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용살자(龍殺者)(2) (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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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살자(龍殺者)(2)

“용살자?”

용살자. 용잡이. 그 명호가 의미하는 건 단 하나다.

“용살자라면,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입니까?”

“드래곤 슬레이어? 뭐, 그렇게도 부를 수 있겠지.”

알베르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륙 내 최강의 생명체라고 불리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넘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절대적인 강자. 세상은 그런 드래곤을 죽인 자를 가리켜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불렀다. 물론 실제로 드래곤을 죽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설 속에서나 회자되는 이야기다.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검성, 블라드 루드비히가 드래곤을 찾아 드래곤의 섬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끝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현재까지 검성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건 그런 까닭이었다.

“드래곤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군요.”

“우리 가문의 힘이다. 용의 유적지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대륙에는 남은 드래곤이 없었다. 2차 대전쟁 이후로 드래곤들은 대륙을 떠났고, 지금은 죽음의 바다 너머에 있다는 드래곤의 섬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는 전설만이 돌고 있었다.

“어떤 드래곤이었는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도 내 무용담이 듣고 싶은 모양이군. 하지만 그 건에 관해서는 기밀이네. 유적지에 대해서는 세가 전체가 침묵하기로 했다네.”

“그렇죠. 세상이 이렇게 변했어도 제갈세가의 힘은 대단해요.”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무공을 접한 것은 틀림없다. 양손에 박힌 굳은살과 허리춤의 칼자루는 손때가 많이 타 있었다. 어설픈 자세와는 거리가 있다. 노력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몸가짐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알베르트가 보기에 제갈윤 공자는 고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기도는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잘해야 황림당의 무인들보다 우위에 서는 정도다. 양양 성의 수비대장인 무진보다도 약했다. 일반 무인들보다는 강하지만, 전설 속의 드래곤 슬레이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갈윤 공자님은 뛰어난 무인이 맞으십니까?”

“실례인 말을 하는군. 무진과 검을 섞을 수 있는 무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가. 아무래도 강함의 기준이 다른 것 같다.

알베르트가 생각하는 강함은 현시대가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두 눈으로 목도해 온 것은 신화의 시대를 살아왔던 무인들이다. 그들과 지금의 무인을 비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쩐지 세실리아와 유피의 반응이 안 좋다 싶었다.

알베르트도 흥미가 식었다. 대화를 길게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알베르트는 호접희의 눈을 보았다. 제갈윤 공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 남달랐다. 가희나 송이를 보는 눈과는 다르다. 알베르트는 그 눈에 어린 감정을 읽고 생각을 고쳤다. 기녀들에게는 꽤 신세를 졌다. 여기서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후배가 한 수 청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

“비무입니다.”

갑작스러운 알베르트의 제안에 유피는 그 등을 찔렀다.

“무슨 소리야. 몸 상태도 안 좋으면서?”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와 손을 섞을 수 있다면 몸이 안 좋은 게 문제가 아니야.”

“너 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애초에 제갈세가는 진법에 두각을 드러내는 쪽이야. 또 용살자라는 건 드래곤 슬레이어와는…….”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유피는 미간을 좁혔다. 호접희와 제갈윤. 그리고 다시 알베르트를 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왜 시간 아까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상대해 주고 싶다만, 순서라는 게 있지 않겠나? 자네 같은 낭인(浪人)은 아직 나와 검을 섞을 만한 경지가 아니네.”

“순서, 그렇군요. 저는 무진을 쓰러뜨렸습니다.”

“그건 또 무슨 농담인가?”

재밌다는 듯 제갈윤 공자는 웃었다. 양양 내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이 무진이다. 파락호(破落戶) 같은 성격의 그를 아벨 황자가 기용한 것은 순전히 무공 실력 때문이었다.

“사실이에요, 공자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무인이 알베르트 님이에요.”

“…….”

그 웃음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하지만 그건 스켈레톤 무인이었을 텐데?”

“그건 알베르트 님의 본신이에요.”

“…….”

제갈윤 공자의 얼굴선을 타고 한 방울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림당의 무인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관병의 검수들을 물리치고. 그것도 모자라 무진까지 쓰러뜨렸다는 그 소문의 무인이 자네라고?”

“자세히도 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준수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한 수를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 정도의 사내라면 나와는…….”

횡설수설하는 제갈윤 공자의 모습이 안타깝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호접희였다. 알베르트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농담인 게 뻔하잖아요, 공자님. 알베르트 님도 갈 길이 바쁘신 몸이에요. 저희도 소하 언덕을 둘러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여기서 헤어지게요.”

“그렇게는 못 하겠어.”

“알베르트 님?”

당황한 호접희의 목소리를 알베르트는 무시했다.

자세를 잡는 그의 모습에 제갈윤 공자는 호접희를 지키듯이 섰다.

“이건 좀 경우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인은 원래 불합리한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알베르트의 수중에 무기는 없었다. 월아는 쓸 수 없다. 하지만 검을 들 필요는 없었다. 간단하게 확인해 볼뿐이다. 확인이라면 두 주먹만으로도 가능했다.

[이번 상대는 여자에 홀딱 빠진 부잣집 도련님입니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네. 그저 머리가 빈 도련님으로는 보이지 않는구먼.’

[어딜 봐서 말입니까?]

천칭의 반문에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를 응시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호접희를 챙기고 있었다. 알베르트와 거리를 벌린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윤 공자는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돈이라는 건 말일세, 천칭.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물건이네. 생각해 보게나. 호접희가 아무리 재주가 좋다고 해도, 그녀는 기녀일세. 세간의 시선은 물론이고, 양지에서는 존중받기 힘든 직업이네. 거기에 그녀는 혼혈 출신이지 않나? 공자라고 불리는 세가의 도련님이 저 무례를 받아줄 이유가 없다네. 그런데도 그 모든 걸 감안하고 공자는 호접희와 어울리고 있지. 이것만 보더라도 이 남자의 성품이 어떤지, 느껴지지 않는가?’

[저는 모르겠군요. 그냥 여자에 홀린 바보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 정도로 형편없는 남자라면 진작 도망쳤을 걸세.’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제갈윤 공자는 제법 자세가 괜찮았다.

아름다운 명검 위로는 은은한 검기가 어려 있었다. 긴장감을 감출 수 없는지, 제갈윤 공자의 입술은 말라붙어 있었다.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의 뒤에 서 있는 호접희를 살펴보았다.

진짜로 비무가 성사될 거로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호접희는 다급한 눈치였다. 그녀는 살짝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비무가 시작되면 금방이라도 뛰어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막무가내식으로 비무를 청한 의중이 알고 싶은지, 호접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베르트의 발이 지면을 밟았다. 그 신형이 사라진다.

단숨에 제갈윤 공자의 앞으로 튀어나온 알베르트의 주먹이 검신과 부딪쳤다.

“!”

검을 섞는 것과는 다르다.

시험해 보듯이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의 검에 맞춰 공격을 가했다. 가만히 있는 허수아비를 때리는 것과 똑같다. 좌로 흔들리고, 우로 넘어가는 검을 주먹으로 두들긴다. 진작 떨어졌어야 할 검이 아슬아슬 균형을 잡는다. 몇 번이나 검을 때렸을까. 뒤늦게 비무가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은 호접희가 소리쳤다.

“그,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알베르트는 살짝 뒤로 물렀다.

안색이 창백해진 호접희는 제갈윤 공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을 든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당연하다. 그는 그저 서 있었을 뿐이고, 검을 두드린 건 알베르트다. 아마도 방금 전의 교전으로 제갈윤 공자는 자신과 알베르트의 역량 차이를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갈윤 공자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은 호접희다. 이곳에서 그가 검을 내리면 혹여라도 그녀가 다칠 가능성이 있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 단예.”

이길 수 없다.

그래도 검을 내리지 않는다.

제갈윤 공자의 두 눈에 깃든 빛은 얌전하게 자란 공자는 가질 수 없는 눈이었다.

“과연 용살자라는 명호에 걸맞으신 무인이군요. 공자님의 검을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손을 내렸다. 호접희가 좋아하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이 비무로 깨달았다.

“제 무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후에는 비무가 아닌 논검(論劍)을 나누고 싶군요.”

“뭐? 그러니까…….”

목적은 달성했다. 알베르트는 포권을 취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제갈윤 공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가슴으로 호접희가 뛰어들었다.

“괜찮으신가요, 가가(哥哥)?!”

볼썽사납게 넘어진 두 남녀를 보며 유피는 코웃음 소리를 냈다.

웃기지도 않은 연극을 봤다는 느낌이다. 훌쩍거리는 호접희의 모습에 제갈윤 공자는 당황한 듯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두 손으로 호접희를 감싸 안았다. 그만 눈물을 그치라는 듯 제갈윤 공자는 작은 등을 토닥였다.

그런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걸음을 돌렸다.

두 마녀는 이미 멀리 감치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만족해?”

“나보다 유피가 만족하지 않았어?”

“그러네. 기녀의 이야기치고는 재밌었어.”

싸늘하게 말하는 유피의 머리로 하얀 손이 올라왔다.

“매정한 말만 하는구나, 우리 유피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떠니? 부럽다고.”

“부러워? 뭐가?”

“사랑이라는 건 말이야. 저렇게 불타오를 때가 가장 예쁜 법이란다. 신분도, 인종도 뛰어넘는 그런 사랑 말이야. 이 언니는 언젠가 유피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단다. 마황 폐하가 그러했듯이 말이야.”

“…….”

유피는 세실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세실리아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질렸다는 듯, 유피는 입을 벌렸다.

“꿈 깨셔요.”

살짝 귀가 붉어진 그녀는 두 사람을 놓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베르트는 세실리아를 보았다. 세실리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유피 귀엽지?”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은 걸까. 유피는 애꿎은 지면을 향해 발을 내리쳤다.

*&*

귀화루에 도착한 세 사람은 아란을 보기 위해 치료실로 향했다.

치료실에는 목소리가 불편한 의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약초 가방과 메고 다니는 판도 없다. 그녀가 애용하는 책상 위에는 익숙한 필체의 서신과 함께 기녀들의 이름이 적힌 통이 진열되어 있었다.

「바깥의 피해가 생각보다 큰지라, 당분간은 외진을 나가 있겠습니다. 계약이 만료되는 마지막 날에는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약은 넉넉히 준비해 뒀으니,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알베르트의 이름이 적힌 통도 있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언젠가 받았던 환약이 담겨 있었다. 약통을 둘러보던 알베르트는 「유피에르 바토리」라는 이름이 적힌 통을 발견했다.

유피에게 약통을 건넨다. 자신의 통을 본 유피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란과 처음 대면했을 때도 그랬다. 그쪽 아가씨는 환자가 아니냐고. 약통 안에 담긴 내용물은 하얀 환약이었다. 순간, 유피의 안색이 굳었다.

“그 의녀, 정체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천일소화(千日素花).”

치료실을 둘러보던 세실리아는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장침(長針)이 있었다.

“낙양에 있다는 전설적인 신의가 마계 전역을 떠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양양에 와 있었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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