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용살자(龍殺者)(1)
언덕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세실리아는 기분 나쁜 위화감을 느꼈다.
지면은 단순히 붉은 게 아니었다. 되다만 진흙처럼 움푹 들어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묘한 꿈틀거림이 발아래에서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지옥도의 흔적은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땅바닥에서 한 줌의 흙을 퍼낸 그녀는 혀를 내밀었다.
“아직 마기가 그대로 남아 있구나.”
세실리아는 손수건에 흙을 뱉어냈다.
“정화할 수 있겠어?”
“언덕 전역이 이 모양이라면 아무리 언니라도 힘들단다.”
악마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소하 언덕의 풍경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무와 침처럼 보이는 수액을 흘리는 꽃. 필요 이상으로 몸체가 부푼 벌레들은 마물이나 다를 게 없었다. 안개가 끼지 않은 하늘을 괴조(怪鳥)가 날아간다. 언덕을 벗어나는 새를 올려다보던 유피는 말했다.
“오빠한테는 봉쇄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둘게.”
“잘 말할 수 있겠니? 힘들면 언니가 말하고.”
“난 애가 아니야, 세실리아.”
“나도 네 친구가 아니란다, 유피.”
“언니는 정말 속 좁은 여자네.”
“이왕이면 마녀라고 불러 주지 않을래? 어감이 좋잖아.”
태연한 세실리아의 대답에 유피는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약초를 캐는 데 열중한 집사가 있었다. 의녀의 요청을 받은 알베르트는 약초를 챙기고 있었다. 얼굴에 흙이 묻은 것도 모르는 걸까. 유피는 손수건을 꺼내 알베르트에게 건넸다.
“칠칠맞지 못하게. 닦아.”
“고마워, 유피.”
흙이 묻은 손수건에 붉은 자국이 남는다. 흙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마기에 침식당한 땅은 병에 걸린다. 소하 언덕만 이런 것이 아니다. 마계 전역은 마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생기가 남은 이 땅도, 언젠가는 세상의 끝과도 같은 불모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자매들은 이 현상을 막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은 지금까지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라, 그거 케나인(Canine) 같은데?”
“아시는 약초입니까?”
알베르트가 쥔 약초를 알아본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만 정화할 수 있다면 꽤 쓸 만한 촉매제야. 순간적으로 링크를 강화해 주는 힘이 있거든.”
“촉매제요? 저는 몸을 치료하는 약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걸 약으로 쓴다고?”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그녀는 두 눈을 깜박였다.
“네. 귀화루의 의녀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케나인을 약으로? 음…… 나는 들어본 적 없는데. 애초에 마기가 닿은 약초를 사용하는 의원은 손에 꼽을 텐데. 혹시 그 의녀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아란이라고 했습니다.”
생소한 이름인 걸까.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력은 확실한 의녀야. 알이 입은 상처가 월아에 의한 것도 단번에 알아봤어.”
“기루의 의녀가 월기를 알아봤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이상한 거야.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니?”
“양양의 의원들은 대부분 명의잖아?”
유피의 물음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의원 나름이란다, 유피야. 기루의 의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암의원이야. 계약으로 묶인 이들 중에 제대로 된 치료사는 보기 힘들어. 이 일이 끝나면 그 의녀를 한번 봐야겠다.”
부상자를 돌보러 나가는 외진 시간을 제외한다면, 아란은 귀화루에 있었다. 세실리아와 그녀가 만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리라.
두 마녀와 함께 집사는 언덕을 올랐다.
가끔 방황 중인 언데드와 마주쳤지만, 위협적인 적은 못됐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움직임이 이상한 것은 물론이고, 몇몇 언데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상반신을 보며 알베르트는 물었다.
“마기는 언데드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나 보네.”
“당연한 소리를 하네, 알.”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가 대답했다.
“마기는 악마가 다루는 힘이야. 악마의 힘이 녀석들에게 도움이 될 리 없잖아.”
“언데드라는 건 사악한 거잖아? 유피의 말대로라면 마기는 녀석들의 힘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란다, 집사.”
알베르트의 반문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에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대퇴골이 들려 있었다. 언덕 바닥에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마기라는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안쪽에는 악마를, 그 바깥쪽에는 언데드와 마물을 그렸다.
“마기에서 탄생한 존재는 악마밖에 없어. 언데드나 마물은 마기에 영향을 받은 존재지, 그 주체가 마기인 건 아니야. 그 차이를 알겠니?”
“음…….”
“언데드는 시체가 부정한 마나에 노출된 경우 생겨나는 존재야. 마물도 마찬가지야. 아인(亞人), 동물, 벌레 같은 생물이 그 원점이야.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 세상에 있는 존재라는 거야.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기에 몸이 먹혀들어 갈지언정, 그게 긍정적인 효과는 가져오지 못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해하지 못하는 집사를 보며 세실리아는 볼에 손을 얹었다.
“이해를 못 하는구나.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는 건 악마밖에 없다는 말이란다.”
“즉 마기는 악마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 힘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목숨을 갉아먹는 거야.”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유피는 언덕의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사당이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몽환기가 불러온 마기에 의해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 같다. 사당의 잔해는 지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잔해 속에서 스승님의 위패를 발견한 유피는 조심스럽게 먼지를 쓸어냈다.
“난장판이 되어버렸구나.”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만약 조금만 대처가 늦었다면 양양 전체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참사가 벌어졌겠지. 유피는 위패를 내려놓았다. 세실리아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라인(Line)을 띄울 거란다. 분석을 부탁해도 되겠니?”
“걱정하지 마.”
산의 마녀는 품에서 작은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가 사르르 움직이며 보랏빛의 가루를 흩뿌렸다. 발이 나아간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그녀의 마나를 따라 음영(陰影)이 떠올랐다. 검은빛의 그림자를 향해 유피는 손을 뻗었다. 은빛 마나가 달린다. 세실리아가 발견한 음영에 그녀의 마나가 닿자, 음영은 각각의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긴 그림자가 떠올랐다. 잔해 속에서 떠오른 선의 색은 총 4개였다.
검붉은 색. 검은색. 하얀색. 회색.
“4개는 좀 많은데.”
“일단 검붉은 색은 제외해도 돼. 알의 기운이거든.”
세실리아의 손짓에 검붉은 색 음영이 사라졌다.
“검은색은 마기를 의미하니 이건 악마겠구나. 마몬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남은 색은 2개구나.”
“하얀색과 회색이라.”
둘 다 비슷한 곳을 밟은 음영이었다.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하얀색은 언덕의 절벽으로 향했고, 회색은 언덕의 길을 따라 내려갔다. 자취는 길게 남지 않았다. 이것으로 무언가 알 수 있는 것일까? 알베르트는 두 마녀를 바라보았다.
“어렵네.”
“어려워.”
숲의 마녀도.
산의 마녀도.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과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확실한 것은 악마가 이곳에 왔었고, 그 악마가 오기 전에 조력자가 왔었다는 거야. 조력자는 한 명도 아니고 둘이야. 한데, 둘이 같이 온 건 아니야.”
“먼저 온 것은 회색이야. 그 이후에 하얀색이 왔어. 이곳에서 뛰어내린 걸 봤을 때, 하얀색은 최소 무인이나 마법사야. 본신을 드러냈다면 회색으로 물들었을 텐데, 그건 아니잖아.”
“회색은 주민일 가능성도 있어. 양양의 주민은 몇 명이나 됐지?”
“예전만큼 많지는 않아. 그래도 한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전부 확인하는 건 무리겠구나.”
선을 들여다보던 유피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야만인은 어때? 녀석들이 여기까지 들어왔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
“야만인이? 별로 생각하고 싶은 수는 아니구나. 그래도 북부에서 양양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 편이니까.”
“녀석들이 마음만 먹으면 뭘 하지 못하겠어?”
“그것도 그러네.”
고민하는 두 마녀를 보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혹시 사냥꾼이 왔다 갔을지도 모릅니다.”
“사냥꾼?”
“지킴이를 말하는 거야, 언니. 알이 여기에서 만났다고 하더라고.”
“지킴이, 지킴이라…… 그러네. 이 하얀색은 지킴이일지도 모르겠다. 녀석들은 마기와는 담을 쌓았으니까. 가능성이 있겠어.”
하얀색의 선을 지운 세실리아는 손을 위로 올렸다. 회색의 선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선의 주인이 어떤 경로로 언덕에 올라왔고, 사당에 들어갔으며, 마지막에는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그 경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은빛 마나가 달린다. 선 아래의 잔해를 하나하나 치워간다. 딱히 눈에 띄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해를 더 뒤져보았지만, 나오는 건 흙먼지뿐이었다.
“다시 원점이구나.”
“그렇지도 않아. 일단 지킴이가 간섭했다는 건 확실하잖아.”
“확실하면 뭐하니. 녀석들은 우리만 보면 치를 떠는데.”
말하기도 싫다는 듯 세실리아는 지팡이를 품 안에 넣었다.
마지막 남은 회색의 선이 사라졌다. 잔해를 내려놓은 유피는 알베르트를 불렀다.
“뭐 하고 있어?”
“위패.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
“…….”
유피가 내려놓았던 위패는 알베르트의 손에 있었다.
위나 바토리, 스승님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눈에 들어왔다. 유피는 알베르트의 손에서 위패를 넘겨받았다. 쓸어낸 먼지 아래로 드러난 이름은 불에 그슬려 있었다. 볼품없는 모습이다. 모서리가 나간 위패는 생전 추앙받았던 현자를 기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유언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모셨을 텐데.
“괜찮아?”
걱정하는 알베르트의 목소리에 유피는 그를 보았다.
성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그녀보다 키가 작았던 소년이다.
이제 2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을 텐데, 성장을 거듭한 소년은 청년이라고 말해도 좋을 체격이 되어 있었다. 뭔가 짜증이 일었다. 무엇보다 알베르트를 올려다봐야 한다는 게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발로 알베르트의 무릎을 때렸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서.”
“…….”
얼빠진 집사의 얼굴에 속이 조금 시원해진 유피는 걸음을 옮겼다. 벼랑 끝으로 향한 그녀는 위패를 내려놓았다. 유피의 마나에 반응한 대지에서 푸른 초목이 자라났다. 녹음은 위패를 세웠다. 위패 아래로는 수복 작업이 진행 중인 양양이 보였다.
“잘 지내, 할아범. 나는 여기에 있으니까.”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피는 몸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알베르트와 세실리아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재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세실리아는 감동했다는 듯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언급하면 피곤해질 것 같다. 말없이 두 사람을 지나친 유피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언니가 죽어도 그렇게 해줄 거니, 유피?”
뒤에서 얼빠진 소리나 물어보는 마녀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네. 세실리아가 죽으면 나한테 언니 같은 건 없었다고 말할래.”
“정말, 부끄럼쟁이라니까.”
“누가 부끄럼쟁이라는 거야!”
뛰어간 세실리아는 유피의 어깨에 들러붙었다. 찰싹 달라붙은 그녀를 떼어내려는 유피와 더 엉겨 붙는 세실리아의 뒤를 알베르트는 따라갔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많은 걸 말하는 법이었으니까.
*&*
소하 언덕을 거의 빠져나왔을 무렵, 아래쪽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한 마물이 없어서 아쉽구나. 무명이라도 쌓아두면 혹 도움이 될지 모르는데 말이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언덕을 올라오는 건 두 사람이었다. 가냘픈 체구와 긴 머리인 걸 봤을 때, 두 사람 모두 여성인 걸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두에서 걷고 있는 건 아벨 황자처럼 준수한 얼굴을 한 미청년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알베르트 님?”
귀화루의 기녀인 호접희였다.
“호접희가 이곳은 어쩐 일입니까?”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요. 오늘은 수복 작업을 도와주러 나가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호접희는 당황스러운 눈치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는 유피에르 황녀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동행자도 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그쪽 분은 연희의 일행이라고 하셨죠? 분명…….”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연희의 언니인 세실이랍니다. 진짜 언니니까, 꼭 기억해 주세요.”
유피의 손에 얼굴이 밀려나면서도 세실리아는 차분히 말했다.
본명은 밝히고 싶지 않다. 그녀의 가명에 호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하 언덕은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일단은 출입 금지구역인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마물이라도 나오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었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든든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든든한 사람?”
크흠, 하고 미청년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이목이 쏠리자 청년은 호접희를 보았다. 소개가 늦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호접희는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이쪽은 제갈윤 공자님입니다. 공자님. 이쪽의 여성분은 낙양에서 무희로 유명한 연희와 그 언니인 세실. 그리고 알베르트 란님입니다.”
“이런 미인을 두 분이나 뵈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제갈윤이라고 합니다.”
두 주먹을 모은 제갈윤 공자는 유피와 세실리아를 향해 인사했다.
“세실이라고 합니다.”
“연희예요.”
악수를 청하기 위해 제갈윤 공자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두 마녀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설마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제갈윤 공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쪽은 알베르트 란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제갈윤 공자님.”
“귀화루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제법 쓸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구나.”
무인은 무인을 알아본다고 했는가. 제갈윤 공자의 말에 호접희가 덧붙였다.
“참고로 제갈윤 공자님의 명호는 그 유명한 용살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