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사냥꾼(3) (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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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3)

하얀 눈꽃이 내리던 어느 날, 사부님은 알베르트에게 물었다.

『보법(步法)이란 무엇이냐?』

‘발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거 아닙니까?’

제자의 대답에 사부님은 지팡이를 들었다.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보법은 발만 움직이면 된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네가 기사놀이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다.』

‘사부님. 제가 언제 기사놀이에 빠져 있다고…….’

『허구한 날 검기와 검강만 뽑아내는 걸 본좌가 모를 것 같으냐?』

‘…….’

『중요한 건 기의 형상화가 아니다. 체와 기의 완벽한 조화야말로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길이니라.』

‘불초제자. 깨달음이 얕은지라 사부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의 턱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웃으신 건 아니다. 아마도 혀를 차신 모양이다.

『보법은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서 시작된 무공의 기본이다. 보법의 성취가 낮다면, 네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검기나 검강을 다뤄도 말이다.』

‘사부님, 농담이 심하십니다.’

『농담? 어허, 이런 고얀 놈을 봤나. 그렇게 몸으로 배워놓고도 모르겠느냐? 본좌에게 왜 너의 공격이 안 닿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

알베르트는 사부님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공격이 문제가 아니다. 사부님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앞에 있었던 것 같다가도 뒤로 돌아가 있거나, 옆에서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간신히 그 모습을 담기 무섭게 사부님은 사라졌다.

『보법의 기본은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 더 나아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고, 공격하기 유리한 자리를 점유하는 것. 네가 진정 보법의 위력을 깨닫는다면,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움직임만으로도 상대방을 농락하는 것이 가능하지. 그리고 이가 극의에 달한다면 능히 너만의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

창의 움직임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보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발이 밟는 곳은 정해져 있다.

녀석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다. 좌우, 후방. 어디라도 좋다. 정면에 서는 것만 피한다. 목표를 놓친 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켈레톤 나이트는 몇 초 되지 않아 알베르트의 모습을 잡아냈다. 적대자의 등을 확인한 녀석은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창은 나아가지 않는다.

이변을 느낀 스켈레톤 나이트는 시선을 내렸다. 창이 지면에 떨어져 있다. 창에 붙어 있는 것은 자신의 팔이다. 어깨에 달려 있을 팔이 지면에서 구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녀석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 초 늦게, 녀석은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스켈레톤 나이트들의 사이를 사뿐하게 걸어 나간다.

속도를 낼 필요는 없다. 녀석들의 움직임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다. 뻗어진 창, 그 팔을 타고, 등으로 돌아간다. 검을 옮긴다. 목을 내준 스켈레톤 나이트의 신형이 흔들렸다. 목을 잃은 놈은 지면을 향해 쓰러졌다. 언데드에 파묻힌 놈은 곧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 와도 똑같다. 달라지는 건 없다. 수가 문제가 아니다. 놈들의 공격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 한 끗 차이다. 창 옆으로 돌아간 알베르트의 아래턱이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떼는 것과 동시에 또 한 명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쓰러졌다.

즐겁다.

녀석들의 머리끝에 서 있다는 우월감. 알베르트는 공격이 쇄도하는 날붙이 속에서 마음이 들뜨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검기나 검강은 필요하지 않다. 내공을 많이 쓰는 초식을 굳이 끌어낼 이유는 없었다. 신체를 활성화하는 내공만으로도 충분했다.

보아라, 이것이 무의 편린이다.

자, 좀 더 노력해 보아라. 그 정도로는 내게 닿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연극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관객에게는 손댈 수는 없다. 놈들은 저 조그마한 무대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뻔한 연극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삼류 배우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이지만, 제법 모양새가 그럴싸한 공연이다.

연극의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이 이야기의 막을 그는 알고 있었다.

미리 읽은 대본처럼 흘러가는 배우들의 말과 행동이 우습다.

어느 곳에서 조연을 쓰러뜨리고, 어느 곳에서 주연의 목소리가 높아지는지. 관객의 눈에는 극의 흐름이 전부 들어온다. 알베르트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 하품이 나는 것을 참으며 무대를 바라봐 주는 것 정도다.

이제 연극은 끝이 난다.

알베르트는 두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리는 녀석들을 다독이듯이 알베르트는 손뼉을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을 멈춘 알베르트는 관객석에서 일어났다.

[마스터.]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언데드의 시체가 가득했다. 쓰러진 스켈레톤 나이트들은 어느 놈 할 것 없이 신체 일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보이지만, 누구 하나 일어서지 못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순간 사고의 공백이 있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작품이 자신이 만들었다.

검을 회수한다. 등 뒤로 찌른 검을 거두자 쿵, 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다.

알베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갑주를 입은 듀라한이 쓰러져 있었다.

‘내가 검기를 다뤘는가?’

[아뇨, 마스터는 순수한 체술로 녀석들을 제압했습니다.]

천칭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중요한 건 검기나 검강이 아니었다. 그렇다. 사부님의 가르침은 어느 한 군데 틀린 곳이 없었다. 가능성이 보였다. 자신은 착실히 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회수한 검을 검집으로 가져가던 알베르트는 손을 멈췄다.

언덕 능선 너머, 데스 나이트로 보이는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듀라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위 언데드다.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제법 재밌는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알베르트가 내공을 모았을 때였다. 데스 나이트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누군가 있다.

그걸 파악하는 순간 무언가가 쇄도했다.

[마스터!]

검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내공으로 강화된 알베르트의 시선에도 잡히지 않는다.

엄청난 속도다. 반응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 않으면 죽는다. 본능에 따른 알베르트는 음기를 무시한 채 내공을 모았다.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기 위해 들었던 검에 검기가 떠올랐다. 검붉은 검기는 곧 검사의 형태를 취했고, 검강이 된 순간. 알베르트의 몸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뭐?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따라가질 못한다. 모든 것이 느려졌다. 부유감에 휩싸인 알베르트는 먼저 검을 확인했다. 검강을 머금었던 지팡이 검은 검신이 부러져 있었다. 날아가는 검날이 보인다. 두 팔은 하늘 높이 들려 있었다. 그 안쪽으로 작은 돌풍이 몰아쳤다. 알베르트는 그 순간에서야 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데드가 아니다. 날아가는 알베르트의 몸을 따라잡은 녀석은 연미복 위로 발을 뻗었다.

가벼운 착지. 구름을 밟는 것 같다. 놈의 흙발이 알베르트의 몸을 사뿐히 밟았다.

멀어지는 발.

떨어지는 몸.

직후, 시간이 돌아왔다.

“-!”

흙발에 짓밟힌 알베르트는 추락했다. 낙법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그대로 땅속에 처박힌다. 컥, 하고 시야가 암전했다. 순간 끊겼던 의식이 충격 때문에 돌아왔다. 뼈라는 뼈는 전부 부러진 것 같다. 몸 안이 울린다. 알베르트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쿵, 하고 알베르트가 있던 자리로 추가 떨어졌다.

고개를 든다. 그 머리로 주먹이 날아왔다. 알베르트의 주먹과 비교하면 반절도 되지 않는다. 받아친다. 두 주먹이 맞물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알베르트의 손에 금이 생겼다. 뼈가 비명을 지른다. 간신히 목소리를 억누른 알베르트는 상대를 확인했다.

알베르트를 단 몇 수만에 제압한 주인공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얇은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개를 연상시키는 가면은 소년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 니 뭐꼬? 가만 보니 잡것이 아니네.”

독특한 말투였다.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어려 있었다.

마무리를 가할 주먹은 떨어지지 않는다.

한 수만 더 나왔어도 알베르트의 목숨을 가져갔을 흉수는 기적처럼 손을 거두고 있었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독특한 냄새나 풍기고 있고. 살아 있는 거 뻔히 아는데 퍼뜩 안 일어 날기냐?”

“…….”

알베르트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손이, 다리가, 등이, 말을 듣질 않는다. 충격 때문일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이 마비는 손을 타고 들어온 기운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공이 알베르트의 전신을 장악하고 있었다.

“참. 니 심혼권(心魂拳)을 맞았제. 아새끼가 약하면 약한 대로 그냥 뒤질 것이지. 왜 주먹을 뻗어서 귀찮은 일을 만드나?”

알베르트의 부러진 주먹 위로 소년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자 알베르트의 몸을 돌고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찌릿한 느낌과 함께 시야가 암전했다. 눈을 깜박이자, 시계에 빛이 돌아왔다. 전신에 힘이 돌아온다. 내공의 제어권을 되찾은 알베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뭐 이따구 술법을 쓰고 있누? 창생의 술인기냐? 주술사도 아닌 놈이 이상한 기운이나 덕지덕지 바르고 있고. 그래, 마. 니 이름이 뭐꼬?”

“아, 알베르트 라나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선배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괴롭다. 가슴팍에서 달리는 통증에 알베르트는 기침을 토해냈다.

그래도 머리 한 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 우선이다.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정체를 확인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정하자. 인간이라는 것은 밝힐 수 없다. 시더 황자나 라피엘이 특별한 경우다. 마족 대부분은 인간을 증오했다.

시선 한쪽에서 소년의 손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그 손이 알베르트의 목을 잡았다. 엄청난 악력에, 알베르트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치아라. 물어본 건 내다. 어디서 니 꼴리는 대로 물어보고 있나?”

“크읏…….”

알베르트는 소년의 손에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신장의 차이 때문에 무릎과 발이 지면에 맞닿아 있었지만, 호흡을 막는 힘과는 상관없었다.

말하기를 바라는 소년의 의사와는 달리, 알베르트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숨이 부족하다. 시야 끝이 어두워지고 머릿속이 몽롱하게 변해간다. 두 눈이 힘을 잃기 직전 목을 조르던 힘이 사라졌다.

떨어진다. 지면과 얼굴이 맞닿은 알베르트는 간신히 호흡을 재개했다.

“한 번만 더 잔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니 각오 단디 해라. 확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랑게.”

소름이 돋는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기도는 압도적이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눈앞의 존재는 괴물이다. 놈과 비교하면 시더 황자는 새 발의 피다. 이와 비슷한 기도를 가진 자는 녹림왕 외에는 느껴본 적 없었다.

알베르트는 생각을 고쳤다. 녀석은 겉으로 드러난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는 마음속에 가면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 두려움은 옅었다. 생사결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침착했다. 일단 상대를 속여 넘기는 것부터 시작하자.

“니 여서 뭐하고 있었나?”

“혀, 현자님의 사당을 보러 왔습니다.”

“그 말을 내보고 믿으라고? 니 같이 수상한 놈을 검문소에서 통과시켜 줄 것 같으냐?”

수상한 걸 따지면 눈앞의 소년이 몇 배는 더 수상쩍다.

다만, 그 점을 지적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하겠지. 알베르트는 말을 골랐다.

“검문소를 통과한 게 아닙니다. 소하 언덕으로 들어오는 길은 많으니까요.”

“호오, 제법 그럴싸한 대답이네? 좋댜. 내 믿어주지. 사당은 와 가고 있었는교?”

“사당이 언데드의 근원지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

소년은 알베르트의 대답에 침묵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본다.

가면 안에서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 때문에 분위기를 읽어내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러진 지팡이 검과 언데드의 시체를 확인한 그는 알베르트의 허리춤을 봤다. 월아를 본 소년의 눈이 빛났다.

“변변찮은 주먹을 자랑하고 싶었던 거냐. 이야, 요즘 아들은 혈기왕성하네.”

의심을 거두어준 것 같다. 소년의 말에 알베르트가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그럴 리가 없제.”

녀석의 기도가 바뀌었다.

무형의 기운이 알베르트의 몸을 옥죄었다.

움직일 수가 없다. 시간이 얼어붙는다. 호흡조차 뜻대로 이어갈 수 없다. 멈춘 시간 속에서 소년만이 움직인다. 녀석은 자신을 바라보는 알베르트의 시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발로 머리를 밟았다. 고개가 꺾인다. 알베르트의 눈이 지면에 닿자 소년은 무형의 기운을 풀었다.

“마지막 기회다. 니 똑바로 말해라. 반쪽짜리 황녀랑은 무슨 사이꼬?”

“…….”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음에 알베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유피가 이곳에 들어온 것조차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앞의 괴물이 유피의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다. 이야기한다면 어디까지 밝히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대답에 따라서는 유피를 위기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소년의 발에 힘이 실린다. 알베르트의 얼굴이 점차 지면과 가까워졌다.

땅과 입이 맞닿기 직전, 소년은 발을 들었다.

“그래그래. 곧 죽어도 꼬리는 내리지 않겠다는 게지? 좋다. 내도 번견은 싫어하지 않는다. 그 충성심을 높이 사줘서 오늘은 넘어가 주마. 그러나 다음은 없다. 알겠나?”

“…….”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소년과 시선이 맞닿았다.

“대답 안 하나?”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 제법 기강이 쓸 만하구만. 아까 니가 그랬지, 내 이름이 뭐냐고? 좋다. 그 검을 지닌 넌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있지. 특별히 대답해 주마. 이 몸은 사냥꾼 아랑(餓狼)이라고 한다.”

사냥꾼.

그제야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눈앞의 소년은 바로 사부님이 경고했던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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