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사냥꾼(1)
알베르트는 아벨 황자가 내준 마차를 확인하고 있었다.
황자의 소유물인 마차는, 그 위세를 알리듯이 화려했다. 반듯한 원목과 섬세한 문양. 마차의 겉면에는 나풀거리는 레이스 자락과 반짝이는 장식물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땀 한 땀 수놓은 것 같은 얼음꽃 자수는 장인의 정성이 느껴졌다.
마차를 끄는 말도 평범한 종이 아니다.
세 마리의 말이 마차에 묶여 있었는데, 가장 앞에 있는 칠흑 같은 말은 두 개의 뿔을 갖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던 마차 중에서 이만한 화려함을 갖춘 마차는 보지 못했다. 황녀의 신분을 과시하는 도구로는 최고의 작품이다.
[상급 마물인 바이콘(Bicorn)입니다, 마스터.]
‘바이콘? 마물을 길들인 모양이군.’
[평범한 말과는 기원 자체가 다릅니다. 유니콘(Unicorn)과는 상반된 특성을 가진 마물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건 물론이고 인지까지 있는 마물인데, 신기하군요.]
‘호오.’
바이콘에 흥미가 생긴 알베르트는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검은 마물은 알베르트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스켈레톤으로 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온순한 바이콘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데, 성 안쪽에서 유피가 걸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무희 차림이 아니다. 그녀는 양갓집 규수처럼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진짜 누가 변태 아니랄까 봐, 취향 한번…….”
거추장스러운 차림이 답답하다는 듯 유피는 이리저리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까칠한 느낌이 달라붙는 걸까, 화려한 모습과는 별개로 그녀의 안색은 어두웠다. 시선이 마주친다. 허리 부분을 당기고 있던 그녀는 손을 놓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네?”
“여자는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야.”
“그러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화장도 한 걸 보니까 말이야.”
유피의 얼굴에는 은은한 화장기가 어려 있었다. 향수를 뿌린 거겠지. 과격한 춤을 추고 난 이후인데도, 그녀에게서는 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한 향이 나고 있었다.
“그런 눈치는 빠르네.”
“관찰력이 좋은 것뿐이야.”
유피는 바이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베르트와는 달리 바이콘은 그 손길을 피했다.
유피는 포기하지 않았다. 갈기 쪽으로 한 번 더 손을 뻗는다. 녀석은 아예 머리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얘는 항상 이러네. 뭐, 됐어. 준비는 끝난 거야?”
“마차는 있는데, 마부가 보이질 않아.”
“마부? 그런 건 필요 없어. 저 아이가 알아서 안내해 줄 거야.”
바이콘을 바라보던 유피는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베르트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 집사는 손을 내밀었다. 알베르트의 시중을 받은 아가씨는 마차에 올랐다.
“왜 이런 곳에 힘을 쓰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마차 내부를 둘러본 유피는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차 곳곳에 자리 잡은 향초가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향초를 치운 알베르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러네. 빈말이 아니라, 진짜 황녀 전하로 보여, 유피.”
“평소에는 그렇게 안 느껴졌나 보네?”
“음, 아무래도 마녀라는 이미지가 강하니까.”
솔직한 알베르트의 대답에 유피는 실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잘 풀렸으니까. 이제 몽환기만 챙겨오자.”
유피의 손에는 아벨 황자가 준 서신이 있었다. 서신에는 얼음꽃 문양의 봉인이 찍혀 있었다.
“몽환기는 소하 언덕에 있다고 했지? 정확한 위치는 알고 있어?”
“할아범, 아니. 위나 바토리를 모신 사당 안에 있어.”
위나 바토리. 마족 최후의 현자인가. 청화의 말을 떠올린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가 사용하고 있는 성은 스승님인 현자의 성을 물려받은 모양이다.
“바로 꺼낼 수 있는 거야?”
“설마. 그렇게 간단하면 벌써 도난당했을 거야.”
그래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하고 유피는 덧붙였다.
“내 생각보다 몽환기는 훨씬 위험한 것 같은데. 괜찮은 게 맞아?”
“아까 변태 오빠가 말한 것 때문에 그러는구나?”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더 황자에게는 넘겨주지 말라는 아벨 황자의 부탁. 몽환기가 평범한 마도구라면 아벨 황자가 그런 말을 했을 이유가 없다.
“몽환기는 본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도구야. 뛰어난 술사가 구사한다면 환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 수 있어. 혹자들은 이렇게도 말하지. 몽환기를 손에 쥔 자, 실허(實虛)의 환상을 다룰 수 있다고. 능력에 따라서는 아마 지옥도(地獄圖)를 재현할 수도 있을 거야.”
“한낱 마도구가, 지옥도를 재현해?”
“몽환기는 우리 세계의 물건이 아니거든. 뭐, 그 정도의 간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드래곤이나 마왕이 오지 않는 이상은 무리일 거야. 걱정할 필요는 없어.”
유피는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서 마나가 형상을 갖추더니, 이내 작은 그릇으로 변했다. 하얀 선과 물결 같은 문양이 새겨진 그릇, 몽환기. 꿈을 다루는 마도구가 그녀의 손에서 투영되었다.
“자,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본론으로 돌아가자. 몽환기는 알이 꾸는 악몽이 꿈이라는 자각을 갖게 해줄 거야.”
“자각몽(自覺夢)이 된다는 거네.”
“그래. 악몽이라고 한들, 네가 억지로 그걸 보고 있을 이유가 없어져. 더 나아가 바라는 꿈을 꾸는 것도 가능해질 거야. 소유주가 그럴 마음만 있다면 밖에 있는 사람과 의사를 나누는 것도 가능해. 즉 혼자서 악몽을 통과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야.”
악몽을 소유주가 바라는 꿈으로 바꿀 수 있다. 확실히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사희의 정신세계도, 월아의 악몽을 통과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그럼 유피도 내가 꾸는 꿈을 볼 수 있는 거야?”
“그런 셈이지.”
그건 곤란하다. 알베르트는 이전에 보았던 악몽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기억이 너무 많았다. 알베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유피는 손을 털었다. 흐려지는 몽환기와 함께 그녀의 마나도 사라졌다.
“이해해. 누구나 보여줄 수 없는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말한 거야. 알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게 보여줄 필요는 없어.”
의외였다. 알베르트의 불안을 이해해 준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건 그게 전부지? 이만 내리자. 다 도착한 모양이야.”
마차의 속도가 차츰 느려졌다.
문을 열자 바깥에는 방책으로 둘러싸인 간이 검문소가 있었다.
*&*
언덕의 입구는 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임시로 지은 것 같은 검문소 안에서 한 무인이 나왔다. 그는 마차에서 내린 알베르트와 유피에르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유피는 서신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서신을 받은 그는 아벨 황자의 봉인을 풀었다. 무인의 두 눈이 빠르게 서신을 훑어 내려간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유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천부장 시몬, 유피에르 황녀님을 뵙습니다.”
천부장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예를 갖췄다. 유피가 인사를 받자 시몬은 말을 이었다.
“황자님의 명을 확인했습니다. 호위 병력은 얼마나 준비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안쪽 상황은 어때?”
“좋지 않습니다. 언데드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입니다.”
“언데드?”
유피의 반문에 시몬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설명을 안 듣고 오신 거라면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봐.”
시몬은 유피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고개를 숙인 그는 입을 열었다.
“이변은 2년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소하 언덕에서 갑자기 언데드가 발견되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스켈레톤부터 시작해서 시귀와 같은 하급 언데드가 나타났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근원지에서는 상위 언데드가 나타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근원지를 정화하지 않은 거야? 하급 언데드라면 상비군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유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데드를 발견한 시점에서 정화가 완료됐어야 정상이다. 그것을 내버려 뒀다는 건 위험을 알면서도, 키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근원지를 정화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자정이 넘으면 근원지는 똑같은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더 강해진 언데드와 함께 말이죠.”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베르트의 물음에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다.
적어도 알베르트가 아는 지식 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데드라는 건 부정한 기운이 밀집된 곳에서 나타난다.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자연스레 만들어진 부정한 마나가 언데드를 만들어냈다. 가령 죽은 자가 많은 땅이라든지, 전쟁이 계속되어 온 죽음의 땅은 상위 언데드가 있는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언데드가 있는 지역도, 부정한 마나를 정화하고 나면 한동안은 언데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이런 로브를 입은 리치가 나타났어?”
유피는 무언가 짚이는 곳이 있었는지, 아공간에서 보랏빛의 로브를 꺼냈다.
[마스터, 저건…….]
알베르트의 기억에도 있는 로브였다.
그가 처음 성에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건넸던 리치의 로브다.
“그렇습니다. 꽤 강력한 개체여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은 여기였구나.”
다음? 그 리치는 죽은 게 아니었던 건가?
알베르트는 의문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순간이 아니다. 이 대화가 끝난 뒤에도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봉쇄였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유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는 해결책이다.
상처에 생긴 고름이나 마찬가지다. 짜내자니, 당장의 통증이 문제고. 그렇다고 방치해 두면 고름을 계속 키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사당을 정리할 방법은…….
“처음부터 날 기다렸다는 거야?”
유피의 혼잣말에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하여간 그 변태 오빠는……. 그래, 내 잘못이네. 작년에는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해결할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황녀님이라도 현자의 사당에 손을 대시는 건…….”
“잊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분의 제자야. 위나 바토리의 사당을 정리할 수 있다면 그건 나밖에 없어. 오빠에게 말해둬. 어차피 내 악평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전부 내 탓으로 돌리라고.”
“황녀님.”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우리 잘나신 오빠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까.”
그 성격이 어디 갈 리가 없지, 하고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두 분만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한 걱정이야. 그보다 안에 다른 누군가 있는 건 아니지?”
“요 일주일간 검문소를 통과한 사람은 없습니다. 안쪽에는 언데드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됐어.”
“황녀님, 하다못해 안내인이라도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끈질겨, 너.”
만류하는 시몬을 지나 방책을 통과한 유피와 알베르트는 소하 언덕으로 들어섰다.
언덕의 초입 부근은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양양 성을 방문했던 밤이 기억난다. 그때도 대로에는 이런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언덕과 함께했을 초목은 본래의 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몸을 숙인 알베르트는 이름 모를 풀을 확인해 보았다. 생기 없는 풀은 뽑기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사기가 충만하네. 언데드가 좋아할 만한 장소야.”
기분 탓이 아니라면, 자신의 몸도 가벼워진 것 같다. 알베르트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몽환기는 사당에 있다고 했지? 사당의 위치는 알고 있어?”
“사당은 언덕 정상에 있어. 헤맬 일은 없을 거야.”
안개에 가려진 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방책에서부터 시작된 정비된 도로가 안개 속에서도 시야에 들어왔다. 알베르트와 유피는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피, 그 리치 말인데. 혹시 내가 죽였던 리치야?”
이전 시대에는 리치에 관해서 설명도,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유피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그녀는 알베르트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같지만 다른 거야.”
“다르다?”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히 따지면 알베르트가 죽인 건 리치가 아니라 사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알베르트가 재차 물음을 이으려는 순간 그녀는 대답했다.
“성에 있는 아저씨랑 비슷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