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악몽(1) (40/200)

 # 40

악몽(1)

알베르트는 붉은빛이 쏟아지는 공간에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달려오는 라피엘의 월아를 막은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객잔 안이다. 그런가. 여기가 그녀의 정신세계인 모양이다.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등(紅燈) 아래로 드러난 방은 텅 빈 테이블과 의자가 가득했다, 계산대로 보이는 바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객잔을 살펴보던 알베르트는 무대 끝에 은빛의 검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월아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옮기던 알베르트는 그 옆에 한 망자가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작은 원형 탁상을 앞에 둔 망자는 다리를 꼬고 있었다. 망자는 탁상 위의 찻잔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뼈끝과 닿은 차는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 양이 줄어들었다. 잔을 비운 망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아래를 기어 다니던 하얀 뱀이 망자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발과 다리, 허리, 가슴, 어깨, 팔을 지나 손에 도착한 하얀 뱀은 연검(連劍)의 형상을 취했다.

검을 쥔 여리여리한 몸의 망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난초가 무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뼈밖에 남지 않은 발이 난초를 짓밟았다.

알베르트는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부러졌을 터인 지팡이 검이 온전한 형태로 그의 손에 잡혔다.

눈앞의 망자는 사희겠지. 알베르트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주인의 부름에 답한 내공은 순식간에 얇은 검으로 변했다.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 다음 순간 알베르트의 머리카락이 붉게 타올랐다.

중독될 것만 같다.

오감이 확장되는 감각에 알베르트는 무심코 허벅지를 내리쳤다.

아릿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번에는 다르다.

힘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사부님은 항상 경고했다. 과한 힘은 모든 걸 무너뜨린다고. 힘에 휘둘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한데, 전투태세로 돌입한 알베르트를 본 사희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언가 믿을 수 없다는 걸 봤다는 듯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추한 몰골이었던 그녀의 몸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새하얀 다리와 굴곡 있는 여인의 몸이 나타나고, 흉측한 골격에 아리따운 얼굴이 돌아왔다.

「주군?」

사희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검 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혹시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희. 저는 당신들의 주군이 아닙니다.”

「늦으셨군요.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건가요? 소녀, 기다리다가 말라버리는 줄 알았답니다.」

하얀 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사희가 알베르트에게 다가왔다.

아리따운 아가씨가 다가오자 매혹적인 방향(芳香)이 콧가를 간지럽혔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군. 주군이 그러셨죠? 꽃은 덧없이 질 때 가장 예쁜 법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소녀는 질 수 없었죠. 그야 그렇죠. 대사가 눈앞에 있는데 망칠 수는 없잖아요.」

사희의 손가락이 알베르트의 턱 끝에 닿았다. 턱선을 타고 올라간 손이 알베르트의 뺨에 닿았다. 찌릿, 하고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발도했다. 사희는 가볍게 몸을 뒤로 젖혔다. 봉긋한 젖가슴 위로 검 끝이 스쳤다. 한 줄기의 피가 흐른다. 사희는 자신의 가슴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피를 닦았다.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입가로 손을 옮겼다.

마치 뱀과 같은 혀가 피를 핥았다.

요염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요물처럼 보였다.

「기뻐하세요, 주군. 오늘 소녀는···.」

하얀 나신 위로 검은 무복이 떠올랐다.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차림이 된 사희는 연검을 튕겼다.

「주군에게 하나뿐인 이 목숨을 바칠 거니까요.」

하얀 뱀이 기괴한 움직임을 보였다.

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치 채찍처럼 휘어진 연검은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

「어찌 된 일인가요, 주군?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는 없답니다. 소녀는 주군의 모든 걸 받아들일 테니까요.」

대치 상황을 만들 수가 없다.

알베르트의 검이 연검과 닿는 순간, 연검은 검을 타고 올라와 손목을 노렸다.

합을 거듭할수록 날카로운 자상이 알베르트의 몸에 새겨졌다. 검을 놓칠 것만 같다. 뱀은 집요하기 짝이 없다. 이대로라면 오른손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 공세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검을 바로 쥐었다.

채찍처럼 퍼져있던 뱀을 회수한 사희는 꽈리를 틀었다.

마치 고분처럼 만들어진 연검의 벽으로 알베르트의 검이 떨어졌다.

서걱.

연검을 베는 감각이 손에 달렸다. 알이 깨지며 그 안에 몸을 숨겼던 사희의 모습이 보였다. 일순간 그 얼굴에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고분을 이루던 연검이 일제히 검 앞으로 뭉쳤다. 튕겨진다. 연검의 움직임을 읽어낸 알베르트는 뒤로 물렀다.

뱀이 따라붙는다. 채찍과도 같던 연검이 일제히 분열했다.

마치 사복검(蛇腹劍)처럼 나뉜 검 조각에는 검강이 둘려 있었다. 쏟아진다. 떨어지는 검강의 비를 앞에 둔 채 알베르트의 손이 움직였다.

폭우 아래에서 꽃의 우산이 펼쳐졌다. 카라랑,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쉴 새 없이 알베르트의 검이 움직였다. 그래도 떨어지는 폭우의 수를 따라갈 수 없다. 전부 막아낼 수는 없다. 작은 상처는 내준다. 검로를 읽고, 궤도를 틀어낸다. 객잔 바닥에 헤아릴 수 없는 검날이 꽂혔다. 그 빗속에서 검은 신형이 번뜩였다.

날아드는 건 사희의 발이다. 붉은 단화 아래로 하얀 검날이 보였다.

쏟아지는 검우(劍雨) 속에서 알베르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검이 출수했다. 사희의 하얀 발목이 끊겨나갔다.

낭자한 피가 알베르트의 머리를 적셨다. 한 발로 착지한 사희의 손으로 뱀이 돌아왔다. 떨어지는 피는 금방 웅덩이를 만들었다. 재생하지 않는 건가? 알베르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을 때, 사희가 돌아보았다.

「어떤가요, 주군? 제 살결을 베는 감각은 달콤하셨나요?」

“······.”

격통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희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열락에 빠진 짐승을 보는 것 같다. 광기다. 시간이라는 건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부족해요. 주군의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잖아요? 소녀를 조급하게 만드는 건 그만둬주세요.」

사희의 발목이 재생된다. 갓 태어난 아기의 발처럼 여린 피부가 나타나더니, 그 아래로 다시 난초 꽃이 달린 단화가 생겨났다.

쿡, 하고 그녀는 콧소리를 울렸다.

「무심코 밟아버리고 싶어지잖아요. 」

그 순간, 사희의 기도가 달라졌다.

객잔 바닥에 떨어졌던 검날이 천천히 떠올랐다. 주인의 곁으로 회수된 검날은 뱀을 지키듯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검날에 모인 기운이 붉은 검강을 만들었다. 마치 꽃이 흐드러지는 것 같은 광경이다. 사희는 양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꽃의 길은 알베르트를 향해 쏟아졌다.

「자, 화려하게 피어나세요!」

알베르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몸 안쪽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입을 통해 바깥으로 뱉어냈다.

크어엉!

녹림왕의 사자후를 흉내 낸 한 수가 객잔을 울렸다.

심후한 내공의 울림에 길을 잃은 꽃들이 힘없이 떨어졌다.

흩날리는 꽃 안에서 알베르트는 사희의 모습을 쫓았다.

돌연, 어떤 전조도 없이 객잔의 끝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홍등이 흔들리고, 빛이 점멸한다. 소리 하나 없이 사희의 공간이 무너진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바깥에서 일으킨 것이리라. 시더 황자가 해낸 것일까? 혹은 유피가 성공한 걸까? 사고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격통이 알베르트의 생각을 끊어냈다.

푹, 하고 알베르트는 자신의 가슴 위로 튀어나온 은빛의 검을 보았다.

「미숙해요. 너무나도 미숙해요, 주군.」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쿨럭, 하고 알베르트는 한 움큼 피를 뱉어냈다.

어느새 그곳으로 움직인 걸까. 알베르트를 뒤에서 찌른 사희의 주변에 꽃이 떠올랐다.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었던 그 힘은 어디로 간 건가요? 혹시 약해진 건가요, 주군? 그렇지 않으면 소녀가 강해진 건가요?」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검을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사희의 꽃이 일순간 알베르트에게 떨어졌다.

연미복을 파고든 꽃은 자비 없이 그 몸을 난도질했다.

「실망이 크네요, 주군. 아쉽지만, 오늘의 밤놀이는 여기까지랍니다. 괜찮아요. 소녀는 인내심이 강하답니다. 지금까지도 기다렸는데, 앞으로도 못 기다릴 거 없잖아요?」

열상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알베르트는 쓰러졌다.

아픔은 길지 않았다. 눈앞은 생각보다 빠르게 암전했다.

*&*

「이 냄새…. 소문의 13황녀야.」

「그 잡종 황녀님?」

「쉿! 조심해. 아무리 그래도 황녀님이시라고.」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외면한다. 은발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듣고, 몇 번이나 본 광경이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나약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끄러운 소리에서 귀를 닫았다.

잰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간 소녀는 성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문에 노크를 넣었다.

「들어갈게.」

공방 안은 끝없이 나아가는 책장들로 가득 했다.

그야말로 대도서관이라는 광경이 어울리는 방이다.

어두운 복도. 책의 제목조차 보이지 않는 희미한 빛에 기대어 소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장이 사방으로 나아가는 방의 중앙에는 한 책상이 보였다. 그 위에는 작은 인형과 시약병들이 가득했다.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할아범.」

「오셨군요, 황녀님.」

서재 한쪽에서 사서로 보이는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다.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얼굴. 겉모습은 물론이고, 어느 하나 개성적인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처럼 흐릿한 인상의 노인은 소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색이 어두우시군요.」

「별로.」

황녀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노인은 두꺼운 책을 내려놓았다. 양장본으로 보이는 책의 이름은 「사군자」와 「발푸르기스의 자매」였다.

「오늘은 뭘 할 거야?」

「그렇군요. 오늘은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인형술을 가르쳐드릴까요?」

「인형술을?」

고목으로 만든 스태프가 노인의 손에 들어왔다. 붉은 마석이 빛을 뿌렸다. 공방 한쪽에 있던 호두까기 인형과 시녀 인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난스럽게 그려진 얼굴이 귀엽다. 굳어 있던 황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황녀님도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알았어, 할아범.」

스태프를 인계받은 황녀는 노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호두까기 인형이 검을 들고 손을 올린다. 마치 시녀를 호위하듯이 선 호두까기 인형은 연신 입을 부딪쳤다. 시녀 인형은 손을 뻗었다. 호두까기 인형의 얼굴로 손을 올린 시녀 인형은 마치,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것 같았다.

황녀가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마음에 드셨다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돼?」

「얼마든지요, 황녀님.」

「고마워, 할아범!」

꽃을 닮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만개했다.

*&*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온 알베르트는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시대를 풍미했던 꽃이 지고 있었다. 굳건한 검. 루드비히 공작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불에 휩싸였다. 고풍스럽기 짝이 없던 고저택은 검은 재를 흩뿌리는 폐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가던 사용인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직도 그 비명은 귀에서 울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듯이 알베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저택에서 간신히 탈출한 루드비히 저택의 생존자들이 모여있었다.

사용인들은 몇 살아남지 못했다.

꽉 막힌 슈바인 요리장님은 마지막까지 주방을 지켰다. 은퇴할 날이 머지않았던 그는 이것도 자신의 업보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식칼은 이제 수제자였던 로날드의 손에 쥐어있었다.

깐깐했던 빅토리아 시녀장님은 식솔들을 비밀 통로로 안내했다. 통로 앞에 서 있던 그녀는 문을 막고 저택에 남았다. 그녀가 항상 하던 말버릇처럼, 저택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인 로엔은 주인님의 곁에 남았다.

그의 쾌검이 있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마족을 길동무로 데려갈 수 있겠지.

정령사인 에일린도 이곳에 있지 않았다. 로엔이 남는 걸 본 그녀는 이 피난길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가씨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 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세바스찬 집사장님은 비서실에 남았다. 루드비히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였던 그는 주인님의 귀환을 기다린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사용인들을 내보냈다.

주인님인 라시엘 공작은 사자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제국에 4명뿐인 소드 마스터.

그가 직접 이끄는 사자기사단은 제국 내에서도 명실상부한 최강의 기사단이다. 하지만 이 참사를 막을 길은 없다. 주인님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을 버는 일 정도. 알베르트는 아가씨를 부탁한다는 주인님의 마지막 전언을 떠올렸다.

눈이 따갑다.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건, 분명 매캐한 연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이제 자신이 루드비히 가문을 보좌하는 집사였다.

등에 짊어진 무게를 느끼며 알베르트는 눈가를 닦았다.

「알.」

「네, 아가씨.」

저택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손에는 하얀 단도가 들려 있었다.

주인님이 딸에게 남겨준 유품. 무가에서 태어났음에도 검술에 재능이 없는 아가씨에게는 큰 무기가 될 수 없는 단도. 그녀의 여린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찬란한 금빛의 머리카락을 쥔 아가씨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자랑하는 금빛이 떨어졌다.

「나는, 마족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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