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악몽(3) (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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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3)

전장은 고요했다.

델 리아 신성 제국의 수도, 로열 블러드의 성벽에 선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진격하는 마족을 보았다. 엄청난 머릿수다. 망자들 외에도 마물로 보이는 존재들이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나 평원을 가득 채운 마족 군단을 확인한 아리시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크로만 공작가의 마도 병단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천 명이 넘었던 병단은 기나긴 3차 대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반도 안 되는 수로 줄어있었다. 마도 병단의 일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뒤로 흑백기사단과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이 보였다. 이곳이 뚫리면 더는 뒤가 없다. 제국 최후의 방파제.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마족이 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연설 준비가 끝났습니다, 루드비히 공작님.”

셀렌느 크로만 후작이 검을 앞으로 모았다.

3차 대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사선을 함께 넘어온 동료다. 본래 마도 병단의 대장이던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총대장 자리를 넘겼다. 6서클 대마법사인 동시에 소드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천재 마검사. 이곳에서 아리시엘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실력자는 이 남자가 유일했다.

“…….”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순백의 소녀는, 루미에르 교의 성녀인 프랑소와다.

말없이 아리시엘을 바라본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로사리오를 양손으로 쥐었다. 여신님이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성스러운 힘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마족의 진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승리는 가져올 수 있어도, 전황을 뒤엎을 승리는 어느 곳에서도 가져오지 못했다. 루미에르 교가 자랑하는 성가대는 전멸했고, 남아있는 사제들의 수도 몇 되지 않는다. 성 미뉴에트 가문과 챈드리 가문의 생존자로 이루어진 흑백기사단은 그 몸에 상처가 가득하다. 마나를 운용할 수 없다면 검을 드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부상자도 더러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들의 눈에 깃든 빛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그녀가 있었으니까.

제국의 수호자, 천칭의 마녀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황혼이 지고 있습니다. 빛은 떨어졌고, 어둠이 이 땅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마족과 전쟁을 벌인 마지막 국가로 기록되겠죠.”

하얀 수정구에 떠오른 아리시엘의 모습은 수도 곳곳에 투영되고 있었다.

도망칠 장소는 없다.

제국의 신민들은 최후의 수호자가 자아내는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제국의 수호는 우리의 손에 달렸습니다. 로열 블러드가 함락된다면, 이 뒤로는 잔혹한 악몽만이 남겠죠. 안타깝게도 그것이 현실입니다.”

이교도와 다른 왕국들은 마족과 싸울 의사가 없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속국이 되는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들은, 전면전을 펼치는 걸 피하리라. 제국이 힘을 잃은 시점에서 인족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제국은 천년을 넘는 세월 동안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다가오는 황혼을 막을 수는 없겠죠.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퍼할 까닭은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이 순환의 굴레입니다. 제국이 오늘 황혼을 맞이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순환이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새로운 순환을 이어나갈 겁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남자의 모습을 떨쳐낸 아리시엘은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를 드세요,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검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쿵쿵, 하고 발을 구른 흑백기사단은 검을 뽑았다. 그 위로 오러가 치솟았다.

“신은 그대들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들이여. 여신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겁니다.”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소와 성녀의 뒤에서 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마도의 끝은 이곳이 아닙니다, 마법사들이여. 신비로 향한 여정은 다시 시작될 겁니다.”

마도 병단의 마법사들이 손을 들었다.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에 세계가 대답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푸른 선은 제국을 상징하는 루미에르 교의 로사리오를 만들었다.

“이 시대는 이제 끝을 고합니다. 눈을 돌리지 마세요, 영웅들이여. 모두가 살아서 이 자리에 남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겁니다.”

그녀의 발아래에서 푸른 빛을 머금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자신이 메고 있는 로사리오를 잡았다.

소중한 집사가 선물해준 마정석에 입맞춤을 남긴 그녀는 입을 열었다.

“델리아 신성 제국을 위하여. 다프네 여신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길!”

“델리아 신성 제국을 위하여!”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한 연설이 끝나자, 성녀 프랑소와는 아리시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승산은 있다고 보시나요, 천칭의 마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성녀.”

프랑소와는 성벽 너머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루나 평원은 검은 깃발을 내건 망자들로 가득했다. 마족의 13황녀가 이끄는 3군단이다. 제국과는 접전을 최대한 피했던 마족의 군세다. 사기가 높은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온전한 상태를 갖춘 이들과 싸우기에는 수비병력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프랑소와. 네 신성력으로 어떻게 안 되겠어?”

“내 목숨을 전제로 대기적을 발현한다면, 10분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몰라.”

“10분….”

너무 짧다.

성녀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도 이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전장의 여신님은 어때? 이 상황을 바꿀 마법은 없는 거야?”

“그런 편리한 마법이 있었으면 진작 구사했어.”

아리시엘의 어깨에는 천칭을 기울이는 작은 요정이 있었다.

은빛의 요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게를 달고 있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천칭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인족과 마족의 절대적인 역량 차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나갔다 올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3군단의 하늘을 지키고 있던 본 드래곤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손님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오는. 캐스팅에 들어간 마도 병단을 막은 아리시엘은 플라이(Fly)를 시전했다. 본 드래곤의 위에는 익숙한 은발 마녀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유피에르. 아니, 이제는 황녀 전하라고 불러줘야 하나?”

“그럴 필요 없어, 아리시엘. 이전처럼 언니라고 불러줘.”

유피에르 바토리. 마족의 제 13황녀.

3군단을 통솔하는 군단장은 아리시엘을 보며 유유히 미소를 머금었다.

“기억을 날조하지 마. 난 단 한 번도 당신을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어.”

“그럼 지금 불러보는 건 어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

“유피에르. 당신이란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평소와는 다르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아니다.

아리시엘을 바라보는 유피에르의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 아리시엘.”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아리시엘은 표정을 무너뜨렸다.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전장에서 벗어난다면, 우리 군단이 아리시엘 루드비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제국을 배신하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루드비히 가의 가주가?”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욕을 면전에서 당할 줄은 몰랐다. 제국의 수호신. 예로부터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왔던 가문의 마지막 후손은 침략자를 노려보았다.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아리시엘. 알과 함께 도망가라는 말이야.”

“…….”

일순간 아리시엘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운 이름이 들려준 건 따뜻함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이 목에 걸린 것처럼, 토해낼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손아귀를 따라 흘러내렸다.

무심코 힘이 들어간 걸까. 손바닥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픔은 없었다. 통증보다도 강렬한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면 꽤 긴 인연이었어.”

유피에르는 아리시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멋대가리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어. 집사라는 족속들이 그렇잖아? 자신의 명예보다 가문의 명예를 원하고, 가문의 명예보다 모시는 주인님의 행복을 바라는. 그런 의미에서 알은 완벽한 집사였다고 생각해.”

“입 다물어, 유피에르 바토리.”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꺼내는 유피에르의 눈은 그리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다. 셋이서 수도의 거리를 외출할 때면 언제나 그랬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말다툼을 벌이면서 웃고, 떠들고. 도가 지나치면 알베르트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목적 없이 오가던 번화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러 가거나. 막상 가서 보게 되면 소문만큼의 물건은 아니어서 실망하는 일도 많았다. 헛된 발걸음을 하고 나면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약속한 것처럼 말싸움이 일어났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이교도가 파는 물건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했잖아.」

「이상하네. 내가 기억하기로는 너도 찬성했던 것 같은데. 안 그래?」

「내가 아니라 알이 찬성한 거야. 알은 당신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아니, 아가씨.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알은 조용히 해.」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알.」

「억울한 건 저 혼자입니까?」

덧없는 미소가 유피에르의 입가에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상이 얼마나 행복했던 건지, 유피에르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새인가. 자신은 혼자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유피에르 바토리는 상처받은 새였다.

간신히 새장의 밖으로 나왔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새장 안에 틀어박혔다. 날아가는 법을 잊은 게 아니다. 하늘에 나와봤자 상처받을 뿐이니까. 그걸 알아차린 새는 자신의 날개를 접었다.

하지만 그 새를 다시 하늘로 인도한 것이 누구였던가.

자문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알베르트 란과 아리시엘 루드비히.

그녀에게 다가온 소중한 가족의 눈이, 지금은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 걸까.

우리는 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버리고 만 걸까.

모르겠다. 모든 걸 돌려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하다못해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당신이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을 버린 건 당신이야, 유피에르.”

“뭘 다르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당신과는 달라!”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서툰 거짓말은 그만해.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알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야. 알이 너를 지키기 위해서…”

마나가 튀어 오른다.

순식간에 공정을 마친 별빛의 창이 유피에르를 향해 쏘아졌다. 천칭이 자아낸 별의 마법이다. 유피에르가 타고 있던 본 드래곤이 반응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날개에 별빛의 창이 박혔다. 크르르, 하고 본 드래곤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아리시엘의 어깨에 있던 은빛의 요정이 천칭을 기울였다.

“그 더러운 입으로 한 번만 더 알을 언급하면 진짜로 죽여버리겠어.”

“…….”

유피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네.”

“통보를 잘못 말한 거겠지.”

할 말은 그게 전부다. 이제 두 여인이 서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은 없겠지.

이야기를 더 이어가는 건 무리겠지. 지금 나누는 이 대화가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았다.

“하나. 거짓말을 한 게 있어.”

“?”

그러니까 유피에르는 솔직해졌다.

아마도 이런 상황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말.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매를 떠올린 그녀는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널 싫어한 적이 없었어, 아리시엘 루드비히. 너도 나와 같을 거로 생각해. 나는 널 자매처럼 여겼는데, 그건 나 혼자만 그랬던 거니?”

“…….”

아리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등을 보였다.

묵묵히 성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지켜본 유피에르는 본 드래곤의 머리를 돌렸다.

두 마녀가 걷는 길은 이제 겹치지 않는다.

교차할 일이 없던 평행선을 잇던 남자는 더는 이곳에 있지 않았으니까.

“아리시엘?”

친우인 프랑소와의 부름에도 아리시엘은 답하지 않았다.

성벽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장을 확인했다.

기분 탓인지, 마족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천칭.”

그녀와 함께하는 성좌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부름에 답한 천칭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옆으로 떠올랐다.

유피에르의 호령 소리와 함께 3군단은 발걸음을 떼었다.

기수를 돌렸던 유피에르의 본 드래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본 드래곤의 브레스가 성벽을 향해 떨어졌다.

“전력으로 갈 거야. 복종해.”

[마스터의 뜻이라면.]

달을 닮은 마법진이 그녀의 발자취에서 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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