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악몽(2)
박쥐의 피막과도 같은 날개가 펼쳐졌다.
날아오르듯이 거리를 좁힌 라피엘은 알베르트를 향해 월아를 휘둘렀다. 검이 교차한다. 월아와 맞닿은 지팡이 검에 뿌연 성에가 어렸다. 한기(寒氣)? 아니, 이건 음기(陰氣)에 가깝다. 손목으로 올라오는 추위를 느낀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들러붙는 음기를 떨구기 위해 검을 물렀다.
그러나 검을 회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월아와 일심동체가 된 것처럼, 지팡이 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황한 알베르트의 눈에 하얀 뱀이 들어왔다. 라피엘의 목덜미에서 내려온 사희는 스르르 미끄러졌다.
손을 무를 시간은 없었다.
월아를 타고, 지팡이 검을 타고 움직인 사희는 알베르트에게 독니를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알베르트의 손등을 꿰뚫었다. 살점을 파고든 부분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손을 잠식하고, 팔을 타고, 목으로 번지기 시작한 빛은 어느새 알베르트와 라피엘을 먹어치웠다.
이윽고 돌로 된 두 남녀가 남았다.
「지고한 왕관이 부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피에르는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들었다.
발현을 기다리고 있던 마나가 그녀의 발치에서 떠올랐다. 선은 원을 그리고, 원 안에서는 나무의 뿌리를 닮은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마법진은 유피에르와 두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보다 짙은 어스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작은 심연은 고개를 들리라.」
라피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희가 가진 특수한 장벽을 뚫어야 했다.
평소와 같은 마법 행사로는 간섭할 수 없다. 마나의 질을 높인 유피에르는 잿가루를 뿌렸다.
「보아라, 이 연기가 그대의 살이 될지어니.」
시약병을 꺼낸 유피에르는 마법진으로 검은 피를 뿌렸다.
「마셔라, 이 물이 그대의 피가 될지어니.」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핏방울이 맺힌 보석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차오르는 마나를 보고 있던 유피에르는 라피엘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소생(小生)」
라피엘의 몸을 덮고 있던 석회가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사희는 반응하지 않는다. 숙주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길이 없는 걸까. 혹은 생각 이상으로 알베르트의 저항이 거센 걸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기고 돌아올 생각인 걸까, 이 소년은.
자신을 집사로 받아달라는 알의 얼굴을 떠올린 유피에르는 실소를 지었다.
설마 꼬맹이를 의지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개인적인 감상은 집어치운다.
여유가 없다. 라피엘의 몸은 한계에 가까웠다.
음울한 빛이 눌어붙는다. 라피엘의 몸을 녹인 붉은빛은 이제 그녀의 손에 닿아있었다. 속살을 드러내고 타들어 가던 손의 시간을 되감는다. 신경을 잇고, 혈관을 수복하고, 근육을 이어 붙이고, 피부를 재생시킨다.
월아는 라피엘의 손을 죽인다. 유피에르는 라피엘의 손을 살렸다.
파괴와 재생이 반복된다. 파괴되는 속도보다 재생이 빠르기는 하지만, 이미 손가락 부분은 뼈마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 버틸 수는 없다. 형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나, 유피에르의 힘으로도 상처를 회복시키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마족이 다루는 치료 마법은 질이 높지 않았다. 다룰 수 있는 자도 한정적이고, 치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성력은 그들에게 독이었으니까. 들이는 수고에 비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마법적 치료가 아닌, 의학적 치료가 발달하게 된 건 그런 연유에 의해서였다.
아슬아슬한 힘겨루기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타오르는 불길이 유피에르의 곁으로 떨어졌다. 시더 아르테니아다. 그는 유피에르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과연, 그랬던 거냐. 하고 짧게 중얼거렸다.
“회수했어?”
“물론이다. 상황은?”
시더 아르테니아의 손에는 낡은 검집이 들려있었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보잘것없는 외관이다. 희미하게 어린 음기가 없었다면 월순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월아 근처로 가봐. 전승이 사실이라면 분명….”
유피에르는 말꼬리를 흘렸다.
어떤 전조도 없이, 알베르트의 몸을 덮고 있던 석회가 깨져나갔다. 뒤를 이어 그 몸에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오빠!”
“알고 있다!”
시더의 신형이 라피엘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쥔 월아를 월순 안에 쑤셔 넣었다. 검 위에서 꽈리를 틀고 있던 사희가 머리를 들었다. 숙주의 상태를 확인한 사희는 월아로 옮겨붙더니, 칼자루를 향해 미끄러졌다. 칼자루를 에워싼 사희는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라피엘의 손에서 떨어진 월아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칼자루에 붙은 사희는 월아와 함께 흔들렸다.
뱀의 머리, 장식물처럼 굳어버린 사희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피엘의 몸이 갸우뚱거린다. 시더는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작은 입을 비좁고 나오는 숨결은 약하지만, 규칙적이다.
라피엘은 무사했다.
남은 건 알베르트였다.
몸을 두르고 있던 석회가 떨어져 나간 그의 몸은 자상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건 괜찮다.
흩날리는 피는 많지만,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는 없었다. 문제는….
“심장을….”
알베르트의 왼쪽 가슴은 뻥 하니 뚫려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반파된 심장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사희가 남긴 상처는 알베르트를 심장을 꿰뚫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즉사다.
“아직이야, 오빠!”
시더와는 달리 아직 희망을 놓지 않은 걸까, 유피에르는 알베르트의 곁으로 뛰어왔다.
그녀는 품속으로 손을 옮겼다. 딸려 나온 것은 작은 나무통이다. 시더가 건네줬던 세피로스의 나무 조각. 가루를 모아놓은 통을 그녀는 다급히 열었다.
“이미 늦었다, 유피. 아무리 너라고 해도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심장을 당했다.
알베르트는 이미 숨이 끊겼다. 피는 발작적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갈 곳을 잃은 물. 발치에 고인 웅덩이는 점차 그 크기를 불러 나갔다. 유피에르는 식어가는 알베르트의 몸을 눕혔다.
“아니, 살릴 수 있어! 다른 마족이라면 모르지만, 이 남자는….”
망설임은 없었다.
유피에르의 등에서 한 줄기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그녀의 본신을 상징하는 은빛의 날개. 마족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흠칫 놀란 시더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유피, 너….”
“할아범과는 달라.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아! 알은 나랑 똑같으니까.”
신성력을 발휘한 유피에르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알베르트의 가슴으로 향했다. 하얀 손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울컥거리는 피를 토해내는 심장 위로 신성한 막이 생겨났다.
루미에르 교를 상징하는 로사리오가 알베르트의 품에서 흘러나왔다.
일찍이 란 가문에 내려오던 가보. 알베르트의 손을 거쳐 아리시엘 루드비히에게. 그리고 다시 알베르트의 손으로 돌아온 돌은, 이미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거무튀튀한 돌이, 유피에르의 신성력에 반응했다.
*&*
「저 영애로군.」
「루드비히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이래.」
「그런데 검에는 조예가 없다는데?」
「과연, 루드비히 공작가의 힘도 다 옛말이었군.」
아리시엘은 수군거리는 무도회장에서 나왔다.
발코니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집사는 묵묵히 따랐다. 한 남성이 그 곁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앞을 가로막은 알베르트는 카드를 꺼냈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카드를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오늘 밤은 춤을 추지 않겠다고 하시는군요.」
「샤프롱이 집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군, 자네가. 미안하지만, 나는 춤을 추러 온 게 아니네.」
두 손을 든 그는 살짝 웃는가 싶더니, 알베르트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그를 지나쳤다.
발코니로 나온 남자는 아리시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스스로 벽의 꽃이 되시기를 자처하시다니, 잘못했으면 마주치지 못 할 뻔했습니다.」
「제 집사를 무시하고 들어오다니, 무례하군요.」
「실례를 용서해주시죠, 레이디.」
마치 연극을 선보이는 단원처럼, 남자는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셀렌느 크로만이라고 합니다.」
「셀렌느? 소드마스터 셀렌느 크로만 후작?」
한쪽 눈을 장식한 모노클을 남자는 만지작거렸다.
그 입가에서 사람 좋은 웃음이 피어났다.
「이거 영광이군요.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요. 아리시엘 루드비히 영애.」
「크로만 공작은 예로부터 마도 가문이었죠. 마도 가문에서 나타난 소드 마스터. 신성 제국 내에서 이단아로 불리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셀렌느 후작.」
「루드비히 가의 참사를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아리시엘 영애. 라시엘 공작님은 제국의 진정한 충신이었죠. 아마 그 사실을 모르는 귀족은 없을 겁니다.」
「당신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네요. 그래서 용무는 뭐죠?」
아리시엘을 눈가를 찌푸렸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의사를 확인한 셀렌느 후작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애님만 괜찮으시다면, 이번 작위 수여식 때 저희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알베르트의 등을 타고 아리시엘의 손길이 달렸다.
조심스럽게 등뼈를 타고 올라간 손가락은 경추에 닿았다.
일평생 그녀의 곁을 지켜온 집사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평상시에는 검은 연미복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기 흉한 상처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도, 어딘지 모르게 짧아진 뼈도. 그 몸에는 마치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뭉클한 기분이 든 아리시엘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알이 거듭한 수련은 헛된 게 아니야. 보통 사람보다는 좀 더 오래 살 거로 생각해.」
「그런가요. 일찍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제게는 별로 의미 없는 일이지만요.」
「그런 말 하지 마.」
마치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집사의 말에 아리시엘은 차갑게 대꾸했다.
「몸의 단련은 충분해. 이 정도면 오히려 개화하지 않은 게 이상하네. 좋아. 내가 알의 마나를 개화시켜 줄게.」
「마나의 축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분명 젊은 육체를 좀 더 유지할 수 있었던가요?」
「응, 내가 주는 선물이야. 그러니 감사히 받도록 해.」
아리시엘의 발치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알베르트의 마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조금 특이했다. 예전의 그녀라면 개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았다. 무엇보다 알베르트가 단련한 신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알베르트에게 좀 더 재능이 있었다면, 스스로 개화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가씨,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 노화는 막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리시엘의 마나에 공명하던 세계가 일순간 멈췄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입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아가씨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드려야 할 것입니다.」
「······.」
알베르트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말문이 막혔다.
말없이 시선을 든 그녀의 눈에 집사의 흰 머리가 들어왔다. 많은 수는 아니다. 멀리서 본다면 아직 검다고 말할 수 있는 머리다. 그러나 이렇게 지척에서 보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살아온 고달픈 인생이 느껴졌다.
「그런 가르침은 필요 없어.」
이 사람을 고생시킨 건 자신이다. 무언가가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미 충분히 배웠잖아. 뭘 더 배우라는 거야?」
누군가를 잃는다는 슬픔은 더는 겪고 싶지 않다.
집사의 등에 머리를 실은 아리시엘이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알베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든 아리시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가씨의 얼굴을 보며 알베르트는 말했다.
「집사인 제가 아가씨의 선물을 거절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노화는 막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싫다고 했잖아. 알마저 내 곁을 떠날 생각이야?」
「이 집사의 부탁입니다, 아가씨.」
「······.」
부탁이라는 말을 들은 아리시엘은 끝내 시선을 돌렸다. 거북한 침묵이 흐르고 알베르트가 자신의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아가씨는 한숨을 쉬었다.
「알은 못됐어.」
「그게 집사의 역할입니다. 언제나 좋은 말씀만 드릴 수는 없는 법이죠.」
「그러니까 유피에르가 떠난 거야.」
「······.」
그 대답은 작은 복수였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알베르트의 등을 아리시엘은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픕니다, 아가씨.」
「아프라고 때린 거야.」
평생을 곁에서 돌봐준 아버지 같은 집사.
이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을 떠나리라. 그 사실을 깨닫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한줄기의 눈물이 아리시엘의 볼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