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5황자 아벨 워스테인(2) (5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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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황자 아벨 워스테인(2)

알베르트는 문지기를 따라 성 내를 걷고 있었다.

사용인들의 손길이 닿은 내부는 깨끗한 정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잔가지 하나 삐져나오지 않은 정원수와 알록달록한 화원이 보였다. 정비된 도로 양옆으로는 야명주가 들어간 작은 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석등과 석등을 연결하는 가는 선에는 하나같이 빛나는 조각물들이 걸려있었다.

알베르트는 석등 위를 만져보았다. 손끝에 묻어나는 먼지는 없었다. 최근까지도 정비가 되고 있었던 것 같다. 노후화된 성벽과는 다르다. 성의 내부는 신경 써서 관리하는 모양이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병장기 소리가 가까워졌다.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기합 소리에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게 아니었나?”

“네, 이 시간에는 연병장에 계십니다.”

문지기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지나친 구간을 떠올렸다.

붉은 꽃이 장식된 구간과 정원수가 많던 구간. 그리고 방금 지나친 석등 구간. 알베르트가 지나온 구간은 세 곳이다. 성의 내부 구조를 기억한 알베르트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갔다.

햇빛이 따갑다. 통로 바깥쪽은 고운 모래가 깔린 연병장이 있었다.

사방이 뻥 뚫린 그곳은 병사들로 가득했다. 검과 창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앞에서 구령 소리를 내는 부장의 말에 맞춰 병사들은 무기를 내질렀다.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너희들은 조급하지도 않은 거냐? 북부에서 야만인들이 내려온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저 숲 너머에는 제국의 기사들이 가득하다. 무인 취급도 받지 못하는 너희가 기사의 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병사들 앞에서 건들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남자가 보였다.

허리춤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술병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그의 손에는 또 하나의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꿀꺽꿀꺽, 하고 술을 목구멍으로 넘긴 그는 입을 열었다.

“분하냐?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좋다. 준비됐다면 언제든지 도전해라. 만약 너희가 날 쓰러뜨린다면 기쁜 마음으로 대장 자리를 내주마.”

“그럼 대장 자리는 내가 가져가면 되는 건가?”

“응? 어떤 자식이 그딴….”

말을 이어가던 무진은 입을 닫았다. 연병장에 들어온 손님은 눈에 익숙한 남자였다.

검은 연미복을 입은 스켈레톤. 어젯밤 그와 주먹을 겨뤘던 바로 그 무인이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출세를 하고 말았군. 대장 자리는 그렇게 간단하게 줄 수 있는 거였나?”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자네라면 자격이 충분하지. 갖고 싶다면 넘겨주지.”

“아니, 사양하지.”

사열대에서 내려온 무진은 알베르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군.”

“나도 마찬가지네.”

포권으로 응대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악수했다.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나? 아직 훈련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지.”

“외부인인 내가 봐도 괜찮겠는가?”

어느 세력이든 병사들의 훈련 모습은 극비사항이다. 그건 마족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겠지. 조심스러워하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무진은 씩 웃었다.

“오히려 자네에게 참관해달라고 말하고 싶군.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나와는 시점이 다르겠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조언을 부탁하네.”

“경계심이 너무 없군. 내가 밀정이라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자네 정도 되는 무인이 말인가? 농담이 심하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긍지를 아는 무인은 결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아. 나는 자네의 검을 봤네. 자네도 나의 주먹을 봤지. 이보다 더 확실한 신뢰의 증표가 어디에 있겠나?”

“…….”

어젯밤처럼 술에 취한 눈이 아니다.

무진은 순수한 무인의 눈으로 알베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알베르트 라나네, 무진.”

“이번에는 이름을 알려주는군. 자네에게 인정받은 거로 생각해도 되겠나?”

“물론이네.”

알베르트는 무진이 건네는 술병을 받았다. 내용물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호리병 안으로 손가락을 넣은 알베르트는 단숨에 술을 비웠다. 머릿속이 알딸딸하다. 꽤 독한 술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양이 많았다.

“맛있는 술이군.”

“뭘 좀 아는 친구로군.”

무진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춤의 술병을 손으로 옮긴 그는 사열대의 난간에 앉았다. 알베르트는 병사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정체가 궁금할 만 한데도, 병사들은 묵묵히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강이 잡혀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젯밤 일은 사과하지. 너무 취해있던 탓에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야.”

“사과할 만한 일이 있었나? 나는 친구를 사귄 기억밖에 없는데.”

태연한 알베르트의 대답에 무진은 실소를 흘렸다.

그는 허리춤의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술병을 내렸다.

“실력이 대단하더군. 설마 날 그렇게 간단히 제압할 줄은 몰랐네. 얼마나 더 큰 수를 숨기고 있는 건가?”

쌓아온 무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실력을 숨기는 건 좋지 않다. 무진은 이미 알베르트의 무를 보았다. 역으로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의 무인이니까.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네.”

“호오, 그 정도인가?”

무진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보여준 무는 자신의 경지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장의 한 수 정도가 아니라, 두세 수 정도는 더 숨기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알베르트 란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야. 정말로 세상은 넓군. 몇몇 무인들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이 시기에 자네 같은 실력자가 나타나다니 말이야.”

“어디 나뿐만이겠는가. 무림 오지에는 나보다 더 강한 실력자도 있겠지. 무의 세계는 끝이 없으니 말일세.”

“그거 호승심이 이는군.”

무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투쟁심이 끌어 오른다는 듯 그는 손을 말아쥐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군.”

“뭘 말인가?”

“원래 이렇게 성으로 들어오는 절차가 까다로운가?”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족히 20명이 넘었다. 그 20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알베르트와 유피 두 사람뿐이었다.

“아아, 그거 말인가? 오늘은 예외네. 성 내에 일이 있어서 말이지.”

“일?”

무진은 대답하기에 앞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귀가 있는지, 보는 눈이 있는지 연병장 주변을 둘러본 그는 목소리를 낮춘 뒤 말했다.

“지금 아벨 황자님께서 주최하는 연회가 열리고 있다네. 외부 인사들은 최대한 거절하라는 로버트 집사장의 말이 있었네.”

“이 시간에 연회를 말인가? 낮에 하는 연회라면 공개하는 쪽이 좋지 않나?”

“일반적인 연회라면 그렇겠지. 어젯밤 우리가 왜 귀화루에 있었겠는가?”

무진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안쪽에서 어떤 연회가 행해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무슨 소문 말인가?”

“황자님이 주지육림을 벌인다는 소문 말이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역시 기녀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이유가 있어서 난 소문이었다.

“뭐, 거짓말은 아니지. 어떤가, 여기까지 온 것도 인연인데. 어디 한 번 보고 갈 텐가?”

“아까 외부 인사는 거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보는 것만이라면 문제없네. 나는 여기를 비울 수 없으니, 로한이 안내할걸세.”

“음, 그럼 자네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네.”

“물론이네.”

짝짝, 하고 무진이 두 손을 부딪쳤다. 병사들을 훈련하고 있던 검수가 사열대로 올라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어젯밤 검수들을 이끌던 바로 그 부관이다.

“내 친구다. 연회가 열리고 있는 별궁으로 모셔라.”

“친구요? 알겠습니다, 대장님.”

로한은 의문을 표했지만, 사정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굳이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두 무인이 마음을 연 것을 그도 알 수 있었다.

*&*

로한의 안내를 받은 알베르트는 별궁으로 향했다.

병사들로 가득했던 연병장과 달리 이곳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옷을 차려입은 관리와 명가의 자제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기녀들이다. 눈의 착각이 아니라면 귀화루에서 본 것 같은 기녀들도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쪽입니다.”

로한은 알베르트를 별궁 2층으로 안내했다.

술과 산해진미를 즐기고 있는 관리들을 지나 도착한 곳에는 빈 의자가 두 개 있었다. 주변과는 조금 격리된 느낌의 자리다. 특별한 손님을 모시기 위한 상석이지 않을까? 알베르트의 물음에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저와 대장님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랬군. 로한도 보고 갈 건가?”

“아뇨. 이런 분위기의 유흥은 참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하고 고개를 숙인 로한은 연회장을 뒤로했다. 무진의 부관을 배웅한 알베르트는 자리에 앉았다.

난간 너머로는 1층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국의 사교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연회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들 앞으로는 개인용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좌우에서는 술과 음식의 시중을 드는 기녀들이. 중앙에는 귀화루에서 본 것 같은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악기를 켜는 기녀와 화려한 춤사위를 보이는 무희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의 상석, 화려한 의자에 몸을 묻고 있는 남자는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마족의 5황자 아벨 워스테인. 그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기억 속의 아벨과는 많은 곳이 달랐다.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했지만, 감정 하나 보이지 않던 냉혹한 표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다. 양옆에 기녀를 끼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벌써 많은 술을 마신 것 같다.

그 사이 무대 위에서 공연을 이어가던 무희들이 춤을 마쳤다.

내려가는 그녀들과 교대하듯이 올라온 것은 은빛의 머리가 아름다운 한 무희였다.

공연이 시작된다.

먼저 나와 자리를 잡았던 기녀들이 천천히 현악기를 켜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음색이 울리면서 궁 안이 조용해졌다. 술을 마시기는 하되, 대화는 나누지 않는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되는 듯 연회장의 참석자들은 정숙한 자세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원형 계단 너머로 보이는 2층의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음색이 힘찬 음색으로 곡조가 바뀌었다.

진군가로 쓰일 것 같은 곡조가 흘러나오자, 무대 안쪽에서 한 무리의 기녀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르는 듯한 발걸음이 악기 소리에 녹아들면서 화려한 춤을 끌어냈다. 기녀들의 옷차림이 어우러졌다. 하얀색과 주황색, 분홍색의 색조가 겹치며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원형으로 모인 기녀들의 모습은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났다. 하지만 꽃의 화려함은 덧없는 것. 이윽고 벚꽃이 지는 것처럼 꽃잎들이 무대 뒤쪽으로 물러났다.

남아있는 꽃잎은 단 하나.

로사리오와도 비슷한 붉은빛의 호패를 가슴에 장식한 은빛의 여성만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시작은 인사였다. 짧은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인 무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피?”

어디서 본 것 같은 은발이라고 생각했더니,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건 바로 13황녀인 유피에르 바토리였다.

왜 그녀가 무대 위에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왜 무희로 변장하고 있는 거지?

당황하지 말자. 알베르트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유피가 쓰던 연희라는 가명. 낙양의 무희 출신. 청화에게 보낸 전서구.

정공법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아벨 황자는 유피의 방문을 거절했으니까. 그럼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들어올 방법은 몇 되지 않았겠지. 청화는 귀화루의 루주다. 기녀들을 관리하는 그녀가 유피를 아벨 황자 모르게 성 안으로, 그것도 연회장으로 들여보낼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화가 많이 났겠군.”

알베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대 위에 있는 유피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희 차림을 한 그녀의 속은 뒤집혀 있을 거라고, 알베르트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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