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월하의 고백 (44/200)

 # 44

월하의 고백

구름 속을 떠다니던 알베르트는 의식을 되찾았다.

따뜻한 손길이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익숙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는 잘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붉은 두 눈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알베르트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했다.

들뜬 몸에 화답하듯이, 흐릿한 의식은 추억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로 들어간 아가씨를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뿔뿔이 흩어진 식솔을 모으기 위해서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저택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찬란했던 루드비히 공작가의 위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흙먼지만 남은 그곳에서 그는 사용인들의 행적을 좇았다. 사용인 대부분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족의 존재에 공포를 느낀 식솔들은 금지된 숲과 떨어지는 길을 택했고, 공작령에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남은 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수도에 마련된 저택으로 돌아가자는 알베르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족이 새긴 상처는 그들의 마음에 큰 그림자를 드리워버렸다.

물어보고, 거절당했다.

제안하고, 쫓겨났다.

몇 번이나 문턱에서 거부당했을까. 해가 떨어지는 걸 본 알베르트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쓸쓸한 저택. 당시의 참사가 엿보이는 폐허에서 알베르트는 인형극을 봤다.

은빛 달 아래에서 펼쳐지는 인형극은, 병정 인형과 시녀 인형의 사랑 이야기였다.

관객들은 몇 되지 않는다. 폐허가 된 이곳을 장성한 어른들은 피했고, 장난기 많은 아이만이 간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한데 모은 인형사는 작은 인형극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알베르트와 유피에르의 첫 만남이었다.

“고백할 것이 있어, 유피. 사실···. 네 첫인상은 최악이었어.”

메마른 음성이 알베르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단순히 말을 자아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가슴에서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

유피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리따운 얼굴선을 타고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렸다.

“놀랍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계를 뚫고 찾아온 손님이 이런 꼬맹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것도 할아범의 로브를 들고 말이야.”

일그러지기 시작한 금지된 숲은 침입자들을 거절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마계와 마찬가지다. 만약 알베르트가 리치의 로브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유피에르의 성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무리가 진다.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아래에서 유피의 모습만이 알베르트의 눈에 담겼다.

고양이 같은 얼굴이 샐쭉해졌다.

알베르트의 눈에는 기분이 상한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피에르.”

“뭐야?”

누가 그랬던가. 사랑이라는 건 먼저 반한 측이 진 거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평생을 다해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리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알베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설령 이 마음이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이 열병은 낫지 않겠지.

자신의 감정은 이미 막을 수가 없었다. 이 호의가 그녀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족의 황녀가 인간의 마음에 대답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알베르트 란은 유피에르 바토리를 사랑했다.

그 사실은 설령 신이 오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잘도 그런 말을···.”

한숨 섞인 유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감싸 안던 기운이 일순간 따갑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일까?

[연애 사업 중인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마스터. 하지만 말을 아끼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자네, 거기 있었는가?’

애타게 찾아도 대답하지 않았던 천칭의 속삭임에 알베르트는 반가움을 느꼈다.

[정신 차리시죠. 마스터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사희의 정신세계에서 심장을 당했습니다.]

‘······.’

[악몽의 상처는 곧 현실의 상처로 돌아온다. 유피에르의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알베르트는 어렵사리 기억을 되짚었다.

그랬다. 자신은 사희와의 사투에서 패배했다. 강기 다발에 전신을 난도질당했다. 그 중에서도 치명상은 가슴을 당했다는 것. 분명 심장이 꿰뚫렸다.

[유피에르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마스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는 시더에게 받은 촉매제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니죠. 이건 차후 알려드리겠습니다.]

‘촉매제라면, 그 나무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부 사용했습니다. 마스터를 위해서.]

‘······.’

뒤늦게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이 따뜻한 기운의 정체는 알베르트의 목숨을 붙잡기 위한 동아줄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몸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마스터. 잠시 눈을 붙이는 걸 추천합니다.]

알베르트는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료에 열중한 유피의 모습 외에도 시더와 라피엘이 보였다. 라피엘은 괜찮은 것 같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건 아무래도 자신인 것 같다.

괜찮다고 입을 열려던 알베르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몽롱한 의식은 곧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

알베르트가 병상에서 일어나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몸이 정상으로 회복된 건 아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다. 실제로 지금 유피와 시더의 찻잔을 준비해온 건 손님인 라피엘이었다. 알베르트는 목례로 감사를 표했다.

몸을 추스른 라피엘은 손에 붕대를 둘렀을 뿐, 어딘가 크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알베르트와는 달리 그녀의 상태는 금방 호전된 모양이다.

[심장을 당한 것과는 다르죠, 마스터.]

‘천운이었구먼.’

테이블을 사이에 둔 시더와 유피의 앞에는 한 자루의 검이 있었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낡은 검집에 수납된 얄팍한 느낌의 검이다. 칼자루에는 뱀의 머리가 장식품처럼 달려 있었다.

“거짓말처럼 달의 기운이 다 빠져버렸네.”

“우리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유피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시선은 낡은 검을 향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가리는 무기, 월아. 전승대로라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설마 사희가 월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이상 월아를 다루기 위해서는 사희를 쓰러뜨려야만 하겠지.”

“그거, 가능한 일이야?”

“모르겠군.”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혹을 떼러 갔는데 역으로 혹을 하나 더 붙이고 온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원래는 봉인할 생각이었다.”

“봉인? 구태여 회수할 필요가 있던 거야?”

어차피 무덤 수호자가 보호하고 있던 유산이다.

그걸 굳이 꺼내 와야 했냐는 유피의 물음에 시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루미에르 교야 이전부터 그랬다지만, 크로만 공작가는 이야기가 다르다. 놈들의 가신이 며칠 전부터 금지된 숲을 들락거렸다. 루드비히 공작가와는 다르다. 음흉한 그 녀석들이 움직인 건 몇 년 만의 일이다.”

“크로만이라···. 분명 마탑을 관리하는 마도 가문이었지?”

델 리아 신성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

루드비히 가문과 크로만 가문은 마족 내에서도 꽤 유명한 모양이다.

[크로만 가문이라면 분명 전 마스터가 도움을 받았던 가문이지 않나요?]

‘잘 기억하고 있구먼, 자네.’

크로만 가문.

예로부터 델 리아 신성 제국을 지켜왔던 마도 가문이다. 마도의 총본산인 마탑을 관리하에 두고 있으며, 마도 병단이라는 독자적인 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드러난 힘만 갖고 본다면 루드비히 가문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크로만 가문에는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은연중에 암적을 몰래 제거한다든지, 제국의 이득에 반하는 귀족들을 숙청한다든지.

사실 뒷세계의 검은 손이라는 건 크로만 가문의 당주를 말하는 거라든지.

우직한 루드비히 가문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가문이었다.

하지만 크로만 가문은 어느 때나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제국이 흔들릴 때면 언제나 그 중심을 잡아 주었던 가문이다. 때문에, 알베르트는 크로만 가문을 싫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루드비히 가문이 몰락한 이후 그들은 아가씨에게 손을 빌려주었다.

‘모든 기반을 잃고 기울어진 루드비히 가문을 억지로 붙잡아 준 가문이네.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사의 말을 표해야겠지.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가씨는 작위뿐인 영애로 남았을 걸세.’

식솔들은 물론이고 힘이 있던 가신들은 대부분 참사에서 목숨을 달리했다.

루드비히 가문이라는 배경을 보고 줄을 섰던 늑대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도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남은 건 혼돈뿐.

그들을 규합해야 할 아가씨는 아직 성인식도 맞이하지 못한 16살 소녀였다.

[하지만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크로만 가문을 싫어하지 않았나요?]

‘그랬었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가씨는 크로만 공작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의 위세를 빌리는 것이 싫었던 걸까, 아니면 일평생 경쟁 관계에 있었던 가문의 도움을 받았던 게 굴욕이었던 걸까. 아마 둘 모두일 거라고 알베르트는 생각했다.

“알베르트.”

“하문하시죠, 황자님.”

사고를 중단한다. 시선을 들어보니 시더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검을 알베르트에게 내밀었다.

“이건 자네에게 맡기지.”

“네?”

알베르트는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월아를 사용하든 말든, 그건 자네의 선택이네.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악몽을 통과하고, 월아의 주인이 되길 바라네. 나는 자네가 그분의 유지를 이었다고 생각하니까.”

“황자님, 저는 인간입니다.”

“알고 있다.”

아니, 이 사람은 모르고 있다. 알베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검은 보통 검이 아닙니다. 마족의 유산이자 심장을 찌를 검입니다. 그런 무기를 인간인 저에게 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신 겁니까?”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인간은 아니지.”

시더는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그의 손이 알베르트의 어깨에 올라갔다.

“나는 내 눈을 믿는다. 자네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

대책 없는 사람이다.

알베르트는 무심코 라피엘을 보았다.

묘한 데자뷔가 느껴지는 상황이다. 처음 그와 만나서 주먹을 섞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지. 이번에는 그때와는 이야기의 사안이 다르다. 라피엘이라면 말려주지 않을까. 하지만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라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마치 월아를 잘 부탁한다는 것 같다.

“시더 황자. 알베르트 란은 내 가신이야.”

“알고 있다, 유피에르 황녀. 그 약아빠진 아벨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너에게 주는 편이 낫다.”

5황자의 이름이 언급됐다.

시더의 꿍꿍이가 알고 싶은지, 유피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시더는 아벨과는 다르다. 직감대로 행동하고 육식 동물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본능에 따른다. 이런 인물은 어디로 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시더는 자신의 제안을 거둘 생각이 없다.

여기서 알베르트가 받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힘을 쓰더라도 월아를 건네고 가리라.

“어쩔 수 없군요. 이건 제가 잠시 맡아두기로 하겠습니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받았다. 낡은 검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웠다.

시더는 알베르트의 어깨를 당겼다. 목소리를 낮춘 그는 귓가에 말했다.

“내 동생을 부탁하지. 어렸을 때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던 아이다. 자네가 곁을 지켜준다면 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어.”

시더는 알베르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알베르트는 그를 바라보았다.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얼굴을 지켜본 그는 대답했다.

“그건 따로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베르트의 말에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던 걸까, 시더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렇지, 그래! 내 동생이지만 매력적인 아이지!”

“······.”

한심하다는 유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기뻐해라, 동생아. 널 이렇게나 사랑하는 남자가 있구나.”

“꼬맹이의 불장난 같은 사랑에는 관심 없네요.”

[그렇다는군요, 마스터.]

‘자네는 좀 조용히 하게.’

심드렁한 유피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상처를 입었다.

그동안의 어필은 모두 쓸데없는 노력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더는 기운이 죽은 알베르트를 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지, 유피에르. 이건 어린애의 사랑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또?”

“사나이의 사랑은 말이다. 설령 죽더라도 꺼지지 않는 불길 같은 거다. 그 불길을 꺼뜨릴 수 있는 건 사나이의 사랑을 받는 여자밖에 없다. 물론 그 불길을 받아들일지, 꺼버릴지는 네 마음에 달렸겠지만 말이다.”

비단 유피에게 하는 말만은 아니다. 시더의 뒤에 있던 라피엘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해서 꺼낸 말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알베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넘기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한다. 붉은 두 눈이 아름답다. 긴 속눈썹이나 모양 좋은 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가는 버릇이 있는 걸 알베르트는 알고 있었다. 아마 본인은 잘 모르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다. 자존심이 강하고, 알게 모르게 상처도 잘 받는 여자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딴 소리만 할 거면 빨리 가버려.”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몸만 추스른 뒤에 갈 생각이다. 북부에 볼일이 있으니 말이다.”

“추스른 뒤에? 좀 더 남아 있겠다는 말이야?”

“뭐냐. 오빠랑 같이 있는 게 그리 기쁜 거냐?”

코밑을 쓱 닦은 시더는 뭔가 간지럽다는 얼굴을 띄웠다.

“정말로 철이 들었구나.”

“그냥 여기서 죽어버려.”

유피의 얼굴이 투명해졌다. 골격이 떠오르고, 그녀의 마나에 반응한 세상이 답을 자아냈다.

날아드는 불길을 시더는 웃으면서 튕겨냈다. 불꽃과 맞닿은 바닥 한 편이 타오른다. 말없이 뒷자리를 지키고 있던 라피엘이 물을 뿌렸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뒤처리가 끝나기 무섭게 찻잔이 바닥을 뒹굴었다.

유피의 마법 행사는 끝나지 않는다.

공정을 마친 술식이 기적을 자아내고, 완성된 기적은 현실을 침식한다. 시더는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테이블이 불길에 휩싸이고, 의자는 빙창(氷槍)에 꿰뚫렸다.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말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선뜻 말을 걸기도 힘든 상황이다.

깨진 찻잔을 한쪽으로 치운 라피엘은 알베르트를 불렀다.

그녀는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바닥에 모포를 깔았다. 시더와 알베르트가 주먹을 섞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모포다. 사부님이 그리 했듯이, 이번에는 모포 위로 알베르트가 앉았다.

“말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두 분에게는 아침 인사나 다름없는 일상적인 일이거든요. 오늘처럼 즐거워 보이는 건 간만의 일이지만 말이죠.”

“즐거워?”

“네. 유피에르 황녀님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의 말을 표하겠습니다, 알베르트님. 당신과 만난 유피에르 황녀님은 변했습니다.”

“…….”

그녀가 변했다고? 잘 모르겠다. 알베르트가 과거의 유피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있던 그녀는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좋은 방향으로 변하셨습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라피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에 어린 감정은 마치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의 얼굴과도 같았다.

“유피는 사랑받고 있군요.”

“알베르트 님도 그래서 반하신 거 아닙니까? 황녀님은 본인만 모를뿐이지, 매력적인 분이니까요.”

라피엘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부인할 수 없었다.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유피의 모습도 알베르트에게는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다루는 마법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상처를 입을 것 같다. 잘 보면 하나하나 응대하고 있던 시더도 주먹에 권기를 두르고 있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 차라면….”

라피엘의 손에서 따뜻한 차를 건네받은 알베르트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더가 즐거워하는 건 한눈에 봐도 알겠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주먹을 부딪치는 모습은 장난치기 좋아하는 악동을 닮아있었다. 그렇지만 유피는….

“오빠는 반성 좀 해야 해!”

“반성? 좋다. 실력으로 날 쓰러뜨리면 반성이라는 걸 한 번 해보마!”

유피는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꺼내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서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쉽게 끝나지는 않겠다.

둘의 장난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알베르트는 현실을 회피하듯이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정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너머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어느새 기나긴 겨울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살풍경했던 후원에는 갓 자락 새싹들이 모습을 보이리라.

이름 모를 마족의 꽃과 풀이 금방 정원을 가득 채우겠지. 작년에는 수련에 열중한 탓에 정원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를지도 모른다. 정원을 가꾸고, 성의 청소를 마무리 짓자.

“와라, 유피에르 황녀!”

“후회하지 마!”

그 전에 이 둘을 말릴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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