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귀화루(鬼花樓)(3) (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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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루(鬼花樓)(3)

치료실을 나오자 문 앞에는 유피가 서 있었다.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발걸음을 떼었다. 복도를 지나 1층 홀로 향한다.

“에일린은 그대로 내버려 둘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전부 해줬어.”

정신이 들면 알아서 갈 길을 가겠지, 하고 유피는 덧붙였다.

알베르트는 마지막으로 치료실을 돌아보았다. 에일린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왜 상처를 입은 그녀가 그곳에 있었던 건지는 알 길이 없다. 수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금지된 숲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건,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능하다면 에일린의 속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그런 시간은 없으리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이곳에 계속 머물 이유는 없었으니까.

에일린이 지체없이 이곳을 떠난다면 아마 그녀와 다시 만나는 건 힘들겠지.

마음속으로 에일린과 작별인사를 마친 알베르트는 유피의 뒤를 따라갔다.

이른 시간임에도 귀화루의 홀은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지럽혀진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건 기녀들이었다. 밤사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기녀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서로를 오가는 대화에는 활기가 실려 있었다.

“어떻게 할래? 바로 궁으로 갈까?”

“아니, 잠시 소하 언덕에 대해서 알아보자.”

“소하라면 봉쇄됐다는 언덕을 말하는 거네.”

“맞아. 아벨 오빠도 봐야 하지만, 몽환기는 소하 언덕에 있거든.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요약하자면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 같다.

마침 이곳은 정보가 오가는 기루다. 기녀들을 잘 설득할 수만 있다면 여러 이야기를 듣는 게 가능할 터다. 다행히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기녀들은 알베르트와 유피의 물음에 우호적이었다.

“소하 언덕이요? 출입 금지구역이 된 지 좀 됐어요.”

“관광하러 오신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못 들어가요. 아벨 황자님이 직접 명령하신 거여서, 근처만 가도 쫓겨나요. 주변에 관병이 가득하거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제 2년 정도 됐을걸요?”

“혹시 안쪽에서 아벨 황자님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도 벌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가희는 친한 동료인 호접희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왜? 하고 호접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 모르시나 봐요? 이 유곽에서 별궁의 내부 구조를 모르는 기녀는 없을걸요?”

“이 가시나가….”

“뭐, 어때.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신세 진 은인들이니까 이 정도는 알려줘야지. 우리 황자님이라지만, 너무 밝히시는 게 문제에요.”

“…….”

유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원래 영웅 중에서 여자를 거절하는 이는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부르기만 할 뿐이지, 손을 대시는 건 아니잖아?”

아벨 황자를 변호하는 가희의 말에 호접희는 손사래를 쳤다.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실까?”

“진짜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가능하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소하 언덕 말인가요?”

“아니, 아벨 황자님에 대해서.”

유피의 뒤에서 스멀스멀 그림자가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호접희의 입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움직였다. 아벨 황자님의 어디가 어떻고, 여자는 어떤 사람이 취향인지, 최근 양양 성으로 들어간 기녀는 누구인지. 알베르트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아벨 황자의 치부가 쏟아지고 있었다.

[남자는 다 똑같군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지 않겠나.’

유피는 기녀들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그녀의 등을 지키고 있던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에는 급하게 들어온 터라 잘 보지 못했던 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석은 넘어 보이는 안쪽의 테이블과 외부석. 원형 계단 반대쪽에는 커다란 무대가 있었다.

무대를 정리하고 있는 기녀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아가씨들이었다. 그중에는 어젯밤 방을 안내했던 송이의 모습도 보였다.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목에서 익숙한 물건이 흔들렸다.

“로사리오?”

두 눈을 의심했다. 마족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물건이 송이의 목을 꾸미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루미에르 교의 성물을 왜 혼혈인 그녀가 차고 있는 걸까?

“유피.”

“그래? 아벨 황자님이 말이지….”

알베르트의 부름에 유피는 손을 들었다. 이야기라면 잠시 뒤에 하자는 눈치다.

가희와 호접희만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기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이곳저곳을 만지신다니까요.”

“솔직히 말해봐. 너도 좋았잖아? 혹시 알아. 황자님의 첩이라도 되면….”

“못하는 말이 없네, 정말!”

“아, 언니는 빠져요. 용살자 공자님이 있잖아요.”

“조만간 결혼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몰라. 위에서 낙적(落籍) 이야기가 나온다던데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좋아했다는 말이지, 아벨 황자님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리 귀화루의 3대 기녀가 다 모였는데 말이에요.”

“큰 언니까지 행차했으니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죠!”

뭔가 이야기를 걸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녀는 기녀와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자, 유피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잠시 다녀오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발을 돌린 알베르트는 무대를 청소 중인 기녀들에게 다가갔다.

깔깔거리던 기녀들이 다가오는 스켈레톤을 보고 입을 닫았다. 아직 나이가 앳된 소녀들이 많다. 알베르트를 알아본 송이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알베르트 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이야, 송이야.”

“스켈레톤? 아니, 이 손님은 누구야?”

“말조심해! 어젯밤 그 대협 분이야.”

“아!”

알베르트가 누군지 알아차린 기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마워요, 감사했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기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바빠 보이네.”

“매번 하는 일이에요.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거기에 혼자서 하는 일도 아니다.

주변에 있는 기녀들도 대걸레를 다루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내고, 남은 흙먼지를 걸레로 닦아낸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호흡은 일의 능률을 높이고 있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말이야.”

“묻고 싶은 거요?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말씀드릴게요.”

송이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알베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다르지만, 마치 아가씨의 어릴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슴 크기 같은 건 못 알려드려요. 직접 보거나 만지시는 건 되지만요.”

“물론 대금은 한 바구니로 주셔야 해요.”

“송이가 만질만한 가슴이 있던가?”

“성장이 더뎌서 아직 손님도 못 받는 기녀라니. 아마 송이가 처음이지 않을까?”

“대협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송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깔깔대는 기녀들의 기운이 활기차다.

젊은 사람들은 다 이런 걸까. 티격태격하는 기녀들의 모습을 알베르트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만약 얼굴에 살이 붙어있었다면 그는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이 스켈레톤이라는 것에 알베르트는 안도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그 로사리오 말인데. 어디서 난 거야?”

“로사리오?”

목에서 흔들리는 로사리오를 가리키자, 송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십자패(十字牌) 말씀이시군요.”

“십자패? 로사리오가 아니라?”

뭔가 생소한 이름이 나왔다.

“눈치 없기는. 십자패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잖아.”

“이래서야 언제나 한 사람분의 기녀가 될련지. 이 언니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아래?”

송이는 친구들의 말에 손을 올렸다. 십자패의 아래에 있는 것. 만질 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평평한 가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희들 진짜! 계속 이럴 거야?”

“꺅!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머어머, 아가씨. 방금 들었어요? 어디 이런 품위 없는 기녀가 다 있을까요.”

“정말이네요. 화를 내도 저속한 말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어디 출신인지 벌써 궁금하네요.”

“설마 귀화루는 아니겠죠? 유곽 중에서도 이름 있는 기녀들만 가득한 곳인데 말이죠.”

“너희들도 손님을 받기 시작한 건 지난주부터잖아!”

이런 식으로는 끝이 나지 않겠다. 알베르트는 상황극을 이어가는 기녀들의 말을 끊었다.

“괜찮다면 조금 봐도 될까?”

“네, 여기 있어요.”

씩씩대던 송이는 흔쾌히 허락했다. 십자패를 푼 그녀는 알베르트의 손에 올렸다.

알베르트는 송이가 준 십자패를 살펴보았다. 십자가 모양을 한 성물은 어느 모로 보나 루미에르 교의 로사리오와 똑같았다. 차이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딱 하나. 십자패의 뒤쪽에는 토끼를 그린 것 같은 동물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교의 성물이에요. 신도들이라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답니다.”

“신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니다. 분명 라피엘이 언급했었던 교단의 이름이었다.

알베르트가 시선을 들자, 주변에 있던 기녀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송이가 준 십자패와 동일한 물건이 그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귀가 어두우시네요, 대협. 요즘 신교를 모르는 마족이 어디에 있나요?”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우리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숭배하는 자.”

“이것이 달토끼(月兎)님이 만드신 월편(月䭏)이니. 이를 몸에 받아들이는 자,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길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낸 기녀들이 꺄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종교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알베르트의 물음에 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는 말이에요.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신명(神明)으로 받드는 종교랍니다. 이를 천지신명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본래는 한 분이지만, 일신(日神), 월신(月神)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달토끼님을 섬기고 있어요.”

“다프네 여신님이 아니라?”

“다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저희는 여신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천지신명과 소통할 수 있는 달토끼님을 섬겨요.”

“꽤 오래된 종교 같네.”

“맞아요. 역사가 무려 수천 년이나 돼요. 두각을 드러낸 건 최근이지만 말이에요.”

신교는 루미에르 교가 아니다.

송이의 이야기를 들은 알베르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종교라는 건 하루아침에 세울 수 있는 모래성과는 다르다. 교리와 전통. 그 안에서 쌓은 교칙은 이미 하나의 역사와 같았다.

하지만 로사리오와 십자패가 같은 모습인 건 과연 우연일까?

두 종교의 성물이 같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전부 선녀님 덕분이랍니다. 선녀님이 오신 뒤로 신도가 확 늘어났거든요.”

“선녀님?”

“네, 달토끼님은 두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했죠? 그에 따라서 해의 선녀님과 달의 선녀님이 계시는데, 현재는 해의 선녀님이 자리를 지키고 계셔요.”

“…….”

선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알베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천칭과 같은 성좌. 악몽 속에서 만났던 쌍둥이가 남겼던 말이다. 분명 녀석은 유피를 구하고 싶다면 루미에르 교의 성녀나 이신설교의 선녀를 찾아가라고 했었다. 조각이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신교, 신교…. 그런가, 신교가 이신설교였구나.”

“맞아요, 알베르트 님.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 신교의 본이름은 이신설교에요. 줄여서 신교. 꼭 전설 속의 마교와도 비슷하죠? 그들도 원래는 천마신교잖아요.”

순수한 송이의 미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신설교와 루미에르 교. 선녀와 성녀. 십자패와 로사리오. 달토끼와 다프네 여신님. 동전이 생각났다. 초상화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같은 앞면과 뒷면. 두 종교는 마치 마족과 인족 같았다.

이 모든 게 정말로 우연인 걸까?

[마스터. 뭔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나?’

[마스터의 의심은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 되는 겁니까?]

‘그건….’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천칭은 자신이 쌍둥이와 만난 것을 알지 못했다. 악몽 속에서 있었던 이야기. 쌍둥이와 나눈 수상쩍은 문답. 천칭에게 숨겨야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라피엘이 말했지 않았는가. 신교라는 사교도에 대해서.’

[그런 일도 있었죠. 분명 이상한 소문을 흘리고 다닌다고 했었죠.]

천칭의 물음을 넘긴 알베르트는 송이에게 십자패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선물로 드릴게요. 알베르트 님이 관심을 보여서 하는 말인데, 토요일 저녁에 집회가 있을 예정이거든요. 십자패가 있으시면 집회에 들어오실 수 있으니까, 한 번 찾아와주세요. 알베르트 님이라면 모두 환영할 거예요.”

“집회라면,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이번에는 선녀님이 오신다는 말도 있으니까,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실 거예요.”

쌍둥이가 언급했던 이신설교의 선녀.

만약 그녀와 만날 수 있다면 알베르트가 가진 의문이 하나 해결될지도 몰랐다. 알베르트는 손 안에 남은 십자패를 연미복 안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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