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황자 아벨 워스테인(1) (5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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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황자 아벨 워스테인(1)

이야기를 마친 알베르트와 유피는 양양의 거리로 나왔다.

대로에는 해가 떠올라 있었다. 짙게 어려있던 안개가 흩어졌다. 간밤과는 또 다른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을 가지고 흥정하는 상인과 아낙네의 모습이 보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무거운 얼굴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과 벽보를 보며 혀를 차는 마족들도 눈에 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은, 제국의 거리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유피는 양양 성으로 바로 향하지 않았다.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확인한 그녀는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보이는 2층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 가게에서 가장 잘하는 음식으로. 2인분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알베르트는 유피의 찻잔을 채웠다.

그 사이 유피는 가슴섶에서 한 인형을 꺼냈다. 하얀 비둘기처럼 생긴 인형은 유피가 마나를 불어넣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발에 작은 서신을 실은 유피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아벨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어. 답장이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자.”

따뜻한 차를 입으로 가져가는 유피를 본 알베르트는 자신의 찻잔을 확인했다.

딱히 물을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식욕도 없고, 손이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호기심은 있었다. 과연 이 상태에서 물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베르트는 사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차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검지와 따뜻한 차가 닿는다. 살며시 내공을 흘려보자 손가락이 차를 빨아들였다.

차가 줄어듦과 동시에 알베르트는 따뜻한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입을 통해 마시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몸 안으로 직접 물을 때려 박는 기분이다. 색다른 느낌에 알베르트는 한 번 더 찻잔을 채웠다. 차에 접한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중독될 것 같은 묘한 감각이었다.

“맛있어?”

유피는 그런 알베르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다기보다는, 신선한 느낌이야.”

“신선해?”

“상쾌한 기분이 들거든.”

“흐응.”

점소이가 가져온 요리가 식탁을 채웠다.

닭고기와 정체 모를 고기를 조리한 것으로 보이는 요리가 상을 채우고, 빵과도 비슷한 한 입 거리의 반찬이 올라왔다. 요리 대부분이 기름진 음식으로 보인다. 건강에 썩 좋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젓가락을 든 유피는 무서운 속도로 요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은 지 아직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유피의 식도락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건 양이 너무 많았다.

“폭식은 몸에 좋지 않아.”

“됐어. 지금은 좀 먹고 싶은 기분이야.”

아벨 황자 때문인가.

알고 싶지 않았던 오빠의 유흥 소식을 들은 유피는 그 짜증을 먹는 거로 푸는 듯싶었다.

“그럼 품위라도 지키면서 먹으면 안 될까? 남이 보기에 안 좋아.”

“딱딱한 소리하지 마.”

맛있는 음식을 입에 담은 탓일까, 유피의 목소리는 조금 밝아져 있었다.

눌러쓴 후드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오물오물 바쁘게 입을 움직였다. 깨작대는 식사가 아니라, 맛있게 먹는 그 모습에 알베르트는 식탁 위의 요리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양은 많다. 한 사람, 그것도 아가씨인 유피가 먹기에는 터무니없이 많다. 약간이라면 자신이 먹어도 괜찮겠지.

알베르트는 닭고기를 향해 손가락을 옮겨보았다. 차를 마시던 것과 똑같다. 손가락은 닭고기를 그대로 빨아들였다. 무언가 무거운 느낌의 질량이 몸 안을 채우는 것 같다. 고기를 빨아들이던 알베르트는 손가락을 떼었다. 상쾌한 기분이 들던 물과는 다르다. 뭔가 덩어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몸 안에 어려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돌연 유피가 볼멘 목소리를 냈다.

“무슨 짓이냐니?”

알베르트의 반응에 유피는 손가락으로 요리를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푸르딩딩한 색으로 변한 닭고기가 있었다.

“알. 그 상태로 음식을 먹는 건 정기흡수(精氣吸收)랑 비슷한 개념이야.”

“정기흡수? 진짜 언데드잖아, 이건.”

“언데드가 아니야. 스켈레톤의 식사법이야.”

“스켈레톤이 언데드….”

“아니야, 달라.”

“…….”

양보할 생각이 없다. 강경한 유피의 태도에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손을 내렸다. 음식을 먹는 건 그만두자. 이러다가는 정말로 언데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식사를 끝마친 유피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요리는 3인분과도 같은 2인분이었는데, 그 많은 양을 먹고도 유피는 아직 양이 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온 차까지 깔끔하게 마신 유피는 손을 들었다.

하얀 손가락 위로 서신을 물고 온 비둘기 인형이 내려앉았다.

“난처하게 됐네. 아벨 오빠는 날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서신을 읽은 유피는 종이를 꾸깃꾸깃 접었다.

그녀의 손에서 생긴 작은 화마는 그대로 종이를 먹어치웠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정면에서 두들기든지, 무단으로 침입하든지 해야지.”

“후자는 별로 좋은 이야기로는 안 들리는데.”

황자가 사는 성에 몰래 잠입한다니. 무모한 짓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알베르트의 차분한 말에 유피는 테이블을 두들겼다. 생각을 정리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품 안으로 손을 옮겼다. 서신을 하나 더 꺼낸 그녀는 전서구를 띄웠다.

이번에는 성 쪽이 아니다. 하늘로 날아간 전서구는 성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누구에게 보낸 거야?”

“이 상황을 타개해줄 사람에게.”

“그런 조력자가 있었어?”

“어젯밤에 얻었잖아.”

귀화루의 루주인 청화에게 보낸 모양이다.

아벨 황자가 심어놓은 사람이니,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단 상황을 조금만 더 지켜보자. 아, 여기 만두 2개만 더.”

“알겠습니다! 빈 그릇은 치워드릴게요.”

식기를 치우러 온 점소이에게 유피는 추가 주문을 넣었다.

“그만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야.”

알베르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낸 유피를 응시했다.

그녀가 음식에 집착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취소할게.”

“누구 마음대로?”

“유피.”

“먹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만두는 꼭 먹고 갈 거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알베르트는 무심코 얼굴로 손을 올렸다.

식사와 관련해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다. 거절의 의사를 밝힌 유피는 발코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말을 붙이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알베르트는 유피의 시선을 쫓았다.

굳건히 닫힌 문 앞에는 창을 꼬아 쥔 문지기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성으로 들어가는 긴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마차를 타고 온 귀인만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을 뿐이지, 신분증을 확인하는 방문객들은 대부분 문 앞에서 걸러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성벽을 넘어야 할지도 몰라.”

“월담을 하자는 거야?”

어디의 빈집털이범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성벽을 넘자는 유피의 제안에 알베르트는 당황했다.

“정 안 됐을 경우의 이야기야.”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해도 담을 넘는 건 아닌 것 같아.”

“알고 있어. 일단 정공법으로 나가보자.”

유피는 점소이가 들고 온 만두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집사의 기분이 두 쪽 난 건 상관없다. 젓가락을 든 그녀는 즐겁게 식사를 재개했다.

*&*

추가로 나온 만두까지 깨끗하게 비운 뒤에야 유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친 유피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양양 성에 들어가기 위해 둘은 줄의 끝으로 향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수는 대략 스무 명 정도로 보였다. 줄이 빠지는 시간을 보았을 때, 좀 기다려야겠지. 알베르트는 슬쩍 유피의 배를 보았다. 펑퍼짐한 로브 때문인지, 그녀의 특정 부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평소보다 더 나와 있지 않을까.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낀 유피는 로브를 잡아당겼다.

“어딜 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다음부터는 적게 먹었으면 좋겠어.”

“내가 먹는 양까지 일일이 관리할 생각이야? 왜? 돼지라도 될까 무서워?”

“유피가 살이 찌는 건 괜찮아.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뒤의 이야기야.”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건 절대 좋은 식습관이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식사 때문에 무너졌다. 사교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식사로 푼 그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겉모습이 달라졌고, 변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여인들은 사교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말로를 기억하는 알베르트는 유피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랐다.

“폭식은 몸의 균형을 무너뜨려. 차라리 평소에 먹는 양을 늘리는 쪽이 나아. 유피가 원한다면 식사량을 늘려줄게.”

“…….”

알베르트의 진심이 담긴 대답에 유피는 실소를 흘렸다.

“너 진짜 특이한 녀석이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행상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성 안에 들어서기 위해 문지기와 피 튀기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이 파는 물건이 남자의 정력에 좋다느니, 양기를 얻는 데는 이만한 물건이 없다느니. 마치 사기꾼처럼 이리저리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성문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침내 차례가 온 유피와 알베르트는 문지기와 얼굴을 마주했다.

“양양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신분증부터 제시해주겠습니까?”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를 건넨 문지기의 안색은 어두웠다.

방금 전까지 행상인과 실랑이를 벌인 터다. 이 이상 상대하기 곤란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사양하고 싶은 눈치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유피의 행색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더러운 로브와 입가만 간신히 드러나는 후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거기에 일행이라는 사람은 검은 연미복을 입은 스켈레톤이다. 어딜 봐도 신용할 수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쩐지 창을 쥔 문지기의 손이 하얗게 물든 것 같았다.

유피는 로브 안쪽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문지기에게 건넸다.

“연희? 낙양 출신이군요. 성에 찾아온 용무는 어떻게 되십니까?”

“황자님을 뵈러 왔어요.”

“…….”

당당한 유피의 대답에 문지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혹시 아벨 황자님과 따로 약속을 잡아놓으신 겁니까?”

“편지가 도착했을 거예요.”

유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물론 아벨 황자는 그녀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문지기는 다른 병사를 불렀다. 두 사람은 알베르트와 수상쩍은 유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알베르트는 귀를 기울였다. 내공으로 강화된 청각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잡아냈다.

“뒤늦게 오기로 한 일행이 있었던가?”

“연희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들여보내는 게 좋지 않겠어?”

“같이 온 일행은?”

“그 사람이잖아. 따로 이야기해봐야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유피를 착각한 것 같다.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연희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이쪽 친구가 길을 안내할 겁니다. 하지만 그쪽 분은, 잠시 저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로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알베르트와 유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려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떨어지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머뭇거리는 알베르트를 보던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에서 보자, 알. 일이 끝나면 귀화루에서 보자.”

“알았어.”

병사의 안내에 따라 유피는 성 안쪽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문지기와 알베르트다. 그는 다른 문지기와 이야기를 나눈 뒤 알베르트를 보았다.

“대협은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

“무진 대장님을 뵈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알베르트는 문지기의 말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젯밤 주먹을 나눴던 무진이 그를 성으로 초대했었던 일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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