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황자 아벨 워스테인(3)
은빛 발찌를 찬 하얀 발이 무대를 쓰다듬는다.
그 움직임은 앞으로 시작될 윤무를 위한 작은 동작이었다. 날개를 펴듯이 펼쳐지는 손과 커다란 몸짓. 그녀의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춤사위를 시작했다. 선회하는 발동작은 절대 연약하지 않았다. 몰아치듯이 끊어지는 춤은 역동적이면서도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저 가냘픈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는 걸까. 커다란 무대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아 보였던 유피가, 어느새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춤은 절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허벅지에 끼어두었던 부채를 편 그녀는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흘러내리는 은빛의 실이 유려한 몸을 타고 흩날렸다. 은빛과 불빛이 어우러지며 그녀의 옷자락에서 검은 나비가 흘러나왔다.
“오오!”
좌중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유피의 춤사위를 따라 나비들이 한곳에 모였다가, 헤쳐지기를 반복했다. 뻗어지는 부채를 따라 날아오른 나비들은 일순간 방향을 꺾어 용오름처럼 그녀의 곁에 모여들었다. 유피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주인의 반응에 힘을 얻은 건지, 나비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꽃이 만개했다. 화려하게 피어오른 나비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은빛 소녀와 검은 나비. 은백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윤무를 마친 유피는 처음 인사와 마찬가지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좌중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알베르트도 이끌리듯이 박수에 동참했다. 유피의 무대는 박수가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다.
[저런 재주를 숨기고 있었습니까, 유피에르는?]
‘나도 몰랐었네.’
진심으로 놀랐다. 사교회에 참석한 그녀는 귀족들이 제안하던 춤을 항상 거절했다.
처음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거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춤을 못 추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그녀는 춤을 못 추는 게 아니라, 춤을 추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녀의 춤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아가씨의 뒤를 따라 수많은 사교회에 참석한 알베르트는 수많은 춤을 보았다. 북방의 이교도들이 추구하는 부두 춤과 의식. 루미에르 교의 성가대들이 신에게 바치는 신무(神舞), 연방 공화국의 상인들이 추는 우스꽝스러운 몸동작과 제국 영애들에게 장려되는 기본 춤까지.
그리고 방금 전 유피에르가 취한 춤은 그것 중 하나와 비슷했다.
마족의 현란한 춤사위가 섞이기는 했지만, 알베르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구만.’
[저 여자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대에서 내려온 유피는 아벨 황자의 호출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아벨의 옆자리에 조신하게 앉았다.
“제법이구나. 이런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무희를 보는 건 오랜만이군.”
“감사합니다, 아벨 황자님. 소녀의 춤을 보고 만족하셨다면 기쁠 따름이죠.”
“말하는 것도 예쁘군. 흠, 마음에 들었다.”
유피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붉은 두 눈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다.
알베르트는 알 수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동생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아벨은 빈 술잔을 유피의 앞으로 내밀었다. 따르라는 의미다. 유피가 쉽사리 술병으로 손을 뻗지 못하자, 보다 못한 기녀가 그녀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유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랐다. 술이 차오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 아벨은 씩 웃었다. 그는 유피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탁, 하고 유피는 그 손을 쳐냈다.
“황자님, 어디를 만지시는 건가요?”
“응? 어디냐니, 이건 네 어깨가 아닌 거냐?”
술에 취한 아벨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흐트러진 황자님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기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묘한 마성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란 건 아벨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유피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역으로 그녀의 입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복 오빠가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동생인 그녀는 느껴지는 게 없는 모양이다.
“그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연희라고 합니다, 황자님.”
이름을 물어보는 아벨의 모습에 유피는 미소를 무너뜨렸다.
“연희? 인연을 말하는 아가씨라…. 그러고 보니 내 동생의 이름도 그랬지. 인연을 잇는 아이라고 해서 유피에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어, 아바마마가 직접 말이지.”
그 유피에르 황녀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벨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 아이가 떠오르는지 모르겠군. 조금 취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근데 우리 혹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더냐?”
“기녀를 상대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황자님.”
“당돌하기도 해라. 제법 쏘는 맛이 있는 아이구나.”
유피의 불경한 태도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아벨은 연신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정말로 유피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정말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말이야. 이 기품, 품위. 기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뭐라고 할까. 마음이 흔들리는 기분이야. 정말로.”
취기가 올라온 아벨의 눈에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주변에 있던 기녀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는 걸까, 입가를 손으로 가린 기녀들이 아벨 황자를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유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방금 전 아벨의 술잔을 채웠던 술병이다.
아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잔은 그의 손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피의 손에는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유피는 아벨 황자의 머리로 술을 쏟아부었다.
“…….”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녀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남자치고는 긴 아벨의 머리는 유피가 흘린 술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술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완전히 술에서 깨어난 건지, 아벨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벨을 보며 유피는 머리 위의 장식을 떨쳐냈다.
별무리를 닮은 그녀의 은발이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윤기 있는 은발을 바라보던 아벨은 뭔가 깨달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설마, 너 유피냐?”
“그래. 나야, 변태 오빠.”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기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관리들의 웅성거림은 커졌다.
“젠장. 내가 정말로 취했나 보군. 아무리 맛이 갔다지만 널 못 알아보다니.”
기녀들은 아벨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술을 닦아주기 바빴다.
그는 축축한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걸로 머리가 조금 식었는지,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분명 내가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성에 잠입하는 건 아주 간단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월담을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현자의 제자라는 아이가 왜 이런 곳에 힘을 낭비하는 거냐.”
“오빠야말로 왜 이런 곳에 힘을 쓰고 있는 거야? 무슨 발정 난 토끼도 아니고. 이게 다 뭔 난리래.”
연회장을 둘러본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딜 봐도 여자밖에 없다. 그것도 이름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아니라 유곽에서 봤던 기녀들이다. 녹봉으로 먹고사는 손님은 몇 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2층에 있는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피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로 온 거냐?”
“어머, 차가워라. 동생이 오빠의 얼굴을 보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했던가?”
“형님이 생각나는 말투는 좀 그만두거라.”
아벨은 썩 유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어조가 시더를 떠올리게 만든 것 같다.
“설마 그 형님이 보낸 거냐? 그런 거라면 조금 실망이구나.”
“개인적인 용무로 온 거야. 오빠의 몸 상태도 좀 볼 겸. 한데…. 몸은 멀쩡한가 봐?”
“좋은 편은 아니다.”
“여자랑 밤일은 하면서?”
“다 살고자 하는 짓이다.”
“그럼 그럼. 성욕은 매우 중요하지. 그렇지, 변태 오빠? 내일 오빠가 죽는다고 해도 후손은 남겨야 할 거 아냐.”
유피의 날카로운 말에 아벨은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설명하기도 귀찮구나. 용무나 말해라.”
“소하 언덕에 들어가고 싶어.”
“날짜를 착각한 거 아니냐? 오늘은 그분의 기일이 아니다.”
“다른 용무야. 몽환기를 꺼내오고 싶어.”
아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술기운이 달아났다는 듯 그는 넌지시 유피를 살펴보았다.
“몽환기? 그 저주받은 마도구를 어디에 쓸 생각인 거냐?”
“개인적인 일이야.”
유피는 대답을 회피했다. 월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연스레 시더와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시더를 꺼리는 아벨에게 굳이 그 이름을 꺼낼 이유는 없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소하 언덕은 봉쇄한 지 2년이 되어간다.”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서 오빠를 찾아온 거야.”
“빈 손으로 말이냐?”
“대금은 내 모습을 본 거로 충분하지 않아?”
유피는 양손을 벌렸다. 무희의 옷이 부각된다.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차림이다.
바깥으로 여지없이 드러낸 맨다리나 하얀 목덜미, 요염한 쇄골은 화려한 예복과 맞물려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잠시 말없이 유피를 응시하던 아벨은 헛기침을 터뜨렸다.
“네가 차려입은 모습을 봐도 딱히 기쁘지 않다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두거라. 그래, 들어가거라.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느냐. 어차피 몽환기는 네가 물려받아야 할 물건이다. 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형님에게 그 물건을 넘겨주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내가 필요해서 가져가는 건데, 뭐하러 그 바보 오빠에게 준다는 거야?”
“그거면 됐다. 병사들에게는 내가 말해두지.”
아벨은 손을 들었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노집사가 그의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유피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네, 로버트 할아범. 못 본 사이 주름이 늘었네.”
“황녀님은 더 예뻐지셨군요. 이제는 못 알아볼 정도입니다.”
“입에 발린 말은 됐어.”
“만약 현자님이 살아계셨다면, 기뻐했을 겁니다.”
유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됐다고 했잖아.”
아벨의 펜이 멈춘다. 종이를 넘겨받은 로버트는 봉인을 마쳤다.
노집사는 깔끔하게 정리한 서신을 유피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말이야, 오빠. 소하 언덕은 왜 봉쇄한 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시몬에게 물어보거라.”
“이 자리에서 말하기는 힘든가 보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조심해라, 소하 언덕은 이제 예전에 네가 알던 그 언덕이 아니다.”
아벨의 대답에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2층의 난간에 있는 알베르트를 본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유피의 호출을 알아본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려갈 곳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적인 길을 통해 돌아간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유피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알베르트는 난간을 넘어 1층으로 내려왔다.
쿵, 하고 알베르트는 연회장 중앙으로 떨어졌다.
“가자, 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웅성거리는 주변을 신경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유피는 당당하게 연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알베르트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유피.”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유피는 아벨의 부름에 발을 멈췄다.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 건 사과하마. 설마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 건 마음에 둔 여자한테나 말해. 이런 기녀들에게 말하지 말고.”
동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이 연회장을 보고 화를 내지 말라는 게 무리인 건 알고는 있지만, 아벨은 서운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소하 언덕에서 일이 끝나면 다시 찾아올 거냐?”
“왜? 그때는 환영해주게?”
그녀의 반문에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맞이하지는 않겠다.”
“연회라도 열어준다면 생각해 볼게.”
“알겠다. 마차를 내줄 테니 타고 가거라. 이참에 갈아입을 옷도 하나 챙겨주지.”
“어쩐 일이래?”
이상하다는 듯 묻자 아벨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유피에르 바토리. 황녀인 그대의 위치를 직시해라. 그대가 받는 모욕은 곧 우리의 것. 네 어머니도, 현자님도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일리가 있군요.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벨 황자.”
13황녀의 모습은 연회장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문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아벨은 옷을 고쳐 입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곤란한 듯 몸을 배배 꼬는 기녀들이 가득했다.
“어떻게 할까요, 황자님?”
“연회는 계속 이어가라.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지.”
더는 놀 기분이 아니다. 몸을 잠식하던 음기도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다.
아벨 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