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양양 성 전투(4)
성벽 아래는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벨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사태는 한 치 앞을 다투고 있었다. 상비군은 물론이고 그를 호위하는 병력까지 전부 내보냈지만, 일대가 정리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양양 성을 지키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병력 대부분은 북부 전선에 나가 있었고, 이곳에는 최소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부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로버트.”
“부르셨습니까, 황자님.”
사태를 추이 하던 아벨은 로버트를 불렀다.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노집사는 이 소란을 앞에 두고도 침착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시종의 모습에 아벨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자신이 당황해서는 안 됐다.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지휘를 시작한다.”
“황자님의 명을 받듭니다.”
로버트는 몸을 숙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변화가 시작된다. 흘러나오는 마기에 반응하듯이 노집사의 귀가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가죽이 떠오르고, 그 위로 덧씌워지듯이 털이 생겨났다. 본신을 드러낸 로버트의 등에 아벨은 손을 얹었다.
감각이 확장된다.
양양의 동쪽 거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광경이 두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질렀을 정보를, 아벨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각 거리의 가게와 주요 광장, 비좁은 골목길과 번화가. 전황을 파악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 정보를 종합한 아벨은 마기를 운용해 각 부대에 명을 전달했다.
「1군단, 소요(小曜) 거리로 가거라. 집회장의 우측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3군단, 천하객잔으로 가거라. 서둘러라. 잔해 속에 한 아이가 묻혀 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4군단, 5군단. 동쪽 입구로 가거라. 싸움판이 커지고 있다. 신속히 제압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다행히 상황이 급한 내성 앞에는 신교가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선녀의 모습은 이곳에서도 보인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신교의 파수꾼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시간을 버는 것은 가능하겠지.
감각이 멀어진다.
양양 거리에서 벗어난 아벨은 다시 성벽 위로 돌아와 있었다.
“로버트?”
“죄송합니다, 황자님.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 힘이 부치는군요.”
박쥐를 닮은 귀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로버트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호흡이 거칠다. 그의 숨소리가 깔끔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아벨은 그의 등에서 손을 뗐다. 너무 부담을 준 모양이다. 노쇠한 로버트의 몸은 아벨의 생각보다 더 약해져 있었다.
초감각. 통칭 통견원문(通見遠聞)이라고 불리는 이 힘은 로버트가 다루는 본신의 능력이었다.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 능력은 아니다. 마족이라면 누구나 가진 힘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마기를 뿌려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하는 힘이다. 단지, 로버트는 그 힘이 다른 마족에 비해 몇 배는 더 뛰어났다.
“쉬어라.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아벨은 거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을 곳곳까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흐름을 이곳에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2군단. 좌측으로 움직이면 노점상이 모인 거리가 보일 것이다. 불이 다른 건물에 붙기 전에 진화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6군단. 그곳이 마무리되면 샛길로 들어가라. 안쪽의 상황은 처절하다. 조심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지휘를 이어가던 아벨은 문득 성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말의 마기가 느껴졌다. 폭주하는 마족이 내성으로 들어온 것 같다.
“로한, 침입자가 있다. 동문으로 내려가라.”
“무진 대장님은 저에게 황자님의 경호를 맡기셨습니다.”
호위병 중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검수는 아벨의 명을 거절했다.
함께 움직이던 다른 동료들은 그의 곁에 없었다. 조금 전처럼 아벨의 명에 따라 양양 거리로 투입됐기 때문이다. 그마저 자리를 비운다면, 아벨을 지키는 이는 노집사가 마지막이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아라. 동포들이 없으면 그깟 황자가 무슨 소용이냐.”
“그건 저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직한 소리를 올리는 로한에게 황자는 코웃음 쳤다.
“그럼 내가 갈까?”
“…….”
그건 곤란하다. 로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어두운 성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폭주하는 주민을 제압하고 오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빠르게 해결하고 오면 괜찮을까?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는 이내 두 손을 모았다.
“알겠습니다, 황자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한이 서둘러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아벨은 로버트를 보았다. 꽤 상태가 회복되었는지, 호흡이 안정되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재차 본신을 드러내는 로버트를 아벨은 제지했다.
“기다려라. 뭔가 또 들어왔다. 이번에는…….”
꺼림칙한 기운이 서쪽 문에서 느껴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제 남는 손은 없다. 로버트를 보낼 수는 없다. 느껴지는 기운은 약한 편이 아니다. 그를 보냈다가는 역으로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서쪽 성벽 위에는 낯익은 은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진이다. 은빛 실이 흐르는 것처럼 은은하게 퍼진 마법진은 그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마, 로버트. 여기는 맡기겠다.”
“전권을 제게 위임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지. 날 곁에서 지켜본 자네라면 충분해. 이곳에 남아 잔불을 꺼뜨려라.”
자리에서 일어난 로버트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거리는 관병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는 소란과 진정되는 소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수월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자님. 하지만 서쪽 거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쪽을 해결하러 가는 것이니. 여기가 마무리되면 서쪽 성벽 위에서 보지.”
로한이 타고 간 계단을 쓸 생각은 없다. 도보를 이용하면 제 시간에 맞춰 도작할 수 없다.
아벨의 발치에서 얼음길이 생겨났다. 하늘 위에 길을 만든 그는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서쪽 성문으로 향했다.
성으로 들어온 침입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소한 빵 냄새는 그들이 어디를 가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서쪽 성벽을 올라가는 침입자들은 하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잠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제발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저 의복을 고집하겠지. 아벨은 알고 있었다. 인상적인 하얀 옷은 루미에르 교의 신복이었다.
아벨 황자의 모습을 본 침입자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용무 말씀입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주실 건가요?”
아벨의 목소리에 모노클을 쓴 이지적인 남자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말투가 어색한 것은, 분명 마법의 힘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인족은 마족의 언어를 알지 못했으니까. 이 남자는 루미에르 교의 신관이 아닌 것 같다. 사제들이 흘리는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것은 고소한 빵 냄새뿐이다.
“너는 집에 들어온 도둑놈을 도와주는 주인을 본 적이 있느냐?”
“도둑이 어떤 물건을 노리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겠습니까? 가령 몸 안쪽을 파고드는 독 같은 것 말입니다.”
“재밌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유머 있는 남자는 피곤하다니까요.”
신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무언가 위험한 기류를 읽었는지 그들은 품 안에서 스크롤을 챙기고 있었다.
“인족, 하나만 물어보지. 이 소란은 너희들이 일으킨 거냐?”
“그건 저희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닙니까? 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마족?”
남자의 대답을 들은 아벨의 주변에서 빙창이 떠올랐다.
이들은 이 소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혹은 알고 있더라도 대답해 줄 마음이 없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네 시체에 물어봐 주마.”
빙창이 쏘아졌다. 쇄도하는 빙창을 본 남성은 검을 뽑았다. 그 위로 푸른 기운이 떠올랐다.
뚜렷한 형상을 가진 기운은 검강이 되었다. 남자는 아벨이 던진 빙창을 단칼에 베어냈다.
키리릿, 하고 빙창이 깨져나갔다. 아벨이 손을 들었다. 떨어지는 파편을 제어한다.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작은 빙창들이 방향을 바꿨다. 추락하던 빙창들은 사제들을 향해 쏘아졌다.
“실드(Shield).”
마나가 달린다. 검강을 뽑은 남성의 뒤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아벨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파편은 막을 뚫어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마법까지 다루는 모양이다.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후작님?”
“저 괴물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들 놈은 혼자입니다. 신성력으로 제압하면….”
“축복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무슨 신성력이 있다는 겁니까? 카리스 님의 스크롤이나 준비해 주시죠. 아예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여기서 이만 물러납시다.”
“하지만 유산이 눈앞에 있습니다.”
후작이라 불린 남자는 미련을 못 버리는 사제를 향해 말했다.
“성녀의 유산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 소식을 갖고 교단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합니까? 전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
반박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제는 준비한 스크롤을 찢었다.
빛무리가 쏟아진다. 마나가 발현한 것을 본 아벨은 살짝 몸을 뒤로 물렀다. 마법은 위험하다. 일찍이 그들의 선조가 패배했던 까닭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기술 때문이었다. 환한 빛무리가 사라졌다.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조심스럽게 빛 안쪽을 엿보던 아벨은 실소를 흘렸다.
“실수했군.”
사라진 빛무리 안에서는 침입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기를 방출한다. 성 안에서 놈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벨은 잠시 갈등했다. 녀석들이 사용한 것은 분명 공간이동이다. 마계 내에서는 공간이동 마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마법을 사용하는 이가 적은 까닭도 있지만, 지옥과 중원이 부딪친 이후로 세계 자체가 불안정해진 까닭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공간의 틈새에 끼여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렇기에 단거리밖에 뛰어넘을 수 없다. 많이 날아가 봤자, 성 밖이 한계이지 않을까.
추적할까.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감히 이곳까지 들어온 인족을 사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문과 양양 거리, 그리고 성벽 위에서 떠오르는 마법진을 본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인족이 아니었다. 하나라도 더 많은 동포를 구하는 것. 그게 황자인 자신의 책무였다.
아벨은 기침을 터뜨렸다.
힘을 쓴 반동일까, 손바닥 안에는 한 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이 몸은 계속 말썽이군.”
피를 훑어내듯이 손을 턴 그는 서쪽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는 마녀가 있었다.
발치에서 떠오른 마법진에서는 은빛의 마나가 달리고 있었다. 시작된 마법진은 이제 하나의 원을 그렸을 뿐이다. 완성된 마법진이 열 개의 원을 갖추는 걸 보았을 때, 마녀가 그리는 마법진은 양양 성 전체를 삼키고도 남지 않을까.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대단위 마법이 준비되고 있었다.
“연회 준비는 끝난 거야, 변태 오빠?”
아벨은 동생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그녀는 여유를 머금고 있었다.
시간은 정말로 신기한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동생의 모습이다. 현자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던 아이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벨은 가슴 한편에서 올라오는 아픔을 누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걸 찾는 거냐.”
“어머, 환영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야.”
“이 사태가 정리되면 언제든지 준비해 주마.”
아벨은 서쪽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쪽은 동쪽 거리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무진이 병사들을 데리고 사태를 진압하고 있었지만, 이 혼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성문 앞에는 황림당의 무인들이 보였다. 보수되지 않은 성문은 움직이지 않을 터이다. 그들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침입을 막기 위해 방책을 만들고 있었다.
이 사태를 진압하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다.
내성문 앞에는 아직도 선녀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신설교의 선녀, 소망.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을 아벨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저 지나가는 불길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해결할 수 있겠느냐, 유피.”
“해결하지 못하면 양양은 끝이야. 혹시 모르니까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게 어때?”
“너도 같이 간다면 생각해 보마.”
“바보 아니야? 내가 왜 오빠랑 같이 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다. 아벨은 성벽으로 올라오는 로버트를 확인했다. 숨이 거칠어진 노집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필요했다.
“새벽이 다가오는군.”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양양은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외성 너머, 소하 언덕에서는 불길한 붉은 안개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