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유곽에 피는 꽃(1) (6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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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에 피는 꽃(1)

마차에 오른 유피는 가장 먼저 서신을 썼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종이와 깃펜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나에 반응한 깃펜은 하얀 종이 위에서 미끄러졌다. 글씨체가 예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무한의 꾸러미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서신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빠르게 작문을 마친 유피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입술을 편지에 찍었다. 붉은 입술 자국이 남는다. 창을 올린 그녀는 전서구를 띄웠다. 작은 창을 통해 날아간 비둘기는 금방 멀어졌다. 진한 홍차 향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차를 머금은 유피는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알베르트는 생각에 잠긴 그녀를 응시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기만 할 뿐,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유피가 찻잔을 다 비운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물었다.

“향후 방침은 정한 거야?”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악몽을 해결하기 위해서 방문한 양양이다. 한데, 가장 중요한 몽환기는 이곳에 없었다.

“몽환기를 회수하는 건 아벨 오빠에게 맡겨두자.”

“금방 찾을 수 있을까?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잖아.”

“어쩔 수 없지. 없어진 건 없어진 거니까. 소재가 불확실한 물건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다행히 몽환기는 한 개 더 있으니까. 그쪽의 도움을 받자.”

양양에 오기 전, 유피가 했던 말을 알베르트는 떠올렸다.

몽환기는 두 개가 있다는 말. 하나는 보다시피 사당에 있었지만, 도난당한 상태다. 남은 하나의 몽환기는 주인이 있다고 했었다.

“몽환기의 주인과는 아는 사이야?”

“알다 뿐이겠어. 일단은 내 언니인걸.”

“뭐?”

처음 듣는 소리다. 알베르트의 반문에 유피는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리 놀라는 거야. 친언니는 아니야. 발푸르기스의 자매들은 의무적으로 인연을 맺어야 하거든. 나는 할아범의 제자기도 하지만, 숲의 마녀기도 하니까.”

알베르트는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마녀라는 호칭은 단순히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을 아닌 모양이다. 특정 단체, 그러니까 발푸르기스의 자매라는 것은 마녀들이 소속된 조직인 건가.

“좋아. 의자매라는 말이구나. 음…… 혹시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어?”

“가슴이 큰 마녀야.”

“가슴이?”

“응. 커.”

“그게 중요해?”

“남자에게는 중요하잖아.”

알베르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두개골은 자신의 뼈임에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언니라는 마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거야.”

“곧 알게 될 거야. 언니에게 연락한 건 오랜만이니까. 빨리 와달라는 추신을 보내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일단은 귀화루로 돌아가자.”

“…….”

언니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대답을 회피하는 유피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차후에 그녀의 기분이 괜찮을 때 다시 물어보기로 하자.

“아벨 황자는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되겠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오빠는 왜?”

“약속한 거 아니었어? 소하 언덕의 일이 끝나면 찾아가기로.”

“아.”

유피는 살짝 입을 벌렸다. 별것 아닌 그 반응에 알베르트는 상황을 이해했다.

“잊어버렸구나.”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잊어버릴 리 없잖아. 그게, 그……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그렇다는 거로 해둘게.”

“그보다 오늘 차 맛이 왜 이래? 대충 탄 거 아니야?”

“타 놓았던 걸 그대로 가져왔어. 문제가 있다면 유피의 마도구가 잘못된 거로 생각해.”

“…….”

차분한 집사의 대답에 유피는 표정을 구겼다. 알베르트는 소리 없이 아래턱을 흔들었다.

“웃지 마, 알!”

*&*

두 사람이 귀화루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피는 다가오는 기녀들을 피해 쏜살같이 방으로 올라갔다. 정말로 유피에르 황녀님이세요? 라는 질문을 무시한 그녀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되자 남은 기녀들은 알베르트에게 다가왔다. 집사는 기녀들을 피해 치료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의녀는 깨어나 있었다.

기녀들이 활동하는 시간이 야밤인 걸 감안했을 때, 그녀가 진료를 보는 시간은 해가 진 뒤일지도 모른다. 아란의 앞에 앉은 알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보였다. 사냥꾼의 주먹을 받은 골격은 군데군데 금이 생겨나 있었다. 부러지지 않고 충격을 흡수한 것이 기적처럼 보일 정도다.

알베르트의 상태를 확인한 아란은 판을 들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네요, 란. 만약 다치게 되면 부담 없이 절 찾아오라고는 했지만, 이런 상태로 바로 오는 건 진료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의녀님.”

아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진료를 봐준 지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만에 몸이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으니,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건가요? 란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처를 입는 일도 드물 거 아니에요. 방심하다가 당하신 건가요? 아니면 상대가 정말로 강했던 건가요?」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란은 한숨을 쉬었다. 판을 내려놓은 그녀는 의료가방을 열었다.

새하얀 붕대와 금창약.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초를 꺼낸 그녀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모은 약초를 찧어서 즙을 만든다. 약초 특유의 쓴 향이 코끝을 찌른다. 그녀가 약을 준비하는 사이 알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닦았다. 수건 세 개를 걸레로 만든 뒤에야 알베르트는 아란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림을 색칠하듯이 알베르트의 몸에 약을 바른 아란은 붕대를 감았다.

「못해도 3일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약이 몸에 스며드는 시간도 필요하고, 뼈가 회복되려면 무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렇다고 아예 움직이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뼈를 튼튼하게 만드니까요.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알베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두 팔, 붕대 때문인지 움직임이 힘들다. 다리도 마찬가지다. 호흡은 부드럽다. 늑골을 감싼 붕대는 답답하지 않았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감각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작약감초탕(芍業甘草湯)이랑 오적산(五積散)을 썼어요. 라세티(Lacetti)도 배분에 들어갔기 때문에 조금 멍한 느낌이 있을 거예요. 만약 현기증이 있거나 하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간혹 그 안에 담긴 마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환자분도 계시거든요.」

“알겠습니다. 이제 치료는 끝난 건가요?”

「아뇨, 이제는 혈도를 봐야죠.」

아란의 손이 알베르트의 늑골로 향했다.

붕대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 왼쪽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의 기가 몸을 확인했다.

「다행이네요. 혈도는 무사하네요. 란의 혈도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데, 그것 때문에 다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네, 보기 드문 사례예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란은 무인이니까, 무공을 익히는 데 좀 더 유리할 거로 생각해요.」

아란은 작은 통을 알베르트에게 꺼냈다. 하얀 통에는 「1日 3回」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작약감초탕을 조금 챙겨 넣었어요. 진통제 효과가 있으니까, 너무 아프면 종종 복용하세요.」

통을 열어보자, 안에는 토끼똥 같은 작은 환약이 가득했다.

양도 많다. 하루에 한 알씩 먹는다고 생각하면, 못해도 반년은 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알씩 먹는 게 아니에요. 란은 젊으니 많이 먹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여섯 알 정도는 드셔야 해요. 아껴 먹으면 한 달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예요.」

“…….”

멋쩍어진 알베르트는 아란의 시선을 피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예리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

진료가 끝난 알베르트는 유피의 방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노크를 넣어본다.

“유피, 안에 있어?”

“들어와.”

안쪽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달칵, 하고 문의 잠금이 풀렸다. 그녀의 허락을 받은 알베르트는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심플한 구조였다. 한쪽에 있는 침대와 화장대, 몇 안 되는 가구가 양 벽 끝에 있고, 중앙에는 책상과 유피가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유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콧잔등에는 투명한 안경이 있었다. 뭔가 신기할 것도 없는 모습인데, 알베르트는 무심코 그녀가 작은 성안에 군림하는 공주님처럼 느껴졌다.

“몸은 좀 어때?”

“약 냄새가 심할지도 몰라.”

방문을 닫은 알베르트는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피는 책장을 덮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책의 표지는 「생명의 나무와 발푸르기스의 자매들」이라는 이름이었다.

“최소 3일은 안정하라는 말을 들었어.”

“큰 이상은 없고?”

“혈도는 다치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창문으로 보랏빛의 까마귀가 날아갔다.

조금 전까지 유피의 책상에 있던 건지, 그녀의 앞에는 보랏빛 깃털이 떨어져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조금 전 언니한테 연락이 왔는데, 늦어도 일요일 새벽이면 양양에 올 것 같다고 이야기하네.”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네.”

“꼭 그런 것도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쪽 이야기야.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언니랑 만날 때는 꼭 내 곁에 붙어 있어. 알았지?”

유피는 안경을 벗었다. 두 손을 마주 모은 그녀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만나면 마법으로 인사라도 하는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그런 거라면 한판 붙으면 끝나는 문제니까, 하고 유피는 덧붙였다.

“언니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

“세실리아. 산의 마녀인 세실리아 아그리파가 내 언니야.”

“산의 마녀라……. 유피가 숲의 마녀니까, 확실히 자매라는 느낌은 드네.”

산과 숲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 없는 느낌이 강했다.

“그 말대로야. 발푸르기스의 자매는 서로 연관되는 이명을 짓거든. 언니는 마녀의 산을 총괄하는 그랜드 위치(Grand Witch)야. 실력 하나는 확실한 마녀야. 다만,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가능하다면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야.”

“사이가 나쁜 거야? 아니면 싫어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럼? 하고 알베르트가 반문하자 유피는 눈살을 찌푸렸다.

“변태 오빠랑은 또 다른 의미로 상대하기 힘든 것뿐이야.”

“으음…….”

알베르트는 말없이 유피를 응시했다. 그녀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언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느낌이 강했다.

“조금이라도 각오해 둬야 대처할 수 있거든.”

“대체 언니랑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건데?”

“알은 모르는 게 나아.”

“…….”

변함없는 유피의 태도에 알베르트는 혀를 차고 싶어졌다. 물론 스켈레톤이 되어 버린 그의 육체에는 혀가 없었다. 그녀의 이런 면은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냥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인데, 유피는 죽어도 그런 말을 꺼낼 여자가 아니었다.

[어쩌겠습니까, 마스터. 그러면 그녀에게 반하지 말았어야죠.]

‘그러게 말일세.’

혼자 끙끙 앓고 유피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알았어. 일단은 일요일에 온다는 거잖아? 그럼 토요일은 잠시 나갔다가 와도 괜찮을까?”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 거야?”

“토요일 밤에 이신설교의 집회가 있다고 들었어. 시간이 되면 참석해 보고 싶어서.”

송이의 말대로라면, 이번 집회에는 선녀도 참석한다는 모양이다.

쌍둥이는 말했다. 이신설교의 선녀는 유피에르의 운명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운이 좋다면 그녀와 접촉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피엘이 말했던 신교라는 종교야.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사교라는 말과는 달리 꽤 인지도가 있더라고.”

“흐응.”

“유피도 같이 갈래?”

“내가 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기녀들이랑 함께 간다는 거 아니야?”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의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처지니, 같이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마음껏 즐기고 와.”

뭔가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알베르트는 반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유피는 거절했다. 빨리 나가라는 듯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결국, 알베르트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방을 뒤로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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