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양양 성 전투(5) (71/200)

 # 71

양양 성 전투(5)

양양을 빠져나온 알베르트는 소하 언덕에 도착했다.

유피와 함께 이 언덕을 찾아왔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안개가 낀 것을 제외하면 언덕의 형태를 하고 있던 이곳이, 지금은 아예 다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붉은 세계가 되어버린 소하 언덕은 끊임없이 맥박치고 있었다.

“…….”

눈의 착각이 아니다.

지면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라진 땅 사이로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꿈틀거렸다.

발아래에 닿는 감촉은 생소했다. 살로 된 땅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맞닿은 발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땅이 살아 있는 느낌이다. 지그시 체중을 실어보자 지면이 밀려났다.

이것도 유피가 말한 지옥도의 일종일까. 붉은 언덕을 앞에 둔 알베르트는 발을 멈췄다.

‘혹시 저주받는 건 아닐까 무섭구먼.’

[설마요, 마스터. 끽해야 마물이나 되겠죠.]

‘…….’

천칭의 대답은 마음의 위안이 되지 못했다. 꺼림칙한 공기에 알베르트는 숨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알고 있다.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꺼림칙한 세상에 들어온 알베르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불온한 기류가 흘러나오는 곳은 언덕의 정상이다. 아마도 몽환기는 현자의 사당에 있는 것 같다. 언덕을 오를수록, 붉은 대지는 점차 그 모습이 변해가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빛의 연못이 보이고, 그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다.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기괴한 마물을 피해 알베르트는 언덕을 올랐다.

‘지옥이라는 것이…… 실존하는 거였나?’

마계로 오던 도중, 유피가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옥과 중원이 부딪쳐 지금의 마계가 탄생했다는 말. 그녀가 언급했던 지옥은, 루미에르 교가 말하는 그 지옥이 맞을지도 모른다.

[루미에르 교에서 말하는 지옥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악마들의 거처.

사후의 죄인들이 향하게 된다는 세상. 다프네 여신님에 의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가는 이계(異界)다. 알베르트는 루미에르 교의 신자기는 했지만, 딱히 신앙이 깊지는 않았다. 국교를 믿고 따르는 것은 의무기에,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쪽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봐버리면 생각 자체가 송두리째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루미에르 교의 신전으로 향하자. 가서 축복이라도 받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마스터는 다프네 여신을 믿는다고 했었죠.]

‘그렇다네. 부디 이 몸이 무사했으면 좋겠군.’

루미에르 교가 모시는 주신(主神), 다프네 여신님은 정의와 사랑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오직 성녀만이 기도를 통해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고 신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2차 대전쟁을 예고했던 신탁은, 지금도 제국 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언덕의 정상이 가깝다.

사당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알베르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앞에는 유피가 보여줬던 몽환기가 두둥실 떠 있었다. 붉은 마기가 요동친다. 마기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긴 몽환기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릇 곳곳에 금이 가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군. 역시 네놈이 있는 건가.”

두 개의 뿔. 검은 피부를 한 이형의 존재.

아무리 생각해도 악마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괴물이 몽환기 앞에 떠 있었다.

자신이 꿈이라도 꾼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의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와 마주한 알베르트는 각오를 마쳤다.

「신기하군. 죄인 주제에 그릇의 영향에서 벗어난 건가?」

지면으로 내려온 악마는 날개를 접었다.

“너는 악마인가?”

「악마라…… 그럴지도 모르지. 누구에게는 신의 사자일 수도, 누구에게는 악신의 사자일 수도 있지. 우리를 지칭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아.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너희 죄인들은 이름 짓는 걸 좋아하지 않더냐?」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놈은 진지하게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유가 넘치는 그 목소리는 강자 특유의 것이었다.

“알베르트 라나다.”

「?」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악마를 향해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준비는 끝났다. 몸 안의 내공은 주인의 의지에 답하듯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가슴 한쪽에서 올라오는 음기의 통증은, 다행히 견딜 만했다. 약효가 제대로 돌고 있는 것 같다. 진통제. 음기를 잡지는 못해도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고통을 잊게 해줄 것이다.

“널 죽일 인간의 이름이다.”

「건방지구나, 죄인.」

더 나눌 대화는 없다.

순식간에 공정을 마친 알베르트의 검에는 선명한 검강이 맺혀 있었다.

「검인가, 좋지. 너희 죄인들은 항상 검을 좋아했지. 잠깐이라면 어울려 주마.」

악마는 손을 들었다. 오른손바닥에서 검은 쐐기가 솟아난다.

날카로운 형태를 갖춘 그것은 곧 검과 비슷한 날붙이가 되었다.

간격을 좁힌다. 선공에 나선 것은 알베르트였다.

녀석이 리치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검을 출수했다. 악마의 날붙이가 받는다. 검강을 띄우고 있음에도 베어낼 수 없다. 강도는 비슷하다. 이 날붙이만 그런 걸까.

시험해 보자.

허리, 따라온다. 어깨, 복부, 팔, 시선을 끌고 손목을 노린다.

카랑!

알베르트의 검이 튕겨졌다. 손목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반들거리는 빛이 떠올라 있다. 예측 당했다. 순간적으로 손목의 강도를 올린 거겠지. 악마는 재밌다는 듯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앞으로 치고 나온다. 무릎이 알베르트의 얼굴을 노린다. 빗나갔다. 피했다. 바람을 타듯이 알베르트는 몸을 물렀다. 악마의 옆으로 빠진 그는 검을 다잡았다. 옆구리에서 어깨를 베어낸다. 팔과 맞닿는다. 잘라낸다. 늦었다. 검강과 맞닿은 부분이 변해 있다. 손의 감각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알베르트는 몸을 돌렸다.

한 박자 늦게 악마의 팔이 떨어진다. 물컹한 대지가 터진다. 지면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꿀렁이는 피가 쏟아진다. 파고든다. 붉은 비를 맞으며 알베르트의 검이 쏘아졌다. 악마의 팔이 따라온다. 합이 늘어간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놈의 팔은 검우(劍雨)를 막아낸다. 뚫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아래를 노린다.

알베르트는 지면을 강하게 굴렀다. 물렁살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땅은 알베르트가 원했던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다. 내공과 맞닿은 땅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시야가 흐려진다. 순간적으로 사각지대가 생겨난다. 실수했다. 검을 든 알베르트의 몸에 충격이 달렸다. 일격은 팔, 이격은 각. 빙글, 검이 선회한다. 자세가 불안정하다. 몸이 붕 뜨듯이 날아간다. 짧다. 실리는 충격은 강하지 않다. 자세를 다잡는다. 놈은 따라오지 않는다. 다리를 회수한 놈은 흠, 하고 턱을 매만졌다.

「이상하군. 네놈의 움직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이번에는 신중하게 접근한다. 놈은 강하다. 보법을 익히지 못했다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일단 악마의 움직임을 간파하자. 상처를 쌓아가는 교전은 의미가 없다. 상처를 입힐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일격을 노린다. 악마가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을 노린다.

손에 익숙한 지팡이 검은 없다. 검집이 없다. 왼손을 앞으로 내민다. 거리를 잡는다.

붉은 지면이 꿀렁였다. 악마의 의지에 답하는 것 같다.

종이가 접히듯이 줄어든 땅은 악마의 몸을 밀어냈다. 쐐기가 쏘아진다. 악마의 체중이 실린 검은 정면에서 받아낼 수 없다. 담백한 움직임이다. 군더더기 없이 급소만을 노리고 있다. 미간, 턱, 목, 명치. 가슴. 검으로 흘려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손목에 실리는 부담이 강해진다. 쐐기와 검이 맞물리는 사이, 녀석이 입을 벌렸다.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검은 입에서 한 무리의 파리가 쏟아졌다.

창천검법 4장

화무

알베르트가 펼쳐낸 꽃잎이 파리 떼와 부딪혔다. 떨어지는 독기에서 몸을 무른다. 녀석은 독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운지, 떨어지는 파리 떼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왔다. 쐐기의 형태가 변화한다. 하나의 날이, 새의 발톱처럼 세 개의 날을 띄웠다. 맞받아칠 수 없다. 손 위로 드리워지는 날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뒤를 밟았다.

복부에 열상이 달렸다. 생각지도 못한 아픔에 알베르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오른손이 아니다. 변화한 것은 왼손이다. 촉수처럼 변한 다섯 손가락이 알베르트의 연미복을 뚫고 있었다.

촉수를 베어낸다. 떨어진 악마의 촉수는 검은빛의 피를 흘렸다. 바다에서 꺼낸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촉수가 뛰어올랐다. 손을 복부로 옮겨본다. 뼈밖에 없을 몸일 텐데, 연미복 위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느껴지는 통증을 보았을 때 상처는 깊지 않았다.

악마의 몸이 물결친다. 촉수로 변했던 왼손이 다시 손의 형태를 갖췄다.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의 피를 녀석은 입으로 가져갔다. 뱀의 그것을 닮은 3개의 혀가 피를 핥았다.

「아, 좋지. 공포의 맛. 이 몸이 무서운가, 죄인?」

“…….”

루미에르 교에서 말하기를, 악마는 인간을 현혹하는 괴물이라 했다. 녀석이 내뱉는 말에 흔들릴 이유는 없다. 알베르트는 검을 바로 잡았다. 악마의 입가에 떠 있는 미소가 짙어졌다.

쐐기가 길어진다. 뼈를 뽑아내는 것처럼, 손바닥 안쪽에서 녀석은 검은 쐐기를 뽑아냈다.

검이 아니다. 날이 3개로 갈라진 그것은 삼지창(Trident)이었다. 창끝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치고 나오는 놈의 속도에 반응했다. 어떤 환술이라도 걸려 있는 걸까? 쏘아지는 창끝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대처할 방법은? 없다. 우직하게 받아낸다. 공격할 틈이 없다. 이쪽보다 리치가 길다. 순간적으로 파고드는 수밖에 없는데, 그 움직임은 번번이 막혔다.

거리를 벌리면 창이 온다. 거리를 좁히면 창대에 밀려난다.

무엇보다 위협적인 것은 찌르기다. 찌르기를 의식하면 밑으로 들어오는 창을 피할 수가 없다.

경계해야 할 것은 삼지창만이 아니다.

놈의 입에서.

놈의 다리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생겨난다. 합이 늘어갈수록 상처가 늘어나는 것은 알베르트 쪽이다. 생각보다 내공의 소모가 심하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픔이 옅어서 큰 상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통증이 옅었던 이유는 진통제를 먹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치에 생긴 붉은 웅덩이를 보고 나서야 알베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악마는 무리하지 않는다. 삼지창의 리치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변수를 만들어 낸다. 검의 거리를 내주지 않는다. 아마 알베르트와 같은 무인과 싸우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 녀석은 무인의 싸움에 익숙했다. 손에 묻은 알베르트의 피를 맛보던 녀석은 지루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질렸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포기하지 않는 건 그 무기가 있기 때문인가?」

삼지창이 놈의 손바닥 안쪽으로 사라진다.

무기를 회수한 녀석의 주변에 검은 불꽃이 떠올랐다. 이 공격은 알고 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수다. 닿지만 않으면 된다. 복부의 상처를 한쪽 손으로 누른 알베르트는 내공을 확인했다. 괜찮다.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법을 운용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녀석을 쓰러뜨리는 것은 힘들겠지.

알베르트는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했다. 애초에 유피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이 정도면 녀석의 관심을 몽환기에서 돌리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적당히 상황을 보다가 퇴로를 확보하자.

「어디 얼마나 피할 수 있는지 볼까.」

작은 구슬이 만들어진다.

그 수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열 개가 넘는 구슬이 악마의 주변에서 떠올랐다.

“…….”

뒤를 생각할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첫 번째 구슬, 사출. 궤도를 읽어낸다. 반응한다. 지면에 떨어진 구슬에서 커다란 입이 형상화되었다. 하얀 이를 드러낸 입은 물컹거리는 땅을 먹어치웠다.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두 번째 구슬, 사출. 흔들거리는 지면 위에서 알베르트는 뛰어올랐다. 그 발치로 구슬이 떨어졌다. 무언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여유는 없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구슬이 동시에 사출된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다. 자세를 바로잡을 수 없다. 몸을 비튼다. 구슬이 머리 옆으로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나타난 혓바닥이 그의 두개골을 핥았다. 고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딱, 하고 머리 위에서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남은 구슬은 다섯 개.

아직 몸은 공중에 떠 있다. 재밌다는 듯 악마는 구슬을 쏘았다.

앞뒤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남은 내공을 전부 끌어낸 알베르트는 꽃을 피웠다.

여섯 개의 꽃잎이 구슬에서 나온 이빨 속으로 사라졌다. 전부 막아낼 수 없다. 마지막 남은 구슬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검을 던졌다. 구슬과 맞닿은 검은 녀석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지면에 떨어진다.

착지와 동시에 고개를 든 알베르트는 다가오는 악마를 볼 수 있었다.

주변을 확인한다. 이곳에서 벗어날 여유는 있는가? 알베르트의 의도를 읽은 것처럼 지면이 요동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살점의 벽을 만든 땅은 퇴로를 막았다.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밖에 없던 무기도 사라졌다.

주변에서 검을 대체할 만한 날붙이는 없다. 보이는 것은 붉은 피와 살점뿐이다.

혼란에 빠지지 말아라. 포기할 이유는 없다. 이 수를 타개할 방법을 차분하게 생각하자.

권기? 권강? 그는 시더 황자가 아니다. 능숙하게 다룰 자신이 없었다.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체술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검법의 보조다. 자신보다 강한 악마를 상대로는 의미가 없다. 애초에 부상을 안은 채로 완벽히 펼쳐낼 자신도 없었다.

결국에는 무기로 삼을 검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남은 무기라고는…….

「제법 재밌었다, 죄인. 특별히 그 목숨을 고통 없이 가져가 주마.」

무기라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다가오는 악마를 보며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칼자루에 있던 하얀 장식품이 눈을 떴다. 월아를 지키듯이 잠자고 있던 사희다. 감히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불청객을 향해 뱀은 입을 벌렸다.

“그대들이 꿈꿨던 시대는 이런 게 아니었지 않나.”

알베르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희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사안(蛇眼)에 빛이 돌아왔다.

그 눈에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는지, 알베르트는 알 수 없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낼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무덤 수호자다. 힘을 빌려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악몽을 보여줄 것인가. 만약 사희가 후자를 택한다면, 알베르트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해 준다면…….

“우리의 적을 쓰러뜨릴 힘을 빌려주게나, 사희.”

눈앞의 악마야말로 그들이 싸웠던 적이라는 확신이, 알베르트에게는 있었다.

뱀의 송곳니는 알베르트의 손등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아픔이 달린다. 일말의 통증을 느끼며 알베르트는 월아를 뽑았다.

「-!」

악몽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찬란한 은빛이었다.

알베르트의 손에서 월아는 신비한 빛을 내뿜었다. 빛을 본 악마는 눈을 찡그렸다. 그사이 알베르트는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검기도, 검사도, 검강도. 어떤 기운도 월아의 위에는 맺히지 않는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알베르트의 몸으로는 그 어떤 것도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어깨너비로 벌린 다리와 하반신으로 내려간 무게 균형. 물컹이는 지면 위에서 완벽하게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월아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펼쳐내는 동작은 하나. 억지로 떠올릴 필요도 없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반복한 그 자세는 눈을 감고서라도 완벽하게 펼쳐낼 자신이 있었다.

나뭇가지 하나로 시작했던 알베르트의 수련.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알베르트가 처음으로 배웠던 초식.

여기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정원이 아니다.

알베르트의 손에 잡혀 있는 것도 볼품없는 나뭇가지가 아니다.

일찍이 천마가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검이 알베르트의 의지에 답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무거운 몸과는 달리 뼈밖에 없는 손이 그를 잡아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세계도, 마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거목이다. 아아, 그렇다. 언제나 그의 수련에 어울려 주었던 바로 그 거목이다. 사부님이 남긴 세 개의 나뭇가지가 보인다. 거목에 박힌 나뭇가지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이야, 할 수 있겠느냐.』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법이다.

알베르트는 중원의 후예에게 그것을 배웠다.

지켜보기만 했던 노집사는 더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제 한 사람분의 무인이 된 청년은 검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는 거목을 꿰뚫었다.

머리가 뜨겁다.

알베르트의 위로 검은빛의 피가 떨어졌다. 눈앞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정체는 악마의 것이다. 신비한 빛을 내뿜은 달의 검은, 악마의 몸을 꿰뚫었다.

「이 힘은…….」

악마의 가슴을 꿰뚫은 월아를 뽑는다. 가슴에 생긴 상처가 은빛의 불에 휩싸였다.

상처가 재생되지 않는다. 녀석은 뚫린 가슴 쪽으로 손을 옮겼다. 은빛의 불과 맞닿은 손마저, 순식간에 타올랐다. 타오르는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며 놈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죄인.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알베르트 라나다.”

「이 몸의 이름은 마몬이다, 알베르트. 날 쓰러뜨린 죄인이라면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있지. 오늘은 꽤 재밌었다. 다음에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타오르는 몸과 함께 악마, 마몬은 웃었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던 얼굴이 불과 함께 녹아내리더니, 이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악마였던 잿더미를 내려다보던 알베르트는 월아를 지면에 꽂았다. 신비한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빛을 잃어버린 월아는 낡은 검이 되었을 뿐이다. 월아를 지팡이 삼은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몽환기는 어떻게 되었지?

몽환기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마기는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더 해야 할까?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도 모른다.

[마스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일단 후퇴를.]

‘뭔가 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나?’

[지금 마스터의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가 그렇게나 신뢰하는 유피에르를 믿으십시오.]

‘알았네. 자네의 말을 따르겠네.’

천칭의 말이 맞다. 월아를 검집에 수납한 알베르트는 복부를 쥔 채 소하 언덕에서 벗어났다.

붉은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의 살점 같던 지면이 평범한 땅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언덕에서 빠져나가는 알베르트의 머리 위로 커다란 나무를 본뜬 은보랏빛의 마법진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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