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지지 않는 꽃
숲의 밤은 빠르다.
밤하늘 아래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더는 발코니에 걸터앉아 있었다. 다과회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테이블 위에는 차가 아닌 술병이 있었다. 흘러내리는 망토를 고쳐 입은 그는 술잔을 들었다. 달에 비친 술잔이 아름답게 빛났다. 무심코 빠져들 것 같다. 잔에 담긴 빛깔을 즐기던 시더는 입을 열었다.
“유피는 공방이냐?”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조금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발코니로 나온 사내는 알베르트였다.
“벌써 말이냐? 밤은 이제 시작인데. 정말로 애구나, 그 아이는.”
“최근 무리하고 계시니까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황자님께서 오신 뒤로 즐거워 보이십니다.”
“흥. 그 아이가 솔직하지 못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유피에르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태연하게 꺼낸 집사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보았다. 그곳에는 두 개의 잔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잔인가요?”
“그렇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저씨의 잔이다.”
시더가 이곳에서 아저씨라고 부르는 남자는 한 명이다.
알베르트의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스켈레톤은 술잔을 잡더니 자리에 앉았다.
『죽엽청(竹葉靑)이냐?』
“백주(白酒)입니다. 최근 낙양에서 만들기 시작한 특산품입니다.”
『흠. 그렇군, 향이 색다르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노주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입니다.”
사부님은 잔 위로 손가락을 옮겼다. 뼈와 술이 맞닿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술의 높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괜찮군.』
“비싼 값을 하는 술입니다.”
알베르트는 투명한 빛깔을 띠는 술잔을 코로 가져갔다.
먼저 향을 맡아본다. 코끝을 자극하는 술 냄새는 독하기 짝이 없었다. 술이 약한 유피에르라면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다. 천천히 입안으로 백주를 옮긴 알베르트는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알베르트가 간신히 한 잔을 다 비웠을 때,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두 개가 생겼다.
“술이란 무엇이냐, 알베르트?”
“술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알베르트는 평소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분위기에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더는 그런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겠지. 알베르트가 고민에 잠긴 사이 시더는 입을 열었다.
“이 몸에게 있어 술은 말이다, 알베르트. 마음을 여는 약이다. 술을 먹어야만 비로소 꺼낼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가 있는 법이지. 타인에게는 결코 꺼낼 수 없는 비밀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도. 술이라는 마력이 있다면 겸허히 수용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
술자리에서는 서로 쌓은 마음의 벽이라는 게 얇아지는 법이다.
평소에는 서로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도, 술이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일지, 내칠지는 이야기의 사안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말이다.
“저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황자님. 술을 마시면 슬픈 추억이 떠오릅니다.”
“슬픈 추억?”
“그렇습니다. 이런 세상이니, 누구나 아픈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술잔을 든 알베르트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저택의 참사는 아가씨에게만 트라우마를 남긴 것이 아니었다.
흉터라고 해도 좋을 깊은 상흔은 아직도 알베르트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술에 몸을 맡기면 거짓말처럼 그 날 밤의 일이 떠오른다. 숨조차 쉬기 힘들던 마기가 짙게 드리워졌던 참사 날이.
뒤를 부탁한다는 세바스찬 집사장님의 손이.
눈앞에서 몸을 던져 아가씨를 구한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의 얼굴이.
아리시엘 루드비히를 부탁한다는 라시엘 주인님의 목소리가.
착각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무게는 알베르트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흠, 그런가. 술을 마시면 악몽이 떠오른다는 건가. 그렇다면 추억을 덧씌워야겠군.”
시더는 술병을 들었다.
알베르트의 빈 잔에 붉은빛이 감도는 백주로 차올랐다.
“슬플 때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다, 알베르트. 술을 마음의 문을 열어버리니 슬픔이든, 흥겨움이든. 그 감정이 배가 되는 법이다.”
“시기에 따라서 독주(毒酒)가 될 수도, 희주(喜酒)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해가 빠르군. 자, 받아라.”
목을 타고 백주가 넘어간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마셨다가는 금방 취기가 올라올 것 같다. 거기에 안주도 보이지 않는다. 속을 달랠만한 음식이 없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마침 잘 됐군. 오늘 밤은 사나이들이 술을 즐기는 시간이다. 나쁜 추억은 잊어버리고, 즐거운 기억으로 채워라.”
“즐거운 기억 말입니까?”
“그렇다. 이 몸과 술잔을 기울이는 영광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
자신감이 넘쳐나는 시더의 목소리에 알베르트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황자님은 신기한 분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하지만 반하지는 말아라. 나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다.”
씨익, 어금니를 드러낸 시더는 활짝 웃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자신이 안고 있는 걱정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져도,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생각이 들고 만다. 알베르트와는 근본부터 다른 남자다. 어떤 일이 생겨도 몸으로 부딪치면서 해결해나가는 사람이다. 머릿속으로 계산부터 하는 그와는 살아온 방식이 달랐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백주는 독한 것과는 별개로 향이 깊었다.
술에 조예가 있는 애주가라면 향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준이겠지.
“그렇군. 이전에 했던 제안 말이다만. 철회하도록 하지. 자네라는 사람이 욕심나지만, 오빠가 되어서 동생의 가신을 뺏을 수는 없지. 자네는 유피에르의 곁을 지켜주게.”
“알겠습니다, 황자님.”
알베르트는 시더의 빈 잔에 백주를 채웠다. 술을 받은 시더는 술병을 넘겨받았다.
알베르트의 잔을 채운 그는 술잔을 들었다.
“중원의 후예를 위해서.”
“유피를 위해서.”
두 남자의 잔이 부딪쳤다. 알베르트와 시더는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멍청한 놈들. 술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부가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아저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생각이라고 할 것도 없다. 술이라는 건 말이다. 무인이 쌓은 광기를 털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사부님은 잔을 들었다. 달빛이 투과되는 투명한 빛은 아름다운 색을 머금고 있었다.
『무학을 따라가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광기라는 건 항상 무인과 함께 하는 법이지. 광기를 털어내지 못한 무인은 마인(魔人)이 되고, 마인이 되어버린 무인은 곧 광인으로 태어나게 된다. 술은 이를 막기 위한 약이 된다.』
알베르트는 비무에 임하던 시더 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묘한 열망으로 타오르던 두 눈. 생사결의 순간과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것이 무인의 광기라는 건가. 그와 마주하고 있던 자신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인이 만든 광기는 술 한 잔으로 사라져야 하는 법. 부정한 탁기를 몸 안에 남겨둬서는 안 된다.』
가득 차 있던 술잔이 손가락과 맞닿아 사라진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잔은 바닥을 드러냈다.
『이 세상에서 난 모든 것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위대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설령, 무학에 모든 것을 바친 무인일지라도 말이다.』
빈 술병이 늘어난다.
사부님의 앞에 놓인 술병은 벌써 5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걸까. 사부님의 손은 자연스럽게 다음 술병으로 향했다.
“한 진이면 충분하다…. 헌데,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닙니까?
『세기를 풍미한 영웅 중에서 여자를 멀리하는 자는 있었어도, 술을 싫어하는 영웅은 없었다.』
“…….”
『불만이냐?』
“아뇨, 그럴 리가요.”
거창한 말은 핑계일 뿐. 사부님은 단순히 술이 마시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물론 알베르트는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술을 입으로 가져가는 시더와 술병째로 술을 비우기 시작한 사부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도 술잔으로 손을 옮겼다.
시더의 말이 옳다. 오늘 밤의 일을 떠올릴 수 있다면, 술을 마시는 것도 즐거울지 모른다.
그 날 밤, 술에 취한 알베르트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
알베르트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부님의 시선이 무겁다. 몸 전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다. 내공을 다루는 게 아니다. 사부님은 단순히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간신히 숨을 삼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아무래도 수련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가슴에서 시작된 음기는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오늘 아침에 이르러서는 검기를 뽑아내는 것도 힘들어졌다. 호전의 기미가 보였던 것은 처음뿐. 사희에게 당한 상처는 점차 멍을 늘려가고 있었다.
『그 솜씨, 흑살귀냐?』
사부님은 손가락으로 알베르트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 눈에는 알베르트의 상처가 비치고 있었다.
“아뇨, 사희입니다.”
『뱀의 꽃. 그런가. 그 아이의 작품이었느냐.』
아무리 공간이 무너지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수는 알베르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뱀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냥감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각지대로 움직인 사냥꾼은, 불쌍한 먹잇감의 숨통을 노렸다.
『그래, 네 실력으로는 아직 벅찬 아이지. 당분간은 몸을 수습하거라.』
“죄송합니다. 좀 더 정진하겠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고개를 숙인 알베르트는 몸을 돌렸다.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자. 수련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다.
딱, 하고 사부님의 지팡이가 알베르트의 뒤통수를 때렸다.
『어딜 가는 것이냐?』
“네? 몸 상태가 이러니, 잠시 정원을 둘러보러···.”
『몸을 쓰는 것만이 수련은 아니다.』
“······.”
사부님의 말에 담긴 의향을 알아들은 알베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뿐인 제자가 아프든 말든, 수련을 계속하겠다는 말인가?
『알아들었으면 자리에 앉아라. 너는 내공을 다루는 법부터 다시 연마해라.』
“통증이 심해서 내공을 운용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말이 많구나. 그만 투덜거리고 앉아라.』
알베르트는 한 번 더 불만의 목소리를 냈지만, 돌아온 건 사부님의 지팡이였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한 알베르트는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조식에 들어서자 사부님의 손이 알베르트의 등을 짚었다. 사부님의 안내를 받은 내공이 혈도를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엉망진창이구나. 내공을 어떻게 썼길래 혈도가 만신창이가 된 거냐? 』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알베르트를 사부님은 비난했다.
『내공은 널 지키는 검인 동시에, 널 부수는 검이 될 수도 있다. 힘이라는 건 언제나 양면을 가진 검이다. 완벽하게 다룰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발을 딛지도 말았어야지. 그걸 각오했던 녀석이, 자신의 내공에 휘둘리는 거냐? 못 미더운 녀석이구나, 정말로.』
날카로운 말과는 달리 사부님의 내공은 알베르트의 혈도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몇 번이나 한계를 넘어버린 제자의 몸을 달랜 사부님은 목소리를 높였다.
『내공의 주인은 너다. 그 힘에 휘둘리지 말아라. 아무리 강한 힘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욕구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심을 떠올리거라. 중심을 잡는 건 너 자신이다.』
운기조식이 끝나자 제법 몸이 편안해진 기분이 들었다.
수련은 무리더라도, 간단한 내공 운용은 가능할 것 같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부님.”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구나.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는 내공 수련을 반복해라.』
몸의 회복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수련은 끝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알베르트는 천천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가슴 안쪽을 찌르던 통증은 옅어져 있었다.
『일두를 쓰러뜨렸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사부님.”
녹일두. 일찍이 천마의 곁을 지켰던 4명의 흑도인.
그중 하나를 패퇴시킨 제자를 향해 사부는 말을 이었다.
『마음은 꺾이지는 않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무인은 생사결의 순간을 원하면서도, 차원이 다른 강자와 마주하면 마음이 꺾여버린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짓밟힌 마음은 회복되지 않지. 그렇게 마음이 죽은 무인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순환에 빠지게 된다.』
“…….”
사부님이 하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베르트는 알 수 있었다.
녹림왕과의 교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알베르트는 실제로 무너졌다.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고, 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끝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그 깨달음이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제자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알고 있다.』
딱, 하고 사부님의 지팡이가 알베르트의 머리를 때렸다.
그다지 아프지 않은 것이, 평소보다 힘을 빼신 것 같다.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덤 수호자에 관해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라는 듯 사부님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녹림왕, 흑살귀, 암독제, 사희. 4명의 흑도인은 전부 사부님을 따르던 무인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 본좌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이들이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
사부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떠올린 그는 말을 이었다.
『녹림왕은 도의 끝을 보고자 했던 무인이었다.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일격이 그가 꿈꾸는 도법이었지. 흑살귀는 자신과 같은 살수가 더는 나오지 않길 바랐다. 가면 아래의 인격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암독제는 뒷세계가 양지로 나오길 바랐다.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햇살 아래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사희는 손이 많이 가는….』
사부님은 말꼬리를 흐렸다. 드물게도 그 턱이 한숨을 쉬는 것처럼 흔들렸다.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눈치요?”
사부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알베르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꿈은 이룰 수 없었고, 닿고자 했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의 가신들은 아직도 부서진 세상을 헤매고 있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던 녹림왕과 그 뒤를 잇던 수많은 망자.
수백 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헤매던 이들을 못 미더운 알베르트의 말을 믿고 사라졌다. 그들이 넘겨준 짐. 사부님이 쫓던 꿈. 천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를 알베르트는 느꼈다.
“사부님의 꿈은 제자가 계승하겠습니다.”
적어도 그 4명의 흑도인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족쇄를 끊어주고 싶었다.
그것이 천마라는 이름을 이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다.
『…….』
올곧은 제자의 눈을 응시하던 사부님은 몸을 돌렸다.
『너는 그 아직 그 무게를 모른다. 계승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 전에 무공부터 갈고 닦아라.』
알베르트에게 등을 보인 사부님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알베르트가 뚫고 나온 거목이 있었다. 이제는 두 갈래로 쪼개져 쓰러진 거목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이전에도 말했을 터다. 무의 본질은 체와 기, 심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본좌가 너에게 처음으로 가르쳤던 것은 체를 다루는 일이었다. 기억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사부님.”
보랏빛의 까마귀가 거목에서 날아오른다. 그 모습을 보며 알베르트는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무인의 길을 걷기 위해 사부님의 제자로 들어선 일. 아홉 번의 절.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비무. 그리고 사부님은 알베르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내려준 첫 번째 가르침은 찌르기였다.
나뭇가지 하나로 시작한 수련은 지금 그가 다루는 초식의 기본이 되었다.
『그 당시 네가 다룬 힘이 바로 체다. 기를 다루지 않았음에도 순수한 체의 힘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럼 극한에 달한 기를 네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면 무엇이 가능하겠느냐?』
“검강이지 않을까요?”
팔짱을 낀 사부님은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대답은 오답이다. 너는 아직도 형(形)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제자의 깨달음이 얕은지라,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검기나 검강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극한에 달한 기는 너의 심상이 원하는 바를 구현화 한다. 위대한 순환이 너의 의지를 듣고, 그 바람에 답한다. 그러나 바로 결과가 나타나는 체와는 다르다. 위대한 순환은 너의 의지를 따르려 하지만, 기와는 달리 체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이는 오히려 정신을 무너뜨린다. 그것이 심마(心魔)다.』
마음에 깃든 악마.
무인이라면 누구나 경계해야 할 위협에 관해서 이야기 한 사부님은 말을 이었다.
『본좌는 너에게 체와 기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심이 남았구나. 극한에 달한 심은 구체적인 척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걸 판별할 수 있는 이는 무림에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지이며, 진정한 심을 갖춘 자는 이를 주변에서 느끼게 만든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심이 있는 무인에게 한계란 의미가 없고, 모든 걸 넘어설 수 있는 의지가 깃든다. 무인은 누구나 심을 가지고 있다. 그 심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는 알 수 없어도 말이다.』
“하지만 체와 기만 있으면 무를 다루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까?”
『심이 없는 자는 무인이라 할 수 없다.』
사부님은 제자의 물음에 단언했다.
『심이 없어지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업이다. 업을 짊어진 자는 더는 무인이 아니다. 명심해라, 아이야. 그들은 그저 이 드넓은 무림에서 사냥감을 찾아 떠도는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다.』
심과 업.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사부님은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다
분명 알베르트는 이해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겠지. 천마의 사념이라는 사부님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물어본다 한들 사부님이 대답해줄 가능성은 없다. 아마 그가 한 사람분의 무인이 되고 난다면, 그때는 알려주지 않을까?
“사부님, 생사결의 순간에야말로 무인은 빛나는 법입니다.”
맥락 없이 나온 제자의 말에 사부님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꽃과 같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질 때는 덧없이 떨어지는 법이다.』
한순간을 위해서 피어나고 지는 꽃. 그 모습은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발버둥과도 같다. 담담하기 짝이 없는 사부님의 목소리에 어린 슬픔을 읽어낸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하지만 사부님.”
『?』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꽃도 있습니다.”
『그 꽃이 너라는 말이냐?』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당돌한 제자의 대답에 사부의 아래턱이 흔들렸다.
『과연, 그 말도 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