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양양 성 전투(2) (68/200)

 # 68

양양 성 전투(2)

용하 거리에서 빠져나온 알베르트는 혼란에 빠진 양양을 볼 수 있었다.

무진의 말이 맞았다. 거리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과 바깥에서 뛰놀 것 같은 아이들도. 허리를 펴지 못하는 노인들도. 단장한 여인들마저. 어설픈 본신을 드러낸 채 서로를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장난치는 주먹다짐이 아니다.

주먹을 쥔 것은 일반인이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웬만한 쇠붙이보다 강했다.

그것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어디를 가도 비명과 고함밖에 울리지 않는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제압하는 것도 힘들다. 착란에 빠진 마족들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움직였다. 그 눈 속에서 불타오르는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광기였다.

혼란이 계속되는 거리를 올라간다. 알베르트는 집회장에 생긴 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집회장과 용하 거리를 나누듯이 만들어진 울타리는 내성문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교 측의 파수꾼들이 준비한 걸까? 그렇다면 선녀는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울타리를 향해 달려든 마족들은 파수꾼에 의해 제압당했다.

다가오는 알베르트를 확인한 울타리 안쪽에서 작은 정령들이 떠올랐다. 푸른빛과 녹색빛의 정령. 운디네와 실프다. 운디네가 자아낸 수환을 실프가 날려 보냈다.

날아오는 수환을 본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수환이 검신 위를 스쳤다. 틀어진 수환은 알베르트의 뒤를 쫓아오던 마족들과 부딪혔다.

“한 명, 통과했습니다!”

“선녀님을 지켜라!”

알베르트도 광기에 삼켜진 마족이라고 보고 있는 걸까?

이해한다. 현재 그의 모습은 스켈레톤이다. 그런 오해를 사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잡는 파수꾼들을 본 알베르트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위다!”

“에일린!”

“맡겨줘!”

파공성이 들렸다.

한 줄기의 화살이 알베르트의 얼굴을 노리고 쏘아졌다.

창천검법 4장

화무

피어오른 꽃잎 앞에서 화살이 튕겨 나갔다. 연약한 꽃잎은 지지 않았다. 활짝 핀 봉우리는 알베르트를 겨냥한 창을 막아냈다.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온 알베르트를 파수꾼들이 포위했다. 드리워진 창을 보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잠깐…….”

“손을 거두세요. 적이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선녀님.”

알베르트가 말할 것도 없었다.

파수꾼들 안쪽에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녀의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두 손을 모았다.

“선녀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여.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절 아십니까?”

“아뇨. 저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달토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절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선녀를 알베르트는 가만히 응시했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없다. 이 소란 속에서 선녀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신복(神服)에 묻은 핏자국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호위를 맡은 파수꾼의 피일까, 이곳에 돌입하려 했던 마족의 피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말끔했던 신복의 밑자락은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이 혼란은 당신을 노린 걸지도 모릅니다. 짚이는 바는 없습니까?”

“절 말인가요? 아닙니다. 이 소란은 절 노린 게 아닙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그럼 아벨 황자님을 노린 겁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군요, 란. 이 혼란은 누구 한 사람을 노린 게 아니에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지금 고통받는 이들은 누구인지. 파수꾼 형제들의 보호를 받는 저라고 생각하시나요? 성벽 위에서 이 소란을 막기 위해 지휘 중인 아벨 황자님인가요?”

선녀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 상황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는 당연히 양양의 주민들이었다.

“마족 전체를 노린 공격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적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주적이죠.”

“주적?”

“이게 제국의 짓이라는 말인가요, 선녀님? 녀석들이 드디어 움직인 건가요?”

알베르트의 반문에 대답한 것은 선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호위를 맡고 있던 한 파수꾼이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인족이 아니에요.”

선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누가 우리의 주적이라는 말입니까, 선녀님?”

“당신은 이미 그게 누군지 알고 있어요, 란. 저한테 대답을 갈구할 필요가 없어요.”

알베르트는 용하 거리 안쪽에서 만난 악마를 떠올렸다.

괴물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던 사악한 존재였다. 적이라는 것은 역시 그 악마를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녀석을 쓰러뜨리면 이 사태가 끝나는 것일까?

“가세요, 란. 이 혼돈을 만들어낸 것은 소하 언덕에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죠. 천지신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아직 당신의 실력으로는 승리를 점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

그 말대로다.

만약 이 사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그 악마라면, 알베르트로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다. 그가 본 것은 단편적인 힘뿐이다. 검기로는 합을 나눌 수 없다. 최소한 검사, 혹은 검강은 되어야 악마의 몸에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의 음기를 확인해 본다. 음기는 진정되지 않는다. 조금 전 검사를 끌어올린 탓이다. 두근거리듯이 뛰어오르는 음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상처를 안고 과연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품 안에서 약통을 꺼낸 알베르트는 손가락을 넣었다. 몇 개의 환약이 손끝에서 흡수되었다.

선녀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녀는 작은 입술로 손가락을 옮겼다. 살짝 깨문 엄지 위로 붉은 피가 맺혔다.

“실례할게요.”

“선녀님?”

선녀의 손이 알베르트의 허리춤에 있던 검에 닿았다.

월아. 하얀 뱀 장식이 달린 칼자루를 만진 그녀는 알베르트에게서 떨어졌다.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가는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승리의 주문이에요. 그리고…….”

파수꾼을 돌아본 선녀는 입을 열었다.

“에일린 나이트워커.”

“말씀하세요, 선녀님.”

“란의 힘이 되어주세요.”

“선녀님의 명을…… 네?”

선녀의 부름에 앞으로 나온 파수꾼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알베르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록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혼혈 마족. 에일린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운디네와 실프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정령들의 합공이 눈에 익다 싶었다.

“잠시만요. 그러면 선녀님의 경호는 누가 맡는다는 겁니까?”

“여기에는 흑토 분들이 계십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말이 아닌 걸 알지 않습니까.”

“에일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에일린을 향해 선녀는 손을 들었다.

“제 몸은 저 혼자서도 지킬 수 있습니다. 전 만지면 부서지는 물건이 아니에요.”

“하지만 선녀님.”

“에일린.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습니까?”

“그야 저는 선녀님을 위해서…….”

“절 위해서 움직이지 마세요. 천지신명을 따르는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일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선녀의 뜻은 완고했다. 이렇게 시간을 흐르는 와중에도 다른 형제들은 동포를 제압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선녀님의 뜻이라면.”

“제 뜻이 아니라니까요.”

면사 아래로 드러난 선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절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동포들이 더는 고통 받지 않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선녀님.”

에일린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머리에 선녀는 손을 얹었다.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자.”

“달토끼님께서 당신의 길을 인도하시길.”

의식을 끝마친 에일린은 자리를 뜨는 알베르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선녀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서둘러야 했다.

울타리에는 아직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부상자들이 가득했다.

*&*

“그래서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는 거야?”

“알베르트 라나야.”

“란? 사군자의 난이야? 특이한 성이네.”

흥, 하고 에일린은 코웃음을 쳤다.

뭔가 신선한 모습이다. 알베르트의 기억 속에 있는 에일린은 항상 침착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풍부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긴 그건 숲에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에일린의 원래 성격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무인이라는 건 알겠어. 그러니까 선녀님도 당신과 함께 가라고 말한 거겠지. 하지만 나와 같이 움직이게 된 이상…….”

알베르트는 에일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날아오는 비둘기를 보고 있었다. 낯익은 전서구였다. 살아 있는 전서구가 아니다. 잘 보면 섬세하게 만들어진 인형이다.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낀 전서구는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성벽 위쪽에서, 별무리가 지는 은빛이 보인 것 같았다.

“잠깐. 듣고 있는 거야, 당신?”

“잠시 들릴 곳이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거야?”

“성벽 위를 들렀다 갈게.”

“성벽?”

에일린은 양양 성의 성벽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도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에일린의 반응은 정상적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곳을 올라갈 수는 없겠지.

실프와 운디네가 있지만, 두 정령의 힘을 빌려도 올라가기 힘든 모양이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알베르트는 성벽을 밟았다. 벽면을 타고 그는 수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에일린은 중얼거렸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

밤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야심한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은 모두에게 차가웠다.

무너져가는 양양 성의 성벽 위에서 마녀는 혼란에 빠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피.”

성벽을 타고 올라온 알베르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피가 돌아본다. 차오르는 만월 아래에서 은빛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고양이를 닮은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 외로 집회가 재밌었나 봐. 그렇지, 알?”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 표정 관리 좀 해. 양손에 꽃이 가득했잖아.”

“유피.”

아무래도 그녀는 알베르트가 기녀들과 노닥거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말했잖아. 내가 바라보는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느닷없이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유피는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알베르트는 성벽 아래의 광경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 밤은 달이 밝다. 혼란에 빠진 상황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내성문 앞은 신교의 파수꾼들이 막고 있었다. 울타리로 다가오는 마족의 수는 적지 않다. 자신의 마기에 홀린 마족들은 끝도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다른 거리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병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는 있었지만, 이 소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 같다. 불이 치솟는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거리를 먹어치웠다. 혼란이 가중된다. 불길 아래에서 드러난 마족들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갑각과도 같은 비늘로 상대방의 주먹을 막고, 이빨로 머리를 물어뜯는다. 팔꿈치에서 솟아난 뿔이 상대방의 무릎을 꿰뚫고, 움직임을 막았다. 자리에서 쓰러진 마족은 절뚝거리면서도 상대방의 다리를 잡아 뜯었다. 이제는 둘 모두 지면에 서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흙탕 같은 사투는 멈추지 않는다. 바닥을 기어간 둘은 자유로운 손과 입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둘의 사투는 사태를 보고 달려온 관병들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것이 몽환기의 힘이야.”

“몽환기?”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실망인데.”

성벽 아래에서는 끔찍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상황을 관망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녀석은 지금 양양에 지옥도를 재현했어. 놈들을 강림시킬 길이 없으니, 그 통로를 우리 동포로 대체한 거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모르겠다면 그걸로 됐어. 알이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혼자서 납득한 유피는 양양 너머에 있는 소하 언덕을 바라보았다. 붉은 안개로 둘러싸인 언덕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몽환기를 부수면 이 소란을 해결할 수 있을까?”

“부순다고? 네 힘으로는 몽환기를 부술 수 없어. 내가 말했잖아. 몽환기는 마도구 중에서도 최상위로 분류되는 마도구야. 그런 마도구를 우리가 왜 부수지 않고 사당에 봉인했겠어? 그건 말이야, 알. 부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피의 피가 아니면 열리지 않던 보관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봉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부탁이 있어.”

“부탁은 받지 않아.”

곤란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알베르트는 괜스레 즐거워졌다.

“말했잖아. 명령해, 유피.”

“알베르트 란.”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나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실패한 모양이다.

“이건 지금까지의 일과는 달라. 마족의 일이야. 네 의사를 무시하고 내 멋대로 끌어들여도 되는 일이 아니야. 인간인 네가, 우리 마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거절해도 좋아. 네가 우리 사정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어.”

황녀인 유피에르 바토리는 알베르트의 처지를 생각해 준 것 같다.

인간과 마족은 적대적인 관계다. 마족의 위기에 인간이 손을 뻗을 이유는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알베르트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오히려 여기서 마족의 수가 줄어드는 걸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생각이리라.

“우리는 적이니까.”

그 말대로다.

알베르트는 마족의 적이다.

마족은 제국의 적이다.

사랑하는 아가씨의 목숨을 빼앗고, 더 나아가 가족이라 부를 수 있었던 루드비히 가문의 사용인들을 죽인 증오스러운 적이다.

그런 적을 살리기 위해서 왜 알베르트는 나서려고 하는 걸까.

여기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죽는다면, 루드비히 가문의 참사가 일어날 확률이 더 멀어질지도 모르는데. 혹여라도 다 죽어 버린다면, 아가씨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들을?

『아이야. 네가 본좌의 제자가 된 시점부터 너는 천마신교에 적을 둔 무인이다. 더는 천마신교가 남아 있지 않지만, 너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의무를 다할 것. 천마신교에 적을 둔 무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사부님이 말했던 의무 때문에 그는 움직이고 있는 걸까? 증오스러운 마족들을 구하기 위해서?

증오스러워?

알베르트는 무심코 자신이 귀화루에서 알게 된 세 여인을 떠올렸다.

가슴이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던 가희.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가 예쁜 기녀다. 그녀는 밑천을 모아 양양에 객잔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가슴과는 반대로 얼굴이 귀엽던 호접희는 뛰어난 무희였다. 그녀는 이상한 취미를 가진 남자들이 주로 지명한다고. 알게 모르게 불만을 털어놓고는 했다. 만약 자신이 은퇴하게 된다면, 그녀는 소민이처럼 작은 잡화점에서 계산대를 보는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송이는 두 언니와 함께 지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혼혈 출신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이미 현실을 알아버린 그녀의 바람을 다른 기녀들은 미소로 받아들였다.

알베르트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 여인들이 정말로 그 증오스러운 마족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들이 정말로 루드비히 저택의 사용인들을 죽이고, 아가씨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적어도 그녀들은 잔혹한 수를 쓰면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마족이 아니었다.

기녀들만이 아니다.

이곳의 수비대장인 무진은 어떠했는가?

서로 주먹을 나눈 알베르트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무인의 길을 걷는 걸 바라는 마족이다. 곧은길을 걷는 그가 잔인한 마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황림당의 무인들은 어떠했는가?

한량과 같은 짓을 했던 그들이었지만, 적어도 무인이 걷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며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 했다. 그런 자들이 인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건가?

생각해 보자. 집회에 모인 마족들만 해도 그렇다.

다들 소중한 가족이 있고, 가슴에는 아픔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 정도는 갖고 있겠지. 선녀를 향해 호소하던 그 모습은, 면죄를 바라며 성녀를 외치던 제국의 인간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머릿속이 깔끔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마족은, 알베르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끔찍한 적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유피에르 바토리만이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마족도 그와 똑같았다.

‘그렇군.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야기였어.’

[무엇이 말입니까?]

‘마족은 인간이네. 저주를 받았을 뿐이야.’

[뭘 당연한 걸 말하고 있는 겁니까, 마스터?]

‘그러네. 당연한 거였어. 나는 왜 그런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걸까?’

대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단지, 알베르트는 그 사실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서운하네.”

“뭐?”

“유피는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어? 마족이 죽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인간이라고?”

용하 거리의 광장에 있던 이들을 보고 알베르트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마족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는가? 이 일로 아가씨를 구할 수 있다고 기뻐했는가? 아니, 다르다. 그는 괴로워하는 마족을 보고 분노했다.

“적어도 내가 본 마족들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어. 나는 동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못돼먹은 인간이 아니야.”

“…….”

이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믿는다.

마족은 적이다. 하지만 모든 마족이 제국의 적은 아니었다.

“나랑 함께하더니 진짜 마족이 되어 버렸구나. 그러다가 제국에게 버림받는 거 아냐?”

“만약 그렇게 되면 유피가 주워줄래?”

“그러네. 알이 죽은 뒤라면 고려해 볼게.”

가만히 알베르트를 응시하던 유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좋아, 알. 몽환기를 부수는 건 내가 맡을게. 다만, 이 거리에서는 나도 단번에 간섭할 수는 없어. 일단 알은 몽환기의 주변으로 가서 마력장을 약하게 만들어 줘. 몽환기를 제어하고 있는 범인은 멀리 있지 않을 거야. 녀석을 제압해 줘. 꼭 쓰러뜨릴 필요는 없어. 집중을 흐트러뜨릴 수만 있다면 내가 간섭할 틈이 생겨날 거야.”

“알았어. 그것만 해주면 될까?”

“지옥도를 재현하면서 생긴 일그러짐을 역으로 이용할 거야. 뒤는 걱정하지 마.”

자신감 넘치는 유피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조력자였다. 검은 아공간이 열린다. 공간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롯은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유피.”

유피는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별무리를 닮은 은발이 흔들렸다. 가녀린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치지 마.”

“…….”

말없이 시선이 교차한다.

고깔모자와 마녀의 로브를 입은 유피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귀화루를 나오자마자 이곳으로 향한 것 같다. 반면, 검은 연미복을 입은 알베르트는 피와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몇 번의 교전을 거친 연미복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곳곳이 헤져 있었다. 연미복에 걸린 자가수복 마법으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벌써 한계를 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안전한 곳에 있잖아. 그 말은 내가 너에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강하니까 괜찮아.”

숲에서 들었던 그녀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유피는 웃었다. 심각했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들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다녀오기나 하세요, 집사.”

“아가씨의 분부라면 당연히.”

그 말을 끝으로 알베르트는 성벽을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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