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시녀와 마녀
라피엘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걸까. 지저분했던 정원은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었다. 방향성 없이 자라나던 때와는 다르다. 지저분했던 정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집사인 알베르트의 손길이 닿은 정원은 누가 봐도 깔끔했다. 나무의 잔가지는 보이지 않고, 군데군데 헤졌던 잔디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는 버려진 성이라고 볼 수 없다. 아직 준비할 곳이 더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사람이 살만한 장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후원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라피엘은 유피에르 황녀와 알베르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연못을 배경으로 삼은 유피에르는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성의 공주님과 그런 아가씨를 보좌하는 집사. 찻잔이 비자 말없이 잔을 채우는 알베르트의 동작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작은 입술이 열리고 분홍빛의 차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차를 넘기는 목젖이 묘하게 요염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유피에르는 다가오는 라피엘을 보고 잔에서 손을 뗐다.
라피엘은 익숙한 동작으로 예의를 차렸다. 인사를 받은 유피에르는 물었다.
“어쩐 일로 혼자래? 오빠는?”
“황자님께서는 수련 중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문지기 아저씨가 있는 작은 연무장에서 황자님은 무예를 연마하는 중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굳는다는 지론에 따라서 그는 손을 움직이기 바빴다. 평소라면 근처에서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을 테지만, 오늘은 자리를 비워 달라는 명에 따라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유피에르가 잔을 내려놓자 소리 없이 다가온 알베르트가 잔을 채웠다. 내용물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입으로 가져간 그녀는 만족한 숨을 뱉어냈다.
“잘됐네. 앉아. 차라도 한 잔 하자.”
“황녀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잔이 부족해 보이니….”
라피엘은 말을 멈췄다. 사전에 준비가 되어있었던 모양인지, 알베르트가 유피에르의 맞은편에 빈 잔을 올리고 있었다.
“잔은 있고. 또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라피엘이 이야기할 것도 없다. 테이블 위에 냅킨이 올라가고, 쿠키가 담긴 그릇이 준비됐다. 이 많은 물건을 어디에 숨겨놓고 있었던 걸까? 알베르트는 연미복 안으로 낡은 꾸러미를 감추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유피에르 황녀님. 황자님께서 절 언제 찾으실지 몰라서 다과회를 갖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시더 황자님의 수련이 끝나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셔도 좋습니다.”
라피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나설 곳, 안 나설 곳을 구분하지 못하는 집사다.
“그렇지만….”
“뭐야. 나랑은 차를 마시기 싫다는 거야?”
유피에르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실수했다. 여기서 더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기가 언짢아진 것을 확인한 라피엘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그녀는 유피에르 앞에 앉았다. 라피엘이 자리에 앉자 마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걱정이면 알이 보고 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잔이 채워져 간다. 방금 달인 것처럼 잔에서는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피어오르는 향이 달콤하다. 유피에르 황녀님이 좋아하는 홍차다. 라피엘의 취향은 깊은 맛이 느껴지는 차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몸은 좀 어때?”
“제 상처라면 괜찮습니다. 저보다 알베르트님이 문제죠.”
월아에 내줬던 오른손은 이제 문제없다. 살점조차 남지 않았던 손은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손을 쥘 때면 묘한 위화감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역으로 유피에르의 수발을 들고 있는 알베르트 쪽이 문제였다.
본인은 알고 있을련지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은 숨이 끊겼던 남자다.
사희의 손에 심장이 반파된 집사는 지금도 움직임이 어색했다. 특히 가슴팍에서는 월아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음기가 느껴졌다. 며칠 쉬면 빠져나가지 않을까 싶었던 기운이, 몸 안에 깊숙한 상흔을 남긴 것 같았다.
지금도 통증이 심하겠지. 그러나 알베르트는 단 한 번도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황녀님이 보는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걸까. 라피엘은 말없이 알베르트를 칭찬했다. 사용인이라면 가져야 할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전 괜찮습니다. 낫는 속도가 느릴 뿐이지, 착실하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알베르트는 붉은 스톨을 꺼냈다. 아래팔에 올린 스톨을 유피에르는 자연스레 넘겨받았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이는 바람은 아직 차가운 편이었다. 홍차가 주는 온기만으로는 이겨내기 힘들었다. 드레스 위에 스톨을 걸친 유피에르는 입을 열었다.
“낙양은 좀 어때? 뭔가 재밌는 이야기는 없어?”
“천일소화(千日素花)가 꽤 멀리 떠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번 떠도는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여행이 길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들어본 적 있어. 그 전설적인 신의(神醫) 말이지? 어때, 진짜로 그만한 소문의 주인공이야?”
유피에르는 천일소화라는 말에 흥미를 보였다. 마계 내에서는 대체자가 없다는 명의다. 본명보다도 의명(醫名) 쪽이 압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병이 깊고 얕은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천일소화의 앞에서는 어떤 상처도, 병도 모두 평등하다는 말이 있었다.
“소문 이상입니다. 천일소화의 치료를 받은 이들은 화타의 이름을 거론할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인물이야? 기회가 되면 만나보고 싶네.”
“안면은 튼 사이입니다. 원하신다면 한 번 자리를 주선해보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좋아. 낙양에 갈 일이 생기면 부탁할게. 그 외에는?”
“저잣거리에서는 불온한 소문이 있는지라 시끄러운 편입니다.”
소문? 유피에르의 반문에 라피엘이 대답했다.
“네. 마왕이 곧 부활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
유피에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바깥쪽으로 밀어낸 빈 잔을 치운 알베르트는 깨끗한 잔에 물을 채워 넣었다. 입안을 물로 헹군 유피에르는 다시 물을 뱉어냈다.
“어떤 녀석이 그런 소문을 흘리고 다니는 거야?”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신교(神敎)의 신도들이 흘린다는 말도 있고, 특정 세력이 바람잡이를 푼 것 같다는 말도 있지만. 둘 모두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제국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유피에르는 입안에 남은 홍차의 향을 지웠다.
냅킨으로 살포시 입가를 훔치고 난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는데, 알?”
“제 기억이 맞다면 인족 중에서 마계로 들어간 이는 없을 겁니다.”
“어머, 순진해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
킥킥거리며 유피에르가 품위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라피엘은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말해봐.”
“알베르트가 황녀님을 곁에서 모신지 얼마나 되신 거죠?”
냅킨을 내려놓은 유피에르는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검지로 살포시 입술을 누른 그녀는 말했다.
“음, 이제 1년 조금 넘었을걸?”
“수발을 본격적으로 든 건 한 달도 안 됐어.”
“그랬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라피엘은 적잖게 놀랐다.
“놀랍군요. 겨우 한 달 만에…. 이곳에 오시기 전부터 집사 생활을 하셨던 건가요?”
“한 가문의 수습 집사였습니다.”
라피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알베르트의 행동은 집사의 모범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완벽했다. 차를 맛있게 탄다거나, 물건을 준비한다든가. 이런 건 굳이 집사가 아니더라도 사용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긴 시간을 함께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라피엘이 감탄한 것은 알베르트의 움직임이다.
주인 아가씨인 유피에르의 지시를 받은 것은 없다.
그는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 유피에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먼저 움직였다.
같은 사용인 신분에 있는 라피엘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시더 황자님을 보좌하는 자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평소의 수련 시간이 어떻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신 뒤에는 찬 물을 원하는 것도. 그러나 그것은 반평생을 시더 황자님의 곁에서 수발을 들어왔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자신이 새로운 주인님을 한 달밖에 모시지 않았다면, 알베르트처럼 해낼 자신이 없었다.
“믿기질 않는군요. 어느 가문에서 일하신 지는 모르겠지만, 수습이라는 말은 아깝군요. 제가 보증해드리겠습니다. 알베르트 란. 당신은 이미 훌륭한 집사입니다.”
모든 집사가 바라는 지향점.
주인님의 몸짓과 습관, 목소리에 깃든 버릇을 알아차리고 말없이 행동하는 것. 그러면서도 주도권은 주인님의 손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집사는 어디까지나 주인님의 그림자. 앞으로 나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꾸밈없는 라피엘의 감탄에 알베르트는 빙긋 웃었다.
“내가 그랬지, 유피? 나는 일류 집사라고.”
“아, 그래?”
유피에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관심 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손을 살래살래 저었지만,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걸 라피엘은 알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황녀님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양양은 조용해?”
“양양 말인가요? 소하(小河) 언덕이 봉쇄되었다더군요.”
“소하 언덕이?”
이건 또 예상외의 정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유피에르를 향해 라피엘은 말을 이었다.
“네, 아벨 황자님이 직접 내린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변태 오빠가? 어째서?”
“이유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을 텐데? 그걸 다 감수하면서 봉쇄했다고? 이해할 수가 없네.”
득보다 해가 더 많은 조치다.
유피에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자님의 무덤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모릅니다.”
“할아범의…. 그러네. 그럴 수도 있겠어.”
라피엘의 대답에 유피에르는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사념이 흐려져서? 아니, 그렇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애초에 거기 남아있는 건….
말이 끊긴다.
알베르트와 라피엘이 빤히 바라보는 걸 느낀 유피에르는 거북한 기침을 터뜨렸다.
“또 다른 소식은 없어?”
“아벨 황자님이 두문불출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아벨 오빠가? 몸이 더 나빠진 모양이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별수 없지, 하고 유피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공식선상 자리에는 나왔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드신 모양입니다.”
“로버트 할아범이 대신 나오겠네.”
“로버트 집사장님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노쇠하신 탓에 중요한 회의가 아니고서는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나이는 붙잡아 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 아벨 황자님이라면…?”
대화에 들어오지 못하던 알베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5황자이신 아벨 워스테인님이십니다.”
마족이 아닌 알베르트는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 라피엘이 설명했다.
“지병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말해도 괜찮을까. 라피엘의 시선을 느낀 유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인족이면 모를까, 알베르트에게 숨길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구음절맥(九陰絶脈)이라는 병을 앓고 계십니다.”
“처음 들어보는 병이군요.”
“너희 인족은 그렇겠지. 신성력만 있으면 뚝딱, 하고 고쳐버리잖아.”
“다 그렇지는 않아, 유피.”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신성력이라는 건 만능이 아니다. 알베르트가 루미에르 교의 신성력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유피에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는 여전히 허 의원이 돌봐주고 있는 거야?”
“작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라온이라는 의원이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기에 관해서는 견줄 사람이 없는 의원이라더군요.”
“한기라….”
유피에르는 알베르트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네, 조만간 양양을 방문하는 것도 괜찮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