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귀화루(鬼花樓)(2) (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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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루(鬼花樓)(2)

단장을 마친 유피와 알베르트는 귀화루의 치료실로 향했다.

의녀가 머무르고 있는 방은 어젯밤에 본 것처럼 1층 끝에 있었다. 4층에서 내려갈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 아니라면 물어보기 힘들지 않을까. 고민 끝에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유피. 괜찮으면 어젯밤 일로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젯밤? 아아, 루주와 나눈 이야기 말이야?”

생각외로 유피의 대답은 부드러웠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정체를 숨기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잘 이해가 가질 않아서 말이야. 굳이 정면에서 그럴 것 없이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네. 알이 말이 맞아. 그 자리에서 시치미를 떼는 방법도 하나의 길이었겠지. 하지만 괜찮아. 그 루주,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서 접근했다는 말이야? 그런 거라면 더 조심해야….”

“달라. 변태 오빠는 성 곳곳에 사람을 심어놓았거든. 루주가 하오문의 문주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와 비슷한 정보상인 건 확실하니까. 애초에 오빠는 혼혈 마족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소하 언덕을 봉쇄한 시점에서 양양 성이 뒤집혔을 거야.”

변태 오빠라는 건 혹시나 하지만 아벨 황자를 말하는 걸까.

알베르트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굳이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잖아.”

“있었지, 봐. 덕분에 쓸만한 패를 하나 얻었잖아?”

최대한 협조해주겠다는 청화의 말.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유피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잘 풀렸으니까 망정이지. 잘못됐으면 어떡할 생각이었어?”

“음, 증거인멸?”

“유피.”

“그럴 일은 없어. 루주는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거든.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하는 법인가 봐. 선행은 베풀면 돌아오기 마련이네.”

이해하지 못하는 알을 보며 유피는 빙긋 웃었다.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오늘은 아벨 황자를 만나러 갈 거지? 이야기는 되어있어?”

“내가 들어온 건 알고 있을 거야. 일단 편지부터 보내야겠지. 뭐, 만나줄지는 모르겠어.”

“시더 황자랑은 달리 사이가 안 좋나 보네.”

“안 좋은 건 아니고, 조금 껄끄럽다고 해야 하나.”

“껄끄러워?”

“그런 게 있어. 아벨 오빠는 대하기 힘든 사람이거든.”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얼굴에 어린 감정은 곤혹감에 가까웠다.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지만, 우호적이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이인 걸까? 알베르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벨과 시더를 지웠다. 이전의 기억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황자인 시더 아르테니아도. 5황자인 아벨 워스테인도.

둘 모두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유피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유피와 검을 들이대는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리라.

“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어?”

이번에는 위험한 화제다. 알베르트가 조심스럽게 묻자 유피는 걸음을 멈췄다.

“알이 들은 게 전부 맞아. 나는 현자의 제자야. 그리고 그 여자가 말한 대로 황녀임에도 인족의 피가 섞인 혼혈이지. 잡종 황녀. 그것이 내 어릴 적 호칭이었어.”

“…….”

담담하게 말을 자아낸 유피는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붉은 두 눈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을 읽어낼 수 없다.

유달리 긴 속눈썹도.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도.

살짝 홍조가 돌고 있는 볼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왜? 완벽하지 않은 아가씨여서 실망했어? 네가 모실 만한 주인님은 아니지?”

자조 섞인 유피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즉답했다.

“아니, 유피는 유피야. 내가 모실 수 있는 아가씨 중에서는 두 번째로 뛰어난 사람이야.”

망설임은 없었다. 흔들림 없는 알베르트의 목소리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눈치 빠른 유피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두 눈을 크게 뜬 유피는 멍하니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래, 넌 그런 녀석이었지. 고민했던 내가 바보 같아.”

피식, 하고 그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왜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정해져 있거든.”

“흐응. 그거 질투 나는데? 우리 잘나신 집사님이 그렇게 원하는 주인님은 어디 사는 누구일까? 시더 오빠?”

“아니, 이제 2살이 된 우리 아가씨.”

유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굳었다.

“농담이지?”

“진심이야.”

“그럼 난 2살짜리 아기에게 졌다는 말이야?”

“유피도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실망할 필요 없어.”

“…….”

칭찬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유피는 진지한 알베르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로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모르겠다니까. 됐어, 이제 들어갈까?”

유피는 방문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치료실 앞이었다.

알베르트는 문에 노크를 넣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문을 두들겨본다. 이번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달칵, 하고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약 냄새가 올라온다. 들어와도 좋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인 알베르트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치료실 안은 약재 특유의 쓴 냄새로 가득했다.

한쪽에는 환자가 쉴 수 있는 침대와 의자가 있고, 그 앞쪽에는 의원의 자리로 보이는 책상이 있었다. 빼곡한 수납장에는 명찰과도 비슷한 이름판이 달려 있었다. 청화, 가희(歌姬) 소단예, 호접희(胡蝶姬) 희연. 기루에서 일하는 기녀들의 이름 같다.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방의 크기도 그렇지만, 가구의 위치를 보았을 때 알베르트가 하룻밤을 지낸 방과 비슷해 보였다. 원래는 객실로 쓰던 방인데, 잠시 치료실로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알베르트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에일린에게 다가갔다.

초록 머리의 혼혈 아가씨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부드럽다. 화살촉이 꽂혀 있던 어깨는 깨끗한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 위에는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새어 나오는 숨결은 뜨겁지 않다. 몸의 열도 거의 내려간 거로 보인다. 의원의 조치가 완벽했던 모양이다.

유피가 방 이곳저곳의 약재를 살펴보고 있는데, 안쪽에서 누군가가 쪼르르 걸어 나왔다.

하얀 옷차림의 소녀였다. 검은 머리를 가슴 앞쪽으로 넘긴 그녀는 방 안에 들어온 알베르트와 유피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이 소녀가 기루의 의녀인 모양이다.

“의녀 분이신가요?”

“…….”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알베르트를 응시하던 그녀는 몸을 돌렸다.

소녀는 약이 쌓여있는 책상에서 하얀 판과 깃펜을 들었다. 당황한 알베르트와 유피를 내버려 둔 채, 그녀는 판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소녀는 알베르트를 향해 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치우 아란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제야 알베르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귀화루가 자랑하는 의녀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당신, 말을 하지 못하는 거야?”

유피의 물음에 아란은 판을 내려놓았다. 썼던 글을 지운 그녀는 펜을 놀렸다.

「죄송해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답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에일린을 데려오신 분들인가요?」

“에일린?”

유피가 반문했다. 아란은 침대 위에서 쉬고 있는 환자를 가리켰다.

“아, 그런 이름이었나 보네.”

「모르는 사이신가요?」

“죽어가던 걸 주워왔거든. 생판 모르는 남이야.”

「인명구조?」

“산제물로 쓸 생각이야.”

유피의 대답에 깜짝 놀란 아란은 황급히 판의 글자를 지우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는 펜을 휘갈기듯이 움직이더니, 날아가는 것 같은 글씨를 쓴 판을 들었다.

「안 돼. 사람, 생명. 대체, 불가능.」

“농담은 이쯤하고. 그래. 꽤 실력이 괜찮은가 보네. 하루 만에 안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멀쩡해진 걸 보니까 말이야.”

아란은 이어지는 유피의 말을 듣지 못했다.

농담이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두 분 다 이쪽으로 오세요. 오후에는 저도 출장이 있는지라, 지금밖에 시간이 없네요.」

아란은 책상 위의 약재와 진료 도구를 챙겼다. 멍하니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의자를 두들겼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두 분 다 진료받으러 오신 거 아닌가요?」

아침부터 치료실로 찾아온 두 남녀. 의녀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환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알베르트는 그녀에게 볼일이 있었다.

“환자는 저 혼자입니다.”

「그쪽 아가씨는요?」

“나는 괜찮아.”

아란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는 진료를 받기 위해 그녀의 앞에 앉았다.

마족의 의술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피의 치료마법은 신성력과 비슷하게 행해지기 때문에, 알베르트가 참고할 수 있는 치료법이 아니었다.

「웃옷 좀 벗어주실래요?」

알베르트가 연미복을 벗는 사이 아란은 의료용 가방을 꺼내왔다.

판을 내려놓고 의료도구를 테이블 위에 올린 그녀는 먼저 알베르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늑골과 의녀의 손이 맞닿았다. 따뜻한 손바닥에서 한 줌의 기가 흘러들어 왔다. 아란의 기는 천천히 몸 안을 돌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돌고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기는 척추를 타고 양쪽 사지로 뻗어 나갔다. 머리까지 확인한 기운은 다시 가슴 쪽으로 모였다. 월아가 찌른 부분에 한동안 머물러 있던 기는 음기와 부딪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더 그녀의 손에서 기가 들어왔다. 가슴의 음기와 의녀의 기가 부딪쳤다. 시큰거리는 통증에 알베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가볍게 맞닿은 것뿐인데, 그 손끝에서 나온 기운은 음기를 자극했다.

「평범한 음기가 아니네요. 이런 극음의 기운을 남길 수 있는 무기는 많지 않아요. 구천검(九天劍), 칠성검(七星劍), 빙백검(氷白劍), 한결지검(寒結之劍). 아니, 아무리 그런 명검이 남긴 상처라도 이런 흔적을 남기지는 못해요. 시간이 흘러도 빠져나가지 않는 극음의 기운이라면, 달에 깃든 전설적인 기운이 아니고서야···.」

달.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그녀는 판 위에 새로운 글자를 썼다.

「월아?」

“대단하네. 기루의 의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솜씨야. 맞아. 그 상처는 월아가 남긴 기운이야. 어때, 치료할 수 있겠어?”

유피의 물음에 아란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침통을 꺼내고, 하나하나 침을 확인한다. 원했던 침이 없는지 그녀는 침통을 던지고 가방 안으로 다시 손을 넣었다. 하얀 종이에 둘러싸인 몇 가지의 약재를 꺼낸 그녀는 냄새를 맡아보고, 뿌리 부분을 씹었다. 우물우물, 쓰디쓴 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던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현재 제가 가진 도구로는 치료할 수 없어요.」

“도구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말이야?”

「음기에도 종류가 있고, 그에 따른 치료법이 달라요. 가령 마법으로 입은 냉상(冷傷)과 자연의 한기로 인해 입은 동상(凍傷)은 조합하는 약초의 배분이 다르죠. 명검에 인위적으로 어리게 된 음기는 마법의 힘을 빌리거나 제가 조합하는 약초와 은침(銀鍼)으로 치료할 수 있어요. 다만, 달의 기운은 평범한 음기와는 달라요. 부정한 모든 것을 씻겨낼 때까지 신성한 달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아요. 괜히 천마가 사용했다는 전설의 검이 아니에요. 몇 가지 조치를 하고 나면 5할 정도지 아닐까 싶어요.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아란은 손목을 털었다.

판을 빼곡 채운 글을 지우는 그녀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말을 대신 이어받았다.

“월아로부터 인정받는 것, 그 방법뿐인가요?”

환자의 물음에 아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낡은 검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 음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몽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음기는 치료할 수 없지만, 타버린 혈도는 어느 정도 만질 수 있어요.」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아란의 기가 알베르트의 몸으로 타고 들어왔다.

무언가 물컹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은 혈도를 쓰다듬었다. 아란의 기가 지나간 자리에 작은 덩어리가 남았다. 덩어리는 마치 물처럼 녹아들더니, 알베르트의 혈도로 흡수되었다. 치료를 마친 아란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몸을 험하게 굴리셨네요. 마기(魔氣)를 사용할 때는 항상 주의하세요. 이 힘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르는 위험한 힘이니까요.」

“마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한결 가벼워진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알베르트가 반문했다.

「내공과 마기를 같이 사용하는 비기를 다루신 게 아닌가요? 이런 상처는 대부분 처음으로 마기를 각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환자분은 꽤 경지가 높은 무인으로 보이니 그런 건 아닐 테고. 비기를 무리해서 사용한 거 아니신가요?」

아란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전 마기를 쓴 게 아니라 내공을 썼습니다.”

「그래요. 마기와 합한 내공이요.」

“그게 아니라, 순수한 내공입니다. 전 마기를 다룰 수가 없어요.”

「사람을 너무 놀리면 못써요. 본신까지 드러낸 사람이 마기를 못 다룬다니요.」

“그러니까···.”

“거기까지 해, 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털어놓는 알베르트의 말을 유피가 잘랐다.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알베르트는 인족이고, 아란의 말은 마족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판에 글을 쓰다 멈추고, 고민하는 아란을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 대금은 얼마나 주면 될까?”

「주실 필요 없어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도 들었거든요.」

“저 아이는 정신을 차리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해.”

「인사는 따로 안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걸 바라고 구해준 게 아니야.”

유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끝났다. 그녀는 치료실을 뒤로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알베르트는 마지막으로 아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의녀는 그 손을 잡았다. 돌아보자 아란은 판을 들고 있었다.

「전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니, 몸 상태가 나빠지면 사양하지 말고 찾아오세요.」

친절한 그녀의 의사에 알베르트는 두 손을 모았다.

혹여라도 몸 상태가 나빠지면 이 의녀를 다시 찾아오자. 그는 치료실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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