 가도를 나아갔다.

천하 객잔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요 거리에서도 가장 큰 건물의 앞에는 하얀 붕대를 감싼 무인들로 가득했다. 술과 만두를 즐기는 그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치료는 객잔 안쪽에서 행해지는 모양이다. 알베르트는 무인들을 지나쳤다.

“천하 객잔은 오늘 쉬는 날인데, 무슨 용무로 왔는가?”

한 무인이 알베르트의 앞을 막았다. 가슴을 하얀 붕대로 감싼 무인이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익숙하다. 분명 알베르트의 주먹에 가슴이 박살 났던 무인이다.

“의녀를 찾으러 왔다네.”

“의녀?”

“그렇다네. 말을 못 하고 하얀 판을 메고 다니는 의녀네. 본 적이 있는가?”

무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알베르트의 길을 막은 무인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자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너무 고자세라고 생각하지 않나?”

알베르트는 뒤늦게 주변에 흐르는 분위기를 파악했다. 술잔을 든 무인들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고의 의미인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은 이들도 많다. 눈치를 보아하니, 알베르트가 누군지 몰라보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그게 당연했다.

그들과 만났을 때의 알베르트는 스켈레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그때와 비교한다면, 연미복 외에는 공통점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맑아졌다.

“분명 마틴이라고 했던가, 자네.”

“이놈 봐라. 내 이름도 알고 있네? 어이, 자네들도 들었는가?”

“마틴이 유명인사가 다 됐구먼.”

“예끼, 이 사람아. 그게 자랑할 일이야?”

웃음을 터뜨리는 무인들과 함께 알베르트는 웃었다.

“가슴은 이제 좀 괜찮은가?”

“가슴?”

“주먹을 과하게 쓴 건 사과하지. 그리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네.”

“…….”

마틴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알베르트의 말을 듣지 못한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마틴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혹시…… 알베르트 대협입니까?”

“나는 자네들에게 이름을 밝힌 기억이 없는데. 카일이 알려줬는가?”

알베르트의 반문에 마틴은 두 손을 모았다. 쿵, 하고 포권을 취했을 뿐인데 큰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숙인 마틴이 말했다.

“그날 밤은 감사했습니다, 대협!”

“대협?”

“그게 무슨 소리야?”

마틴의 돌발 행동에 황림당의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조심스럽게 알베르트를 보았다. 무언가 말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알베르트 라나네. 다들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기쁘네.”

“…….”

한 박자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무인들이 포권을 취했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대협!”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대협!”

귀가 울린다. 목소리를 높이는 장정들의 모습은 장관이라고 부를만했다. 알베르트는 황림당의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거동이 불편한 무인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도 일단은 무인이다. 심한 상처를 입은 이들은 없는 모양이다.

덜컹, 하고 객잔 안쪽에서 의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연회를 벌이는 건 상관없지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몇 번을…….”

젊은 의원이다. 포권을 취한 무인들을 본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포권을 받는 사람은 한 남자다.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성을 본 의원은 엉겁결에 포권을 취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네. 의원을 찾아왔다네.”

“절 말입니까?”

“아니, 자네를 찾아온 게 아니라 아란이라는 의녀를 찾아왔네.”

“아란 의녀 말씀입니까?”

혹시 이곳에 있는 걸까.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 의녀라면 약초상에 다녀온다고 했습니다. 잠시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거 다행이군.”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아란이 오기 전까지 천하 객잔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자리에 앉은 알베르트의 테이블로 점소이는 술과 만두를 가져왔다. 마틴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의 두령인 카일은 현재 자리에 없었다. 귀화루의 루주인 청화도 그랬지만, 양양의 수복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만두는 유피가 먹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마틴 왈. 천하 객잔의 왕만두라는 모양이다.

한 입 베어 먹어본다. 생각 외로 만두는 맛이 좋았다. 유피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무인들은 한 명, 한 명. 알베르트가 있는 테이블을 들렀다 갔다.

그들이 물어보는 말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날은 고마웠다든지,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다든지, 어떻게 그리 강한지, 사부님은 누구인지. 제대로 된 대답은 돌려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소문의 대협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무인들이 가고 나자, 이번에는 의원의 차례였다. 알베르트의 앞에 앉은 그는 말했다.

“저는 라온이라고 합니다.”

“알베르트 라나네. 무슨 일인가?”

“음기로 고생하시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라온 의원님이라면 실력이 확실합니다.”

“무려 그 아벨 황자님의 전속 의원이거든요. 손해 볼 일 없으실 겁니다, 대협!”

아벨 황자의 전속? 그러고 보니 라온이라는 이름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맥을 짚어보고 싶습니다.”

“알겠네. 부탁하지.”

알베르트는 선뜻 팔을 내밀었다.

“생소한 기운이군요. 음기로는 보이는데, 이런 기운은…….”

라온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알베르트의 가슴에서 흐르는 음기가 낯선 모양이다.

“월기라고 들었네.”

“월기요?”

“모르는가?”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운은…….”

반신반의하는 라온을 보며 알베르트는 말했다.

“그렇지. 월아가 새기는 기운이라네.”

“…….”

라온은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장난을 치고 있는 거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느낀 기운은 생소한 음기였다. 음기에 대해서는 견줄 의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라온이다. 그런 그가 알지 못하는 음기다. 전설의 월기가 이 기운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월아에 당하신 겁니까?”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라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잔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잠시 후 약초 가방을 들고 나왔다. 가방 안쪽에서 다양한 약초가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푸른 꽃을 찾아낸 그는 알베르트에게 내밀었다.

“서리꽃입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이걸 그대로 말인가?”

“그렇습니다. 생으로 먹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

라온이 건넨 꽃은 마치 얼음이 피어난 것 같은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한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라온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입에 해치우라는 모양이다.

[먹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설마 그러겠는가.’

두 눈을 감은 그는 서리꽃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안에 들어온 서리꽃은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