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양양(襄陽)(3)
무진의 손에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독한 술로 범벅이 된 녀석의 손에는 진한 알코올 냄새만이 가득했다.
적수공권(赤手空拳).
그러나 그 기도는 앞서 싸웠던 검수들과는 다르다. 형형한 안광이 무진이 쌓아 올린 무를 느끼게 만든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내공이 주변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관중들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무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서일까.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보고 있던 알베르트와 무진 중, 먼저 움직인 쪽은 후자였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가지!”
무진의 발이 땅에 닿자 지면이 푹푹 패였다.
알베르트가 보였던 한 수가 그 발아래에서 막무가내식으로 재현됐다.
진동을 잇는 진동. 둔중한 충격을 땅에 퍼뜨리는 것과는 동시에 거리를 좁힌 무진의 주먹은 알베르트를 향해 떨어졌다.
“오오!”
권기와 맞닿은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검신의 끝으로 타점을 흘린 알베르트의 검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따라오는 주먹을 떼어내고, 그 팔을 타고 찌르기가 올라간다. 기묘한 검로다. 뱀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다. 무진은 주먹을 들었다. 목을 노린 찌르기가 권기에 막힌다. 예리함이 부족하다. 검기를 두르지 않은 검으로는 녀석의 주먹을 뚫을 수 없다.
알베르트의 정수리가 비었다.
무진의 주먹이 뻗어졌다. 검과 주먹이 맞물렸다. 격음은 울리지 않았다.
무진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부술 기세로 뻗어진 주먹은, 이번에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빈 곳을 때린 것 같다. 정면으로 떨어졌을 터인 주먹이, 검신을 타고 미끄러졌다. 뻗어도, 뻗어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검과 주먹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처럼 둘의 움직임이 일치했다.
“잔꾀를 부리는군!”
무진의 기세가 바뀐다.
체중을 이용한 권이 격렬한 흐름을 탄다. 주인의 부름에 응하듯, 권기가 날카로워졌다. 검으로 맞받을 수 없다. 타점을 흘리기에는 파괴력이 너무 강하다. 검과 함께 알베르트를 분쇄하기 위한 주먹. 그저 파괴한다는 목적을 위한 폭력이다.
손등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무진의 주먹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알베르트의 손목을 스쳤다.
“설마, 노렸다는 거냐?”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눈앞에 둔 무진이 소리쳤다.
무진의 일격을 본 알베르트의 검이 세 번의 변화를 보였다. 한 번은 주먹 끝의 경로를 쳐내고, 한 번은 손목 안쪽을 치고, 마지막 한 번은 손등을 훑었다. 권로(拳路)가 흔들린 것이 당연하다. 세 번의 타격. 내공으로 강화된 손에 상처를 입힐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을 흔들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노도와 같이 쏟아지는 무진의 일격 안으로, 검을 집어넣는다고?
그걸 달성한다는 건 단순히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 기세를 뚫고 들어갈 담력과 실천하는 대범함, 눈앞의 상대는 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술기운이 달아나는 느낌이다.
무진의 입가에서 메마른 웃음이 떠올랐다.
“좋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방금 전의 일격은 헛수고가 아니다.
비록 알베르트의 검을 부수지는 못했지만, 이 기세를 이어간다면 녀석도 함부로 검을 맞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실제로 지근거리에서 행해지는 무진의 주먹을, 알베르트는 이제 받아내지 못했다. 타점을 완전히 흘려내지 못한다. 주먹과 검신이 부딪칠 때마다 초라한 스켈레톤의 몸이 흔들렸다. 충격을 줄여내지 못한다. 지면과 맞닿은 다리는 흔들림이 커지고 있었다.
뒷골목의 파락호로 살아온 무진의 공격은 단순하다.
외공으로 강화된 주먹을 적이 쓰러질 때까지 내지른다. 거기에는 상대방을 현혹하는 기교함도,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도 없다. 있는 것은 단 하나. 압도적인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일절의 기술도 요구하지 않는다.
일절의 재능도 필요 없다.
범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노력의 끝에 얻은 단순한 정권 찌르기.
그러나, 그렇기에 강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스켈레톤 형씨가 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예끼, 이 사람아. 잘 보게나. 다 피하고 있지 않은가?”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잘 보라고. 충격을 다 줄이지 못하잖아.”
줄다리기의 추가 한쪽으로 넘어간다.
위화감을 느낀 관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무진의 주먹을 피하고, 흘리는 알베르트의 움직임은 아름답다.
화려한 검무(劍舞)와도 비슷하다. 맞으면 독수(毒手)가 될 일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다. 그럴 수 없는 일격은 검으로 흘려낸다. 하지만 권기에 실린 권압은 버텨낼 방도가 없다. 누적된 피해는 이내 결과로 도출되었다.
알베르트의 신형이 흔들렸다.
오른쪽 발이 접질려지며, 일순간 몸의 균형이 떨어졌다. 무진의 주먹이 빛났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지면을 박차고, 모든 걸 분쇄하기 위한 주먹이 뻗어졌다.
주먹과 부딪친 알베르트의 몸이 날아간다.
관중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관중 사이로 날아간 알베르트는 그들과 휘말린 채 건물과 충돌했다. 충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부서진 가옥의 지붕이 무너지고, 쓰러진 알베르트 위로 구조물이 쏟아졌다.
“과연 무진이구먼….”
“스켈레톤 형씨라도 힘들겠어.”
무진은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손에 걸리는 감각은 완벽하지 않다. 녀석은 알고 있었다. 이 일격이 떨어질 것과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주먹이 뻗어지는 그 순간. 놈은 자신의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게 끝이 아니다. 무진이 자세를 맞잡는 것과 동시에 부서진 잔해 안에서 알베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알베르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과 손을 확인했다.
멀쩡한 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
그 모습을 본 무진은 확신했다.
몸 전체가 박살 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격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무사했다. 일부러 맞아준 거다. 이쪽의 노림수가 완전히 읽히고 있었다. 하면, 녀석은 왜 이 일격을 맞은 걸까. 이유가 뭐지? 무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딱 하나였다.
거리.
“실수했다.”
알베르트의 수를 깨달은 무진이 대지를 박찼다.
내공으로 강화된 각력이 지면을 부수며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그 주먹이 알베르트에게 떨어지는 것보다 먼저 검이 무진의 복부에 닿았다.
이번에는 무진의 몸이 날아갔다.
반대쪽에 있던 관중들이 충격에 휘말리며, 가옥에 처박혔다. 충격은 그걸로 죽지 않는다. 두 세개의 건물을 더 통과한 뒤에야 무진의 몸은 비로소 멈추었다. 한 박자 늦게 무진이 통과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 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조물이 쏟아졌다. 관중들의 시선이 날아간 무진을 보았다가 알베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연미복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스켈레톤 형씨!?”
“설마 그 무진을 쓰러뜨리다니···!”
“혹시 용살자(龍殺者) 수준의 무인인 거 아니야?”
“용살자 수준이라면, 소소검(素笑劍)이나 환우도(幻雨刀) 대협과 동급이란 말인가?”
관중의 열띤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무너진 가옥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을 쥔 손아귀의 힘은 그대로였다. 잔해 속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부스럭거리며 갈색빛의 덩치가 몸을 일으켰다. 흡사 곰과 같은 형색을 한 모습이다. 반쯤 깨진 술병에서 흘러나오는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곰은 포효했다.
“----!!!”
관중들이 귀를 막고 몸을 수그렸다.
다음 순간, 알베르트는 곰의 모습을 놓쳤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수차례의 위기를 넘겨온 알베르트는 자신의 감에 반응해 검을 올렸다. 직후, 그 위로 곰의 발바닥이 떨어졌다. 쿵, 하고 전신에 충격이 내달렸다. 지지대로 삼은 지면이 내려앉는다. 간신히 막아낸 발톱 사이로 부엉이를 닮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도 이미 본신을 드러냈으니, 불만은 듣지 않겠다.”
굴욕감이 배여 있는 목소리. 어눌하지만 남자다운 그 목소리는 무진의 음성이었다.
“큰일 났다! 뚜껑이 열려버리셨어!”
“어이, 너희들! 당장 술을 준비해. 테이블을 가득 채울 정도다!”
“빨리 움직여!”
무진의 모습을 확인한 검수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검수의 말을 들은 기녀들이 헐레벌떡 기루 안으로 들어갔다.
무진은 본신인 아울베어(Owlbear)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본신을 드러낸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찌릿찌릿한 마기를 느끼며 알베르트는 무진을 밀어냈다.
아니, 밀려난 것은 오히려 알베르트였다.
단단한 벽과 마주한 것처럼 무진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인 이상, 곱게 넘어간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알베르트의 두 다리가 꺾였다.
역으로 밀려났다. 지면을 파고든 다리는 계속해서 추락한다. 단순한 힘겨루기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 이미 두 손과 검은 무진의 힘에 휘말려 있다. 다리는 움직일 수 없다. 발을 떼는 순간 무게추가 넘어가리라.
무진의 콧김이 거세다. 이미 자신을 내려놓은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인의 싸움은 생사결의 순간에 있는 법이건만···.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말아라. 일단은 나도 이 성에서 녹봉을 먹고 사는 몸이니.”
무인, 그런가.
녀석이 왜 본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는지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무진은 무인으로서 알베르트와 겨루고 있었다.
알베르트 또한 무인으로서 그와의 싸움에 응했다.
하지만 이미 이 싸움은 무인의 비무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알베르트는 이 모습이 본신이 아니다.
무진의 경우 그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그는 본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무인으로서 겨루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무인의 싸움이 아니다. 본신을 드러낸 것을 계기로, 녀석은 관아의 대장으로 돌아갔다.
무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알베르트를 이곳에서 패퇴시킬 생각이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무진을 칭찬했다.
“그렇다면 나도 자네의 마음에 응하지.”
“뭐?”
힘겨루기가 멈췄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한다. 알베르트는 전신의 내공을 끌어냈다. 거짓말처럼 흔들리던 몸이 균형을 잡고, 무진의 발바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녀석의 두 눈에 불신이 떠올랐다. 본신의 힘과 내공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도 결과는 똑같다. 마치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보는 것 같다.
어느새, 두 무인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크, 크으으···.”
굳게 다문 무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신을 누르는 압박감. 아무리 힘을 쥐어도 녀석의 손은 넘어가지 않는다. 반면에, 이쪽은 힘을 빼는 순간 맥없이 두 다리가 꺾일 것 같다. 무릎이 지면과 맞닿기까지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으리라. 무진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버티고 있는 두 발마저 이제는 한계에 가깝다.
무심하게 쳐다보는 스켈레톤의 시선을 본 무진이 패배를 느낀 순간, 그 입이 열렸다.
“여기까지 하지. 좋은 비무였네, 무진.”
일순간 무진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두 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검에서 알베르트는 손을 거뒀다. 무진의 곰 발을 누르고 있던 검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아까운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알베르트는 휘어버린 검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
좋은 비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진은 무인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스켈레톤은 자신과는 쌓은 기도가 다른 고수다.
역량의 차이가 너무 나서 감히 견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알베르트는 무진을 우롱하고 있는 걸까? 수치심에 그 얼굴이 붉어지려던 순간, 무진은 알베르트가 주변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술이 깼다.
무진의 시야가 개인다. 이곳을 바라보는 황림당의 형제들과 검수, 관중들의 시선이 들어왔다. 모두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여기는 두 사람이 무를 겨루고, 싸움을 논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관중들과 수하들의 눈에 어린 감정은 무엇인가.
단순히 노름판으로 변질된 싸움판을 보는 눈이 아니다.
거기에 어린 것은···.
무진은 천천히 두 손을 포갰다. 그 앞에는 조금 전까지 무를 겨루던 알베르트가 있었다.
“내가 할 말이다.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다.”
“양양 성의 수비 대장은 덩치만큼이나 칭찬도 과하군.”
무진이 포권을 취하자, 관중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재밌었다고, 형씨!”
“무승부에 건 사람 있나? 배당이 장난 아닐 텐데?”
“이겼으면 술 좀 사라고. 어이!”
다가오는 검수들의 손길을 거절한 무진은 한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을 잡았다.
거칠게 입 안으로 술을 털어낸 그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혹시 시간이 있으면 양양 성으로 찾아와라. 그때는 멀쩡한 정신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무진은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검수들과 함께 유곽 거리를 나아갔다.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의 발로 걸어갔다. 검수들은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유피의 곁으로 돌아왔다.
짝짝, 하고 시끄러운 관중들 사이로 박수 소리가 울렸다.
“황림당의 형제가 소란을 일으켰다고 들어서 왔는데, 이건 좀 예상 밖이군.”
관중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모습을 드러낸 건 늑대 가죽을 목에 두른 한 남자였다. 누런 옷을 입은 사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내 바보 같은 부하를 대신해서 사과하지. 미안하네.”
“······.”
포권을 취하는 남자를 향해 알베르트는 포권으로 대답했다.
남자의 뒤를 따라온 사내들은 몸을 추스르고 있는 형제들을 돌보고 있었다.
“나는 황림당의 두령인 카일이라고 하네. 이 무례를 사과하고 싶군. 어디 우리 산채를 한 번 방문하지 않겠는가?”
뜻밖의 제안에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입가는 눈에 띄게 구겨져 있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지.”
“음, 그런가? 뭐, 오늘만 날은 아니지. 혹시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라도 천하 객잔의 점소이에게 말하게. 내 따로 언질을 줘둘 터이니, 우리 산채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줄 걸세.”
그럼, 하고 카일은 상처 입은 형제들과 함께 싸움판을 뒤로했다.
황림당이 떠나자 관중들은 곧 해산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알베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포권을 취했다.
“오늘은 재밌었네, 형씨.”
“다음에 또 한판 벌일 생각이라면 용하(龍下) 거리의 싸움판으로 찾아오라고.”
“그런데 정말로 이름이 뭔가? 자네 같은 사람을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안 그래도 주먹 꽤나 쓰는 싸움꾼들이 사라져서 걱정이었는데, 자네 같은 무인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환영일세.”
알베르트는 관중들을 전부 떠나 보낸 후에야 유피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유피.”
“됐어. 조금 전 네가 한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야.”
알베르트의 싸움판은 혼혈을 향하던 시선을 단번에 없애버렸다.
유피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확인한 알베르트의 입꼬리가 가벼워졌다. 몸은 무거워졌지만, 그녀의 마음이 풀어진 것만으로도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아, 저기···.”
작은 목소리가 났다.
머뭇거리듯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낸 건 한 소녀였다. 분명 인족과 마족의 혼혈이던 아이다. 이 난리통 속에 상처를 입은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하얀 금창약이 발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혹시 괜찮으시다면 큰언니께서 저희 귀화루(鬼花樓)에 들어오시라고···. 그. 머, 머무르는 곳이 계신다면 오지 않으셔도 되지만···.”
뜻밖의 제안에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상처에 발린 약을 살펴보던 유피가 물었다.
“혹시 너희 기루에 의원이나 의녀도 있니?”
“의원이요? 체류 중인 의녀라면 한 분 계시기는 하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