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마계로 가는 길(2)
계절이 바뀐 금지된 숲은 많은 곳이 달라져 있었다. 벌거벗었던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피우고 있었고, 이름 모를 들꽃들의 봉우리가 맺히고 있었다. 가끔 길을 잘못 들린 것 같은 산짐승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정경을 돌아보던 알베르트는 곁에서 걷고 있는 유피를 보았다.
간편한 여행복 위로 로브를 두른 그녀는 후드를 벗고 있었다. 은빛 물결이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매력적인 그녀의 방향이 콧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알베르트의 턱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왜 갑자기 웃고 그래?”
“아니, 뭔가 즐거워서.”
설마 이런 날을 다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스켈레톤이 되어버린 탓에 모양새가 나지 않을 뿐이지, 그녀와 단둘이 하는 외출은 알베르트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별 것 없는 잡담을 나누면서 수도의 거리를 걷던 일이 생각난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들리는 아가씨와 그런 아가씨를 놀리는 유피. 뒤에서 묵묵히 그 투정을 받아주던 자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래된 추억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빛이 바래지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놀러 가는 게 아니니까.”
“알고 있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검을 두들겼다.
월아와 지팡이검. 몸은 가벼워졌지만, 알베르트의 무기는 역으로 무거웠다.
“내공은 다룰 수 있겠어?”
“신체를 강화하는 선까지는 괜찮아.”
검기라면 몰라도 검강을 뽑아내는 건 무리다.
억지로 끌어낸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혈도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가슴 안쪽에 깊이 박힌 음기를 자극하는 건 좋은 생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족의 무인들은 강해?”
“약하지는 않지.”
“내공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내가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음···.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3할 정도는 될 거로 생각해.”
“분발해야겠구나.”
“농담이야, 농담. 1할은 될 거로 생각해.”
미묘한 확률이 아예 가능성 없는 확률로 내려갔다.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를 보며 유피는 살짝 눈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 알. 만약 네가 죽으면 스켈레톤으로 만들어줄게.”
“뭐?”
“죽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내 컬렉션에 넣어줄 테니까.”
“진심은 아니지?”
“······.”
“부정해줬으면 했는데 말이지.”
유피의 뜨거운 눈빛이 아프다. 그 눈에서 일렁이는 기묘한 빛은 마법진 위에 있던 알베르트를 보는 눈과 같았다. 그랬군. 그녀의 괴상망측한 기호를 직시한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좋겠군요, 마스터. 죽어서도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니 말이죠.]
‘퍽이나 좋은 일이구먼.’
비아냥거리는 천칭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유피의 목소리에 어린 감정이 애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겠지. 그저 그녀의 이상한 수집욕이 빛나고 있을 뿐이다.
“유피는 왜 스켈레톤에 집착하는 거야?”
“난 딱히 스켈레톤에 집착하지 않아. 스켈레톤을 이루는 골격에 보통 사람보다 좀 더 관심이 있을 뿐이지.”
“그게 그 말 아니야? 스켈레톤이 해골이니까 말이야.”
“아주 큰 차이가 있어, 알.”
얼굴을 확 찡그린 유피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퇴골의 머리 부분은 어떻게 생겨야 느낌이 매끈하다든지, 비골의 살며시 패인 부분은 손이 들어가는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든지. 단련에 따라서 어깨뼈 부분이 나온 골격도 많고, 반대로 안쪽으로 들어간 골격도 있다는 말을 꺼내는 그녀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그러니까 두개골은 말하자면 머리뼈인데, 앞쪽은 이마뼈로 나뉘고 관자뼈와 나비뼈가···.”
“유피는 왜 그 성에 머물러 있는 거야?”
“특히나 매력···. 뭐야, 네가 물어봤으면서 듣기 싫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결국, 유피는 1시간을 넘게 뼈에 대한 강의를 늘어놓았다.
그걸로 간신히 만족했는지, 유피는 지쳤다는 알베르트를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성에 있는 이유를 물었지? 그건 내가 아니면 그들의 고리를 끊어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망자들을 말하는 거구나.”
원래는 할아범의 역할이었지만, 하고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할아범이라는 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쉿.”
유피는 알베르트의 물음을 막았다.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간 그녀는 나무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눈이 아닌 알베르트의 감각에도 뭔가 걸리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다.
유피의 발치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나무를 두들겼다. 파문이 일어난다.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숲의 광경이 흔들렸다. 투명한 막을 확인한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낸 유피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공간이었다. 나무 안쪽을 파서 만든 것 같은 은신처에는 두꺼운 옷가지로 몸을 가린 사람이 있었다. 유피의 뒤를 따라 나무로 은신처로 들어간 알베르트는 비릿한 향을 맡았다.
“이 냄새는….”
“피 냄새야, 유피.”
상처가 깊은 것 같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은둔자를 향해 알베르트는 몸을 숙였다. 붉은 얼룩은 이 사람이 흘린 피로 보인다. 몸을 덮은 검은 옷가지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여자, 혼혈이야.”
여자라고?
알베르트는 피 묻은 옷가지를 걷어냈다. 초록빛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옷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얼굴은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에일린 나이트워커.
루드비히 저택의 식객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알베르트는 분명 그녀를 루드비히 저택으로 안내했다. 이전 시대의 주인님은 에일린을 식객으로 대했고, 에일린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지금쯤이라면 아가씨의 가정교사가 되어서 평화로운 저택의 생활을 즐기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왜…?
“초면이 아닌가 보네.”
“얼굴만이라면, 알고 있어.”
알베르트는 에일린과 만난 일을 설명했다.
라베린 도시로 가는 도중에 그녀와 마주친 것. 마물의 습격을 받은 그녀를 구하고, 루드비히 저택으로 넘긴 것까지 말이다.
“금지된 숲을 떠도는 혼혈이라…. 그래, 목적은?”
“모르겠어.”
“모른다고? 그렇다면 이름은?”
“물어보질 않았어.”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알의 행동은 가끔 이해가 안 돼. 이 여자의 뭘 믿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거야?”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녀의 이름이 에일린 나이트워커고. 루드비히 저택에서 함께 지냈었던 사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알베르트를 보며 유피는 팔짱을 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음부터는 좀 더 의심을 품고 사람을 관찰하는 걸 추천해, 알. 이건 네 아가씨로서 하는 충고야.”
“명심할게.”
알베르트의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에일린의 상처를 확인했다.
강한 마법에 그을린 것처럼 화상 자국과 검이 남긴 자상이 있었다. 어깨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옷의 섬유와 말려 들어간 촉은 다행히 제거하기 쉬워 보였다. 하지만 에일린의 이마로 손을 옮긴 유피의 얼굴은 별로 밝지 않았다.
“응급조치는 해보겠지만, 여기서 전부 치료할 수는 없겠어.”
“구해줄 생각이야?”
“동포를 구하는 건 당연해, 알.”
“조금 전에는 의심하는 버릇을 들이라고 말했잖아?”
억울하다는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강자니까 상관없어.”
“…….”
심플한 마녀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유피는 손을 들었다. 가느다란 마나의 실이 그녀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왔다. 에일린의 몸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간 실은 그녀의 옷을 벗겨냈다.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성의 매력을 상징하는 가슴과 둔부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름다운 나신이다. 하지만 그 위에 어린 흉터 자국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 자리에서 얻은 상처가 아니다. 수십 개는 넘을 것 같은 작고 큰 흉터가 그녀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알.”
흉터를 살펴보던 알베르트는 유피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가 있어.”
“…….”
한기가 느껴지는 유피의 말에 반박의 목소리는 낼 수 없었다.
*&*
나무 밖으로 나온 알베르트는 적당한 밑동을 잡아 앉았다.
에일린의 치료에 들어간 유피는 그를 쫓아냈다. 남아서 무언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유피는 한사코 거절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붕대를 감거나 약을 바르는 허드렛일 정도는 충분히 거들어줄 수 있는 데 말이다. 그녀는 좀 더 자신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게 아닙니다, 마스터. 유피에르는 숨기고 싶은 겁니다.]
‘무엇을 말인가?’
[신성력 말입니다. 혼혈인 유피에르는 신성력을 다룰 수 있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자네는 지치지도 않나 보군.’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사희에게 심장을 당한 그를 살렸다는 유피의 신성력 이야기. 몸의 요양을 끝낸 그에게 천칭이 했던 말이지만, 알베르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루미에르 교를 믿는 사제들로 국한된다. 다프네 여신을 알지도 못하는 유피가. 그것도 마족의 피가 섞인 그녀가 신성력을 다룬다는 건 앞뒤가 맞질 않았다.
[제 말을 못 믿는 겁니까? 그건 신성력이 맞습니다.]
‘신성력이 아니라 다른 힘이었겠지.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세피로스의 나무를 촉매제로 사용했다고. 그 촉매제가 가진 힘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를 치료하는 데 쓴 힘은 신성력이 확실합니다.]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물리지 않는 천칭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열 보 양보해서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합세. 내가 유피에게 그걸 물어본다 한들,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할 거로는 생각하기 힘들구먼.’
[그러니까 현장을 급습하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 없네. 난 그녀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진 않아.’
[이 사랑의 노예가 진짜….]
천칭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알베르트는 입을 닫았다.
잠시 후, 나무에서 나온 유피는 기지개를 켰다. 관절이 맞물리는 우악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목을 좌우로 가볍게 흔든 그녀는 손으로 어깨를 두들겼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 여기서 이보다 좋은 치료는 할 수 없어. 내 마나도 많지 않고, 갖고 온 약으로는 시간 벌이밖에 안 돼. 양양에 있는 의원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야. 다행히 양양까지는 별로 멀지 않으니까. 최악의 상황은 없을 거야.”
“고생했어, 유피.”
그녀의 뒤를 따라 나무에서 붉은 스켈레톤이 걸어 나왔다. 유피의 사역마인 롯이다. 롯의 손에는 의식이 없는 에일린이 안겨 있었다.
“롯은 어디에 챙겨온 거야?”
“고생하기 싫어서 말이지. 아공간에 넣어왔어.”
흐흥, 하고 유피는 양쪽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째 그녀의 코가 길어진 느낌이 들었다.
치료가 끝난 에일린의 숨소리는 여전히 얕았다.
어깨에 꽂힌 화살도 제거하지 않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독한 약 냄새로 바뀐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급한 대로 지혈만 한 것 같다.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유피가 손을 써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알베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피와 알베르트는 은신처 바깥으로 나왔다. 뜻하지 않게 동행인이 늘어났지만, 바뀌는 건 없다. 뒤따라오는 롯과 걸음을 옮기는 유피. 하지만 그건 알베르트의 착각이었다. 유피의 소매에서 한 인형이 흘러나왔다. 힘차게 공중으로 날갯짓하는 그 인형은 가고일이었다.
비상한 가고일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나무와 부딪친 가고일이 지면으로 떨어지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고일은 나무속으로 사라졌다.
“지름길로 갈 거야. 잡아, 알.”
유피는 알베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자 유피는 알베르트의 몸을 당겼다. 둘의 모습은 나무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알베르트는 달라진 숲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익숙했던 봄의 정경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피어오르는 숲은, 이야기로 듣던 마녀의 숲처럼 보였다.
“멈추지 마. 계속 갈 거야.”
“아, 알았어.”
주변을 둘러볼 시간은 없다. 유피는 앞서 나가는 가고일의 뒤를 쫓아 몇 개의 나무를 계속해서 통과했다. 공간이동 특유의 현기증이 머릿속을 찌른다. 눈을 뜨고 있으면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에 알베르트는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숲의 모습이 달라졌을까.
정신없이 숲을 넘나들던 유피가 알의 손을 놓은 것은 해가 떨어지고 난 뒤였다.
“정신없지?”
“괜찮아, 버틸 만해.”
눈앞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다행히 목소리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강한 척은 잘하는군요, 마스터.]
‘이 정도는 당연한 거네.’
남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죽었으면 죽었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죽어도 하기 싫은 법이다.
“이 금지된 숲은 말이지, 마계에 가까워질수록 공간이 불안정해져. 일반적인 길을 통해서 간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거리도, 이렇게 공간을 이용하면 반나절도 안 돼서 좁힐 수 있어.”
“불안정해?”
유피의 손에서 두 구가 떠올랐다.
하나는 무인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의 세계를 투영한 구가.
다른 하나는 마물이 기어 다니는 검은 세계를 투영한 구였다.
“우리들의 고향은 알다시피 무림이었어. 문제는 신석을 이용해 마왕이 강림하면서부터였지. 현세에 나타난 마왕은 지옥을 이곳으로 끌어왔고, 이는 곧 두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과를 불러왔어.”
두 구가 부딪친다.
부딪친 구는 부서지며 마물이 연무장으로 떨어졌다. 하나의 구 안에 갇히게 된 무인과 마물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 사이 구 안의 세계는 검게 물들었다. 이윽고 겹쳐진 구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남았다.
“결과는 보다시피. 지옥에 먹힌 무림은 불안정한 세계가 되어버렸어. 몇몇 지역은 아예 이 세계에서 떨어져 아공간으로 전락했고, 그곳은 시간의 흐름조차 우리와는 다른 지역이 되어버렸지. 그것이 세상의 끝. 도플갱어(Doppelganger)와 마주친다든가. 과거로 간다든가, 미래로 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야. 검은 안개가 드리워진 그곳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어. 이제 무림에서 정상적으로 남은 곳은 몇 되지 않아. 침식이 시작된 세상은 지옥의 환경을 닮아가고 있으니까.”
유피는 손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생기를 잃어버린 나무.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몇몇 나무들은 마기(魔氣)를 흘리고 있었다. 평범한 화초는 찾아볼 수 없다. 꽃에는 이빨이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뿌리를 드러내고 일어날 것 같다. 알베르트의 손이 무심코 검으로 향했다.
“금지된 숲에 왜 마물이 많은지, 이제 알 것 같아?”
“지옥처럼 변하고 있다는 말이구나.”
“그런 셈이야.”
유피의 설명을 들은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 장소에 발을 내딛게 되면, 전혀 다른 공간으로 건너뛰게 된다. 알베르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현상이 없었다면 알베르트는 유피의 성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과욕은 모든 걸 부수는 법이지. 이것도 전부 우리의 업보야.”
유피의 얼굴에 차가운 냉소가 떠올랐다.
*&*
두 사람은 마물과 조우하는 일 없이 숲의 끝자락에 닿았다.
으스스한 숲을 빠져나온 알베르트의 앞에는 축축한 늪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가시거리가 짧아진 알베르트는 내공으로 눈을 강화했다. 안개 너머로 보이는 늪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유피는 후드를 눌러 썼다. 얼굴을 가린 그녀는 늪지 한쪽에 자리 잡은 나루터로 향했다.
낡은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목적지는?”
“양양 성.”
“몇 명이냐?”
“세 명이야.”
유피가 돈을 건네자 남자는 푹 눌러쓴 밀짚모자를 위로 올렸다.
모자 아래에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한쪽 눈을 못 쓰는 외눈이었다. 어떤 사고라도 당한 것일까, 그의 왼쪽 눈은 흉측하게 짓눌려있었다. 흉터를 감싼 근육들은 그저 뭉툭한 살덩이처럼 보였다.
뱃사공은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오른쪽 눈으로 유피와 알베르트를 살펴보았다. 둘의 차림새부터 시작해서 특징적인 모습, 로브와 후드로 몸과 얼굴을 가린 여인. 검을 찬 스켈레톤. 그리고 따라오는 스켈레톤이 안고 있는 부상자까지. 어딜 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수상한 모습에 만족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15냥이다.”
뱃사공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유피를 향해 손바닥을 보였을 뿐이다.
유피는 꾸러미에서 동전 몇 푼을 꺼냈다. 15개의 동전을 받은 뱃사공은 누런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타라.”
자리에서 일어난 뱃사공은 커다란 장치를 조작했다. 톱니바퀴가 굴러가자 늪지를 가르며 낡은 나룻배가 다가왔다. 유피가 배에 오르고, 알베르트가 그 뒤를 따랐다.
뱃사공은 나루터에 연결되어 있던 줄을 끊었다.
“심연의 밑바닥, 마계에 온 걸 환영하네.”
끌끌거리는 뱃사공의 웃음을 뒤로 한 채 유피와 알베르트는 늪지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에 가린 늪지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흡사 마물의 숨통으로 내려가는 지옥길과 같다. 배 끄트머리에 있던 초롱불에 불을 넣은 유피는 배에 앉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뱃사공이 없음에도 유피와 알베르트를 태운 나룻배는 천천히 늪지를 떠내려갔다.
늪지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오르고, 안쪽에서 수중 생물이라기에는 기괴한 형태를 가진 그림자가 오간다. 평범한 자연의 생태계와는 거리가 멀다. 흔한 물고기 한 마리조차 보지 못한 알베르트는 유피의 옆에 앉았다.
“저쪽으로 가.”
맞은편에 앉았다.
[쫓겨났군요, 마스터.]
‘비좁아서 그랬을 뿐이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죠.]
‘······.’
풀이 죽은 알베르트를 본 유피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터놓고 말해보자. 알베르트는 날 좋아해?”
“좋아해, 유피.”
그 물음에 알베르트는 즉답했다.
“그건 친애의 감정이야?”
“아니, 사랑이야.”
유피의 손이 이마로 올라갔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곤란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유피의 습관이다. 그녀는 아무래도 알베르트의 감정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내가 너에게 호감을 살만한 행동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유피에르 바토리.”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알베르트는 이미 지난 삶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후회를 남길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
“사랑이란 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거야.”
뼈밖에 없는 늑골을 알베르트는 두들겼다.
그 안에 심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근거리는 고동은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유피도 언젠가는 깨달을 거야. 사랑을 깨닫는 대상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 유피가 돌아볼 수 있을 만큼, 내가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게. 이 사람이면 믿을 수 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같이 걸어가고 싶다. 언젠가 돌아올 장소가 되고 싶은 그런 사람 말이야.”
적어도 알베르트는 그랬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자신의 곁에 유피에르 바토리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알은 나랑 함께하고 싶다는 말이야?”
“가능하다면 평생을.”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만큼 이해하기 힘든 감정은 또 없으니까.
이 감정의 미로에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저 알아주길 바랐다. 당신을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베르트의 고백을 들은 유피는 고개를 돌렸다.
“말은 잘하네. 다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감정이야. 꿈 깨, 알.”
늪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알베르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후드 사이로 보이는 유피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을 알베르트는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