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마계로 가는 길(1)
가볍게 이는 봄바람이 따스하다.
가족끼리 나들이라도 나가면 좋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아침. 연미복을 차려입은 알베르트는 정원에 내려와 있었다. 오늘은 마계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마지막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 그는 유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형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정원을 오가는 인형들의 손에는 이름 모를 촉매제가 가득했다. 검은 피를 뿌리고, 동물의 내장으로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장기를 잘게 잘게 조각냈다.
흑과 적이 섞인다.
하나의 원을 만든 인형들은 그 아래로 그림을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무의 뿌리와 같다. 좌측에는 붉은 피로 만든 원이. 우측에는 검은 피로 만든 원이. 그 끝에는 두 색이 섞인 깃털과도 같은 발이 남았다.
문을 여는 길이 만들어진 것을 확인한 유피는 입을 열었다.
“알. 마족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너한테 몇 가지 마법을 걸 거야.”
움직이기 간편한 외출복 차림을 한 유피는 손가락을 들었다.
“우리 마족들이 인족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고유의 기운이 있는데, 마족은 이를 냄새로 구분할 수 있어. 가령 순혈 마족은 무취에 가깝고, 혼혈 마족은 코를 톡 쏘는 듯한 향신료. 인족은 고소한 빵과 같은 냄새가 나.”
“냄새로 종족을 판별한다는 거네?”
“그래. 저주의 영향인지, 마족들은 선천적으로 그 냄새를 골라낼 수 있거든. 다만, 혼혈 마족은 냄새를 맡는 능력이 없어. 그래서 마도구를 들고 다니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특이한 경우야.”
라피엘이 알베르트를 정체를 단번에 알아본 것은 그런 까닭이었던 모양이다.
손을 얼굴로 올린 알베르트는 코를 킁킁거렸다. 특별히 나는 냄새는 없었다.
“그럼 나한테도 지금 인족의 냄새가 난다는 거야?”
“너는 조금 특이해. 인족이기는 한데, 음, 뭐라고 할까. 그러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말이야. 보통 인족은 빵인데, 넌 만두에 가까워.”
“만두?”
“우리 마족이 즐겨 먹는 간식이야. 한 입 거리 정도 되는 요리인데. 피 안쪽에 고기와 야채를 섞어서 만드는 음식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같은 만두지만, 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먹기 전까지 알 수 없어.”
유피는 몸짓을 섞어가며 만두를 설명했다. 만두라는 음식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손짓으로 작은 원을 만들었다.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건, 분명 반죽을 위한 행위겠지. 보기 힘든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앞에 알베르트는 잠시 넋을 잃었다. 무심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양양에 있는 천하 객잔에는 유명한 왕만두가 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먹어보면…. 저기, 듣고 있는 거야?”
“물론이야, 유피. 혹시 놀리는 건가 싶어서 말을 고르고 있었어.”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건 칭찬이니까.”
알베르트의 몽실몽실한 기분을 날려버리듯이, 유피는 말했다.
“알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집사지만, 그 알맹이는 꽉 찼다고 말한 거야.”
“…….”
“또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아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말이야.”
알베르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칭찬을 해줘도 문제구나.”
유피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마나에 반응한 아공간이 입을 열었다.
검은 공간에서 나온 것은 붉은 지팡이다. 유피는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준비는 끝났지? 마법진 위로 올라가, 알.”
지팡이 끝에 자리 잡은 현자의 돌이 불길한 색으로 빛났다.
마치 피가 흐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보석을 보며, 알베르트는 마법진 위로 발을 옮겼다.
“네 냄새를 바꾸기 위해서 몇 가지 마법을 걸 거야. 몸에 어떤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마. 딱히 위해를 가하는 건 아니니까.”
“알았어, 유피.”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로 만들어진 마법진에서는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조금만 참으면 괜찮겠지. 코가 피로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다. 마법진 위에 선 알베르트를 확인한 유피는 가볍게 뒷발을 밟았다.
툭툭, 하고 발꿈치가 닿은 지면에서 그녀의 마나가 발현했다.
「무엇보다 높은 지고한 왕관이 고한다.」
은빛 선이 달린다. 흑적의 마법진에 닿은 유피의 마나는 뿌리를 타고 내려갔다.
상반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기둥이 빛을 발했다.
마법의 삼각형. 하늘과 땅, 사람을 의미하는 길이 문을 열었다.
「뿌리에 시작된 권능을 이 순간 거슬러 올라갈 터이니.」
지팡이에서 뻗어져 나온 마나의 실은 인형이 흘린 촉매제에 맞닿았다.
문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의 경사가 완만해졌다. 두 손으로 문을 연 유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의 안쪽은 언제나 똑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수(世界樹)가 자리하고 있고, 그것을 올려다보는 자신은 한없이 작아진다. 긴장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 같다.
이 안에서는 유피에르 바토리라는 개체의 의미가 없어진다.
존재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간에서 유피에르 바토리는 은빛 고양이로 변했다. 이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세계수의 지혜에 의지하여, 그 힘을 빌려올 뿐이다.
『명심하세요, 황녀님. 자연 속에서 우리는 단지 가능성이 있는 씨앗에 불과하답니다. 발아할 수 있는 씨앗이 되기 위해서는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음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수는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마족 최후의 현자가 남긴 가르침은 무엇 하나 틀리지 않았다.
고양이의 부름에 세계수는 답했다.
세상이 개변했다.
정원의 모습이 푸른색의 연기로 뒤바뀌고, 성의 모습이 갈색의 연기로 모습을 바꿨다.
유피는 마법진 안의 알베르트를 보았다. 집사의 몸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있었다. 가슴 부근에서 흔들리는 파란색은 분명 월아가 남긴 달의 기운이겠지.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 오른손에 깃든 태초의 심연이 그대를 먹어치우리라.」
유피의 언령과 함께 마법진의 선이 일어났다.
시작은 붉은 마법진이었다. 가시를 세우는 것처럼 자라난 붉은 실이 알베르트의 몸에 맞닿았다. 다음은 검은 마법진이었다. 붉은 실이 아른거리는 알베르트의 몸을 검은 연기가 감싸 안았다.
아픔은 없었다.
「허나, 이 왼손에 깃든 최초의 광명이 그대를 보호하리라.」
변화가 시작된다.
알베르트의 두 손이 투명해지면서, 골격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맞닿은 이곳에서 길 잃은 양은 끝없이 방황할지어다. 그러나 방황하는 양은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그 행로를 안내할 때까지 양은 어둠 속에서 헤매리라.」
연미복 안쪽의 손목도 마찬가지다.
살점이 사라진 손목은 근육을 드러내고, 혈관을 보이고, 이어 뼈가 나타났다.
「생자봉인(生者封印).」
세계수의 문이 닫힌다.
개변했던 세계의 모습이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흐려졌던 자아가 돌아오고, 문에서 나온 유피에르 바토리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마법진 위에는 검은 연미복을 입은 스켈레톤이 있었다.
“이건···.”
[스켈레톤이군요,]
알베르트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본래라면 살이 맞닿는 느낌이 날 터지만, 지금은 살점 하나 없는 뼈가 서로 부딪쳤다. 낯선 느낌이다. 속이 텅 빈 것 같은데, 공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공을 운용해본다. 문제는 없다. 가슴팍이 시큰해서 크게 끌어낼 수는 없지만, 살짝 끌어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어때? 스켈레톤이 된 느낌은.”
“느낌이 낯선 것만 빼면 괜찮네.”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유피는 스켈레톤이 된 알베르트를 보았다.
“혹시나 하지만 부작용은 없는 거지?”
“······.”
알베르트는 유피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지만, 스켈레톤이 되고 나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는 대답이 없었다. 뭔가 잘못된 걸까?
그녀는 알베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알베르트의 몸을 보고 달린다. 얼굴과 목, 갈비뼈와 어깨, 그리고 손까지 내려간 그녀의 붉은 두 눈에서 뭔가 이상한 빛이 아른거렸다.
처음 보는 유피의 얼굴이다. 낯선 모습에 알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유피?”
“아···.”
불현듯 깨어난 것처럼,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아. 부작용이 있는 마법은 아니거든. 창생(蒼生)의 술 중 하나야. 시술자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피시술자가 원래대로 못 돌아오는 일도 있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피의 시선이 뭔가 꺼림칙하다. 그녀는 흘깃흘깃 알베르트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듯 그녀는 몸을 떨었다.
[뭔가 기분이 나쁘군요.]
천칭의 말이 맞다. 마치 훔쳐보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을 받는 알베르트는 빈말로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할 말이 있으면 바로 꺼내는 그녀답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지 않겠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사전 준비는 끝났어. 이제 출발하자.”
유피는 등을 보였다. 알베르트에게 행한 마법이 간단한 의식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어깨는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한 그녀에게 추궁하듯이 말을 던지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겠지. 알베르트는 입을 닫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 앞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부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부님은 놀라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뼈밖에 없는 두 손을 모은 알베르트는 사부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림 초출이라···.』
시선 끝에 닿는 삿갓을 매만진 사부님은, 무언가 유쾌하다는 듯 아래턱을 흔들었다.
『당부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말씀하시죠. 제자, 경청하겠습니다.”
『아이야. 네가 본좌의 제자가 된 시점부터 너는 천마신교에 적을 둔 무인이다. 더는 천마신교가 남아 있지 않지만, 너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네가 이룩한 경지와는 상관없다. 너는 이미 한 명의 어엿한 무인이다. 그렇다면 무림의 법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만약 눈앞에서 박해당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머뭇거리지 말아라. 너의 의지가 곧 본좌의 의지를 대변할 터이니.』
알베르트는 자신의 별호를 떠올렸다.
천마. 사부님이 짊어지고 있던 짐은 이제 그의 등으로 넘어와 있었다.
『무림이라는 건 말이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세계다. 자신이 이룬 무에 긍지를 갖고, 더 높은 순환을 따라가는 무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렇기에보다 더 강한 무(武)로 협(俠)을 이룬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의 시선이 알베르트의 허리춤에 있는 월아로 향했다.
『본좌가 너에게 사사한 무공을 알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일인전승(一人傳承). 그것이 본좌의 천마신공(天魔神功)이다. 명심하거라. 만약, 그것을 꿰뚫어 보는 자가 있다면. 그건 일족의 후예일 터니, 너에게 우호적인 감정이 있을 확률은 낮다.』
다른 때와는 달리 말이 많다. 사부님은 예를 갖춘 제자의 모습을 보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 가거라. 이 초출은 제약이 생긴 너에게 있어 좋은 수련이 되겠지. 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여. 본좌가 하산을 허락하마.』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알베르트는 사부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인사도 못 하고 무덤으로 향했던 저번과는 다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둘의 이야기가 끝난 걸 확인한 유피가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 성을 부탁해, 아저씨.”
『말할 것도 없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바로 갈 거야.”
『지금 나간다라….』
사부님은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알베르트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성 주변을 감싼 결계의 밖을 보고 있는 것일까. 잠시 말없이 숲을 둘러보던 사부님이 말했다.
『바깥은 조금 소란스럽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을 어지럽히고 있지.』
“마물이라면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간단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정도의 허세는 필요한 법이지. 하지만 밑천이 전부 드러난 상태에서 취하는 강한 척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아이야, 적어도 네 사람들 앞에서는 약함을 드러내도 좋다.』
“…….”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사부님의 말에 유피는 말문이 막혔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창생의 술. 유피가 행한 마법은 알베르트의 생각보다 마나의 소모가 심했던 마법이었던 것 같다.
“아저씨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야.”
『흥. 솔직하지 못하구나. 네 어머니는 그래도 무언가를 숨기려고 들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된 모녀가 이렇게까지 성격이 다를 수 있는지.』
“방금 뭐라고 그랬어…?”
발끈한 유피가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 사부님은 손을 들었다.
『됐다. 제자의 무림 초출이다. 사부된 입장에서 선물 하나 못 해주는 것이 마음에 걸리던 터다. 특별히 이 정도 출혈은 감수해주마.』
등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뗀 사부님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항상 정원 안쪽에만 있던 사부님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평화로운 봄의 정경을 자아내던 숲이 일순간 모습을 바꿨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 같다. 결계 안쪽에서는 검고 푸른 마물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부님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두 눈을 깜박였다. 분명 나무가 가득하던 장소였는데, 그 안에서 스켈레톤과 인간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잘 보거라, 아이야.』
군세와도 같은 마물의 수를 앞에 둔 채, 사부님은 지팡이 검을 놓았다.
빙글, 하고 지면으로 떨어지던 지팡이 검이 천천히 떠올랐다. 검집과 검이 분리된다. 하얀 검신이 세상에 드러났다.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인 마물들이 제정신을 되찾았다. 진로가 바뀐다. 무언가 추적하듯이 흔적을 쫓아가던 그들의 목표는 이제 사부님이 되어있었다.
『이것이 기의 정점이다.』
하얀 검신 위로 검붉은 검강이 타올랐다. 강기는 검을 덮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번 붙기 시작한 불길이 멈추지 않는다. 심지를 먹어치우고, 초를 집어삼키고, 끝내는 몸마저 덮어버린 강기는 사부님의 키를 넘어섰다. 한 번의 휘둘림으로, 수십의 마물을 베어내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산과 같던 강기는 일순간 그 자취를 감췄다.
『눈에 보이는 형체가 전부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너머에 있다.』
이제 마물은 사부님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닥쳐오는 마물을 향해 지팡이 검이 떨어졌다. 마물의 목을 노린 게 아니다. 다가오는 마물보다 한발 앞서 떨어진 지팡이 검은 지면에 꽂혔다.
유피의 발꿈치가 땅을 밟았다. 작은 마법진이 그녀와 알베르트의 발치에서 발현되었다.
그 순간, 유피의 은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뭘까, 이 힘은. 알베르트만 느낀 것이 아니다. 사부님을 향해 뛰어오던 마물도 그 힘을 깨달은 건지. 거짓말처럼 발이 멈춰 있었다. 아니, 다르다. 발이 멈춘 게 아니다. 그런 자발적인 것과는 다르다. 움직이지 못한다. 마물은 단순히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흐름. 지면에 꽂힌 검이, 무언가를 막고 있었다.
막아서는 안 될 것.
막을 수 없는 것.
지극히 당연하게 행해지는 것.
그것이 순환이다.
그렇다면 그 순환이 막혔다가, 다시 흐르게 된다면…?
『그 정수를 느껴라.』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지면에 꽂힌 검은 곧 심연으로 향하는 입을 열었다.
“…!”
돌풍이 일었다. 커다란 구를 만든 지면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첫 주자는 사부님의 앞에 당도했던 고블린이었다. 분홍빛이 도는 홉고블린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들고 있던 단검과 함께 지하로 끌려 들어간다. 발버둥 치듯이 뻗은 손을 잡아준 동포는 없었다. 그러나 아쉬워 할 것 없다. 외로워할 홉고블린을 위해 다른 고블린이 그 뒤를 따랐다. 비교적 가벼운 고블린과 코볼트가 먼저 모습을 감추고, 이후는 오크와 트롤의 차례였다. 예외는 없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절반이 넘는 군세가 지하로 사라지자, 사태를 파악한 오우거와 아울베어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지면에 생긴 커다란 구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지면의 떨림은 어느덧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걷는 것조차 힘들다. 뛰어가는 마물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바빴다. 쓰러진 마물에게 뒤는 없다. 대형 마물의 몸에 짓밟힌 소형 마물들은 반항 하나 하지 못하고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숲을 가득 채우던 마물이 사라지기까지는 불과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땅의 울림이 멈춘다.
쿠르릉, 하고 먹어치운 것들을 소화했다는 듯 트림을 토해낸 지면은 검을 뱉어냈다. 검신은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은 칼자루뿐. 사부님의 손아귀로 돌아온 칼자루는 재로 변해 사라졌다.
사부님은 발을 돌렸다. 결계 안쪽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성문으로 향했다.
흩날리는 잿가루와 따라갈 수 없는 등.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알베르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따라 두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