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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양양 성 전투(3) (6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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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성 전투(3)

에일린은 성벽 아래에서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실프와 운디네의 장난에 어울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성벽을 타고 알베르트가 내려왔다.

“특별한 일은 없었던 모양이네.”

“성벽은 왜 올라갔다 온 거야?”

“이 사태를 도와줄 사람을 보고 왔어.”

“?”

에일린은 까마득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위에 누가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소하 언덕으로 바로 갈 거야.”

“시간이 없는 건 너 때문이잖아.”

알베르트는 발을 옮겼다. 그 뒤를 에일린이 따라붙었다.

거리는 여전히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섞인 주민과 관병들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상황이 급박해 보이는 곳에 한해 손을 썼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이들을 전부 챙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에일린은 생각 외로 든든한 조력자였다.

뛰어난 정령사인 동시에 활을 다루는 그녀는 알베르트와 합이 잘 맞았다. 전방을 담당하는 알베르트의 등을 완벽하게 보좌한다. 주변을 떠다니는 실프가 그녀의 눈을 대신하고, 화살의 방향을 제어한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꺾인다. 되돌아온 화살은 날아오르는 마족의 날개를 꿰뚫었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마족의 의식을 빼앗은 알베르트는 에일린을 돌아보았다.

“활 솜씨가 뛰어나네.”

“이 정도는 기본이야.”

후위를 봐주는 사람이 생겼을 뿐인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임의 폭이 넓어졌다. 주변 상황을 마무리 지은 알베르트는 에일린의 안내를 따라 양양 바깥으로 향했다.

거리의 상황은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미쳐 버린 마족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마족도 있다.

지인이나 가족인 걸까.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마족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딸을 향해 손톱을 뻗는 어머니의 뒷목을 알베르트는 가격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여인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딸을 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쓰러진 어머니를 보호하듯이 그 앞에 섰다.

“어, 엄마에게 무슨 짓이야!”

“…….”

어머니를 상대할 때는 본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녀의 얼굴에 비늘이 떠올랐다.

당황한 알베르트 앞으로 에일린이 다가왔다. 두 정령이 소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운디네가 꽉 쥔 소녀의 주먹 위로 올라갔다. 실프의 날개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정령의 모습에 경계심이 풀린 건지, 소녀의 얼굴에서 비늘이 사라졌다.

“이름이 뭐니?”

“아젤.”

“예쁜 이름이네. 그래, 아젤. 왜 엄마하고 싸우고 있었던 거니?”

“싸운 적 없어. 엄마가 아파서 돌봐주고 있던 거야.”

에일린은 몸을 숙였다.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소녀와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프시다고? 약은 있고?”

“없어. 의원 아저씨도 안 보여.”

“음, 아젤은 내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알고 있어.”

에일린의 집회장의 위치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엄마를 업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기 전에 가렴. 가서 에일린이 보냈다고 하면 엄마를 낫게 해줄 거야.”

“알았어. 고마워, 언니!”

본신을 드러낸 아젤은 가뿐하게 어머니를 업은 채 걸음을 옮겼다. 집회장으로 향하는 소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일린은 나이아스를 소환했다. 그녀의 앞에 떠오른 나이아스는 아젤의 뒤를 따라갔다.

“시간이 없던 거 아니었나?”

“그렇다고 아이를 두고 갈 거야?”

거친 대답이었으나,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에일린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그녀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양양의 외벽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

거리를 거의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외성의 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게 닫힌 내성의 문과 달리 외성의 문은 열려 있었다. 대신 문 앞쪽에는 임시로 쌓아둔 물건이 가득했다. 방책이다. 안쪽의 마족이 바깥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아둔 것처럼 보였다.

성문 근처에서는 누런 옷을 입은 사내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주변에서 다가오는 마족들을 그들은 능숙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시선을 끌고, 다른 사람이 뒤를 잡는다. 본신이 드러난 부분에 따라서 다르지만, 하나같이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알베르트의 기억에 있는 마족들이었다.

황림당의 무인이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남자는 늑대 가죽을 목에 두르고 있는 카일이었다.

쿵, 하고 황림당이 쌓고 있던 방책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벌어진 틈을 메꿀 시간은 없었다. 단 두 번의 충격에 방책이 무너졌다. 성문 바깥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거미였다.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리가 무너진 방책을 짓밟고 들어온다. 당장 나설 수 있는 황림당의 무인은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서 내려온 마족을 상대하던 카일이 거미의 앞쪽으로 뛰어들었다.

“에일린!”

“알고 있어!”

카일의 검에서 검기가 떠올랐다. 거미의 앞다리를 받아내는 그 옆으로 알베르트가 합류했다.

“자네는……?”

“대화는 이 녀석을 해결한 후에 하지.”

딸칵, 딸칵.

거미의 다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 수는 모두 여덟 개다. 전부 받아내는 것은 무리다. 차례대로 놈의 다리를 끊어내자. 검기, 베어내지 못한다. 다리의 강도는 생각보다 더 튼튼하다. 검사, 효과가 있다. 검에 베인 다리에서는 푸른 피가 흘러나왔다.

[아라크네(Arachne)의 피는 독입니다, 마스터!]

천칭의 경고에 반응한다. 그러나 늦었다. 흘러나온 피 몇 방울이 연미복에 닿았다.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 안티 포이즌 마법이 걸려 있음에도 연미복의 끝자락이 녹아내렸다. 좋지 않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쐐액, 하고 화살이 아라크네의 눈으로 떨어졌다. 에일린의 화살이다. 거미는 미처 눈꺼풀을 닫지 못했으나, 화살은 눈을 뚫지 못했다. 아라크네의 눈이 위로 돌아간다. 화살을 쏜 에일린은 건물 위에서 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조여졌다.

“윈드 에로우(Wind Arrow).”

바람의 가호를 받은 화살이 재차 거미의 눈을 노렸다.

귀찮다는 듯 아라크네의 발이 올라간다. 날아오는 화살이 발에 막힌다. 커다란 동체가 앞으로 나아간다. 에일린이 있는 건물로 거미는 뛰어올랐다.

“무슨!?”

에일린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아라크네의 몸이 건물을 무너뜨렸다.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알베르트는 낚아챘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벽을 밟고, 건물의 잔해로 뛰어오른다. 탁탁, 하고 두 번의 디딤을 마친 알베르트는 간신히 자리에 착지했다.

“고, 고마워.”

성문 안쪽으로 들어온 아라크네는 멈추지 않는다. 제법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이는 카일로도 무리다. 황림당의 무인들이 모두 달라붙으면 모를까, 적은 거미만이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몇 되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검에서 검강이 떠올랐다. 가슴 안쪽이 당겼다. 통증은 크지 않았다. 되도록 힘을 아끼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신속하게 끝낸다.

아라크네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놈의 눈이 알베르트를 확인했다. 다리 한 개가 알베르트의 몫으로 떨어진다. 검강과 거미의 다리가 맞닿는다. 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흡사 쇠를 베어내는 감각이 손에 달렸다. 초록빛의 독이 흩날린다. 다리 한 개가 잘렸음에도 놈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는다. 다리를 하나 더 가져온다. 아라크네가 비명을 질렀다. 알베르트를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인 녀석의 다리가 일제히 쏟아졌다. 놈의 판단은 옳았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창천검법 5장

쇄천

한 번의 휘둘림,

일순간 남은 여섯 개의 다리를 잘라낸 알베르트는 떨어지는 놈의 본체로 뛰어올랐다. 녀석의 머리에 알베르트는 검을 찔러 넣었다.

「----!」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아라크네의 피로 뒤범벅이 된 검을 회수하는 건 포기한다. 녹아내리는 검은 이미 사용할 수 없었다. 움직임을 멈춘 아라크네의 몸에서 알베르트는 내려왔다. 지독한 독기다. 흘러내리는 피가 지면을 녹이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았군. 고맙네. 그러니까…….”

“알베르트. 알베르트 라나네, 카일.”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가 아직이었다.

가볍게 악수를 한 카일은 황림당의 무인들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아라크네가 넘어온 방책이 메꿔진다. 무너진 방책을 다시 쌓기 위해 그들은 건물의 잔해를 옮기기 시작했다.

“알베르트!”

에일린의 경고에 알베르트는 뒤에서 다가오는 웨어울프(Werewolf)를 보았다.

알베르트는 몸을 숙였다. 그 위로 녀석의 손톱이 지나갔다. 야수를 닮은 눈에서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팔을 넘긴 알베르트는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검은 없다. 녀석의 발 안쪽으로 다리를 넣는다. 안쪽 발과 함께 어깨를 동시에 민다. 균형이 무너진다. 발라당 뒤로 넘어진 놈의 얼굴 위로 발꿈치를 먹였다. 힘이 부족했던 걸까. 웨어울프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두 손을 든 놈은 알베르트의 발을 잡았다.

늦는다. 녀석의 손톱이 연미복 안쪽으로 파고드는 순간, 활대가 머리를 내려쳤다.

발을 잡은 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시선을 돌리자 활을 내려친 에일린이 보였다.

“빚은 갚은 거야.”

“…….”

꽤 믿음직한 후위였다.

웨어울프를 쓰러뜨린 알베르트는 주변을 확인했다.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다. 다가오는 마족도 보이지 않고, 방책을 쌓는 일도 수월하게 이뤄지고 있다. 소하 언덕으로 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하니, 방책이 완성되기 전에 나가는 편이 좋겠지.

“바깥으로…….”

그 순간이었다. 거리의 풍경이 물결치는 것처럼 흔들렸다.

풍랑을 만난 어선 같다. 일순간 시야가 무너지고 거리의 광경이 일그러진다. 극심한 현기증에 알베르트의 몸이 꺾였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몸 안쪽의 내공이 강한 자극을 받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진정시킨다. 갑자기 활성화된 내공을 달래고, 온전하게 혈도를 달리게 만든다. 내공이 가라앉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알베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충격을 받은 건 그만이 아니었는지, 황림당의 사내들이 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건 옆에 있던 에일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착각이 아니다.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처럼 지나갔다.

“괜찮아?”

“으, 아…….”

입가를 훔치는 에일린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등을 두드린다. 그녀는 두세 번 더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이건, 이건 아니야. 몸 안의 마기가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잖아. 반쪽인 내가 이럴진대, 너는…….”

“…….”

이것도 몽환기 때문인 걸까. 소하 언덕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괜찮은가?”

“고맙네, 알베르트. 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못하군.”

몸을 수습한 카일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무공이 뛰어난 그도 이 모양이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황림당의 무인들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에일린을 보았다. 그녀도 몸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상 같이 가는 것은 무리다.

“이 문을 통과하면 소하 언덕이 나오는 게 맞는가?”

“소하 언덕 말인가? 나오기야 하겠지만 그곳은 왜…….”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에일린. 선녀님에게 돌아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선녀님의 명을……. 우욱.”

“내 말대로 해. 지금 너는 짐밖에 안 돼.”

“…….”

만약 소하 언덕에 그 악마가 있다면, 에일린의 존재는 독밖에 되지 않는다.

녀석과 검을 겨루면서 에일린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실프와 운디네가 눈앞에서 날아오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았어. 뒤는 부탁할게.”

“고생했어. 선녀님에게 안부라도 전해줘.”

“그건 네가 말해.”

“내가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오늘은 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교의 선녀인 그녀와 알베르트가 사적인 자리에서 만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곳에서의 일이 끝나면 낙양의 신당(神堂)으로 향할 거야. 선녀님은 네게 흥미가 있어 보였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언젠가 들었던 도시의 지명이다. 에일린은 품속에서 흑백이 섞인 나무패를 꺼냈다.

“받아.”

“이건?”

“낙양에 도착하면 신당에 와서 이 패를 보여. 그럼 신도들이 널 맞이할 거야.”

“…….”

패를 연미복 안쪽에 챙긴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낙양에 가게 될 일이 생긴다면, 그때 한번 찾아가 보자. 아직 선녀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황림당의 무인에게서 검은 넘겨받은 알베르트는 방책을 넘어 문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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