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양양(襄陽)(1) (50/200)

 # 50

양양(襄陽)(1)

늪지를 나아간 나룻배는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고성에 도착했다.

알베르트에게는 낯선 형태의 성이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성을 그는 촌놈처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성곽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 무너지거나, 마물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깊게 패여 있다. 최근에 정비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한때는 비할 곳이 없었다는 양양 성이야. 지금은 아벨 오빠가 있는 성이기도 하고.”

나루터에 닿은 배에서 내린 유피와 알베르트는 왁자지껄한 길거리로 나왔다.

양양의 길거리는 늦은 시간임에도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야시장과도 비슷한 거리 아래로는 수많은 마족이 왕래하고 있었다. 생소한 형태의 건물이 시선을 끈다. 대부분 목조로 만들어진 집과 노점상, 층수가 꽤 높은 객잔 같은 상점이 보였다.

가게 앞쪽에는 술과 즉석에서 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도 많았다.

임시로 차려놓은 테이블 앞에서는 마족들이 야식을 즐기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린다. 웃음소리와 거친 욕설, 주먹과 병장기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이 끊이질 않는다.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내기판이라도 벌어진 걸까. 험상궂은 형씨에게 10냥! 말라깽이 형씨에게 5냥! 하고 이겨라, 죽여라! 같은 소리가 도처에서 울리고 있었다.

마치 떠들썩한 축제를 보는 것 같았다.

“소란스럽지?”

알베르트의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 걸까, 유피가 말했다.

“너희 제국과는 조금 다를 거야. 우리는 항상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거든.”

[무법지대 같은 장소군요.]

천칭의 말이 맞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진 않았다.

“마계도 괜찮은 곳이구나. 활기가 넘치고 있잖아.”

“활기가?”

“조금 안심했어. 마족도 우리랑 별다를 게 없는 사람이구나 해서.”

“그런가? 그런 감상은 또 처음 들어보네.”

나쁘지 않다는 듯 후드 아래로 드러난 유피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맺혀있었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의원은 몇 되지 않아. 내키지는 않지만, 암의원(暗醫員)을 찾아가자.”

“뒷골목의 의원을 말하는 거지?”

“물론이야. 가능하면 성으로 가서 오빠에게 의원을 소개받는 게 좋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어서 말이야.”

“알았어, 유피.”

이 시간에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알베르트는 유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야시장을 빠져나온 유피와 알베르트는 홍등이 반짝거리는 거리로 들어왔다.

층수가 많은 객잔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는 얇은 옷차림을 한 여인들이 가득했다. 거리를 오가는 남자들에게 달라붙는 여성들은 간드러진 교성과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못 이기는 척 여인의 손길에 끌려가는 남자들과 술 냄새를 풍기며 좋아하는 사내들. 유곽에 들어온 걸 알아차린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들이란···.”

“······.”

불쾌함이 배어 나오는 유피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시선을 바로 잡았다.

그래도 무심결에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제국의 환락가와는 또 다르다. 어여쁜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물과도 같이 특색 있는 모습을 한 여인도 주변 남성들을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남자의 성욕은 끝이 없다고 하지만, 마물을 닮은 여인과도 관계를 맺고 싶은 걸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알베르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알?”

알베르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창기와도 비슷한 얇은 차림을 한 소녀는 술병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성욕보다는 보호욕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체구다. 나이는 많이 먹어봤자 13살이나 되지 않았을까.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속살이 옷 사이로 드러났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다. 부끄러움이 없는 게 아니다. 단순히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

소녀가 유곽에 나오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실제로 수요가 있으니, 사창가의 마담들도 아이들을 끌어모았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남자들을 접대하고 있는 소녀는 분명 인족이었다.

“인족과 마족의 혼혈이야. 특이하네. 여기 종업원들은 대부분 혼혈이야.”

유피도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는 알베르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마족 사회에서 혼혈은 배척받는 존재야. 중원이 아닌,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거든. 대도시인 양양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아벨 오빠가 나서서 혼혈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있어. 아마 다른 곳이었다면 저 혼혈 아이는 변사체로 발견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걸?”

“혼혈이라는 게 그리 잘못이야?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피가 섞이는 것은 당연하잖아?”

기회가 되면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다. 실제로 제국의 신민들은 대부분이 혼혈이었다. 마족의 침입 이후 무너진 왕국들을 흡수한 제국은 단숨에 세를 불린 나라로, 안정화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수선한 민심을 달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시 제국을 이끌던 황제가 생각한 것은 피였다. 한때는 적이었던 나라의 피가 섞임으로써 제국은 화합을 꾀했다.

“잘못? 아니야, 알. 우리에게 피가 섞였다는 것은 죄에 가까워. 내가 순혈과 혼혈은 냄새가 다르다는 말을 했었지? 순혈 마족들은 말이야. 그 냄새를 언급하면서 혼혈을 얕잡아 불러.”

“…….”

유피는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굳이 그녀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주변에서 술을 마시는 마족들 대부분이 경멸을 담아 그 말을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잡종 냄새가 진동하는군.”

“술맛 떨어진다. 빨리 꺼져.”

잡종.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소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술병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그녀는 다음 손님을 향해 발을 옮겼다.

나이가 어림에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순응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포기한 걸까. 알베르트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을 오가는 다른 기녀들과 소녀의 사이가 돈독해 보인다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엉덩이를 살짝 건드리면서 눈웃음을 치거나, 힘내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은 썩 나쁜 광경은 아니었다.

“이거 잘나신 관아의 개가 아닌가. 어쩐 일로 이 지저분한 곳까지 찾아오셨을까?”

“요즘 산적들은 돈도 내고 술을 마시나 보는군. 세상 많이 좋아졌어.”

테이블 한쪽에서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누런빛의 옷을 입은 사내들과 관복을 입은 남자들이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양측 다 무인으로 보인다. 남자들은 귀찮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험상궂은 사내들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산적들이 마시는 술이다. 비싼 개의 입에도 잘 맞는가 보지?”

“오늘은 그만하자. 대장님이 와 계신다.”

“대장? 무진(武進)이 와 있다고? 그거 잘됐구먼. 안 그래도 한번 묻고 싶었다. 소하(小河) 언덕을 봉쇄한 이유가 뭐냐?”

“황자님의 명이다. 주민들이 위험하기 때문이지.”

“위험?”

테이블 위로 주먹이 떨어졌다. 시정잡배처럼 얼굴을 들이민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냈다.

“진심으로 지껄이는 소리냐? 양양 출신이라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언덕은 말이지.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추억이 담긴 장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황자님이 말씀하셨다.”

쨍그랑.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사내가 쥐고 있던 술병의 내용물이 남자의 머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아귀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것 같다. 남자는 머리로 손을 올렸다. 술로 흥건해진 머리는 질척질척해져 있었다.

“나와라, 개.”

“대장님이 와 계신다고 말했을 터인데.”

“우리 두령님도 곧 오실 거다.”

“…….”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세 사람을 둘러싼 사내들은 족히 열 명이 넘어간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검을 잡았다.

“가자, 유피.”

이곳에 있으면 말려들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본 손님들은 하나 둘 테이블에서 떠나고 있었다. 반대로 테이블을 붙이는 이들도 보였다. 떠나는 이와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승냥이들. 홍등가는 곧 구경꾼들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가도에 환호성이 울렸다. 갑자기 일어난 싸움판에 마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기루를 찾아왔던 남성들은 당초의 목적을 잊고, 자연스럽게 싸움판을 둘러싼 관중이 되어 있었다.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온 걸까. 어느새 다가온 노름꾼들이 관중 속을 돌아다니며 내기 돈을 받고 있었다. 마치 작은 축제와도 같다. 적지 않은 돈이 오가고, 응원과 욕설이 관중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싸움판이 노름판으로 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싸움판이 벌어지자 곤란해진 것은 기루의 아가씨들이었다.

애써 마련해놓은 야외 테이블을 구경꾼들이 장악하고, 대금을 치르지 않은 술과 요리가 한량들의 손을 오가기 시작했다. 기녀들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울렸다. 힘으로 술을 뺏고, 쓰러진 아가씨들을 보며 한량이 웃었다.

“잡종이면 잡종답게 땅바닥이나 보고 있으라고.”

“발이 있으면 술이나 가져와. 내키면 대금을 치르지.”

유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낸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터라 유피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드러난 그녀의 입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굳게 쥔 주먹과 부르르 떨리는 어깨. 더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다. 알베르트는 에일린을 확인했다. 열은 내리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더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내가 말릴게, 유피.”

“뭘 말이야?”

낮게 억누른 목소리가 돌아왔다.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한쪽에서 요리를 뺏고, 그걸 놀리듯이 낄낄대는 마족을 보고 있었다. 관중들은 그들의 행위를 말리지 않는다. 눈을 찌푸린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마족은 못 본 척 넘어가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묵인하고 있다. 마족 사회에서 혼혈이 갖는 지위는 딱 그 정도가 맞다는 것처럼.

“네가 손 쓸 일이 아니야.”

“어떻게 해결할 건데? 이걸 하나하나 말릴 거야? 택도 없는 소리야. 오히려 혼란이 커질걸?”

혼혈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없다. “큰언니를 불러!”“송이가 다쳤어! 의녀님은 어디에 계셔?”“일단 관병부터 불러야지!”“언니, 저 사람들이 관병이잖아요!” 기녀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녀들도 딱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난장판 속에서 상처를 입은 아가씨들도 보인다. 유피의 주변에 있는 술병들이 떠오르는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발을 굴렀다.

조용히 잠자고 있던 내공이 주인의 의지에 반응했다.

한 번, 두 번.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많지 않다. 신체를 강화하고, 검기를 다루는 선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리다. 간신히 달랜 혈도를 상처 입히고, 월아의 음기를 깨울 수 있었다. 싸움판 안쪽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다루는 힘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면을 박찬 알베르트는 뛰어올랐다.

싸움판을 둘러싼 관중들의 머리를 뛰어넘은 그는 검과 주먹이 오가는 안쪽으로 떨어졌다.

“뭐야, 이놈은?”

“그쪽 편은 아닌가 보군.”

“흥. 본신이 스켈레톤밖에 안 되는 마족이 우리 산채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산적에게 스켈레톤은 과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떠들기는.”

“발끈하는 걸 보니 잘 알고 있나 보군.”

난입한 알베르트는 관심 밖이다. 두 세력은 알베르트를 무시한 채 싸움을 이어 가려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습지도 않은 이 싸움판을 보며 웃지 않는 건 유피뿐이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붉은 두 눈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유피.

알베르트는 내공을 확인했다. 한 번 정도라면, 괜찮다. 그는 혈도에 무리가 가지 않게 내공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주먹과 검이 다시 오가려는 찰나, 알베르트는 목 안쪽까지 차오른 기운을 그대로 내뱉었다.

“갈(喝)!”

녹림왕의 사자후와는 다르다. 알베르트는 중후한 내공을 토해냈을 뿐이다.

기루의 창문이 깨져나갔다. 새된 비명이 울렸다. 소리가 멎는다. 싸움판을 둘러앉아 있던 마족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웃음기가 지워진다. 미처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지 못했던 관중들의 귀에서는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와 남자를 보며 알베르트는 손가락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시더 황자님. 잠시만 당신의 방법을 빌리겠습니다.

“개처럼 짖어대기만 하는구나. 너희가 무인이라면, 그만 지껄이고 힘으로 증명해라.”

소란은 더 큰 소란으로 제압한다.

주변에 있는 혼혈들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싸움판을 크게 만든다.

알베르트의 한 마디에 싸움판의 무인들은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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