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본신(2) (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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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신(2)

유피와 함께 알베르트는 대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는 화조인(火鳥人)과 까마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주먹을 섞고 있었다.

화조인의 움직임을 따라 화마가 달렸다. 그 손에 장착하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권갑(卷甲)이다. 권갑 위로 불길이 타올랐다. 빈 망토를 두드리는 것처럼 주먹이 까마귀를 향했다. 푸른 권강이 지나간 자리는 끝없이 작열했다. 까마귀의 회피는 의미가 없다. 불길은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날아오른 까마귀를 따라붙은 불은 끝내 그의 몸을 태워버렸다.

재가 되어 떨어진 망토를 바라본 화조인은 유피를 돌아보았다.

불타오르는 새의 머리를 본 순간 알베르트는 반사적으로 유피의 앞에 나섰다. 허리춤의 검을 뽑는다. 볼품없게도, 검집조차 없는 검은 부러져 있었다.

알베르트의 어깨로 유피의 손이 올라왔다.

“그만둬, 알. 적이 아니야.”

아는 사이라는 듯, 유피는 거침없이 화조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그녀를 본 화조인은 손을 내렸다. 불길이 사그라진다. 타오르던 새의 머리가 익숙한 얼굴로 변했다. 어깨로 떨어지는 불씨를 털어낸 남자는 시더 아르테니아였다.

“무사했군.”

“오빠야말로. 흑살귀는 여전하구나.”

방금 그 모습은 뭐였을까?

알베르트는 시더와 유피에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네. 알은 처음 보는 거구나. 방금 그 모습이 우리 마족의 본신이라는 거야.”

“본신?”

“우리가 쓰는 힘의 원천. 저주의 뿌리와도 같아. 마족이라면 누구나 다루는 힘이야. 단지 그 힘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순수 혈통일수록 저주는 짙어지고, 그 힘이 강해져. 반대로 피가 옅을수록 본신의 힘은 약해지지. 우리는 냄새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해.”

“처음 들어보는 말이야.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마족들은 한 번도 이런 힘을 다룬 적이 없어.”

아니, 그렇지 않다.

알베르트는 라베린 도시에서 정보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악마의 힘을 다룬다. 신성력이 통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그 소문의 진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건 너희가 모를 뿐이야. 우리 마족들은 언제나 그 힘을 사용했어. 그저 이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거지. 본신을 투영할 수 없으니 우스운 꼴이 될 뿐이라는 거야.”

짚이는 바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피부 아래로 골격이 드러나던 마족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그 모습이···?”

“만약 마족이 힘을 사용한 장소가 공간이 불안정한 우리 고향이나, 마계에 가까운 이 중원이었다면 우리도 본신을 드러냈을 거야. 여기만큼 완벽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해도 말이야. 본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조건은 꽤나 까다로워. 특히나 신석이 보호하는 제국 내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신석에 대항할 수 있는 신석을 갖고 있으면 모를까.”

“제국은 이 사실을?”

“수뇌부는 알고 있다. 감추고 있을 뿐이다.”

대답한 것은 시더였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마족을 사악한 존재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마족이 본신을 드러내면 마물처럼 변한다. 공표하면 여론몰이에 도움이 될 사실을 왜 제국이 숨기는 거죠?”

“그건 내게 할 질문이 아니군. 너희 황제에게 물어봐라. 혹은 성녀도 괜찮겠군.”

물어볼 사람이 잘못됐다. 시더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나는 해 줄 말이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에서 해답을 바라는 건 무리다.

[무언가 있군요, 마스터.]

‘제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족의 영토를 침략한 적이 없었지. 그건 단순히 전력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꺼림칙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으슬으슬한 기분이 든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다. 뒷맛이 썼다.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그보다 지금은···.”

시더는 알베르트와 유피에르의 뒤를 살펴보았다.

누군가 같이 있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까지 올라온 건 둘뿐이다.

“라피엘이 안 보이는군.”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

유피에르의 반문에 시더의 얼굴이 굳었다.

“영락없이 너랑 있는 줄 알았다만.”

“라피엘은 오빠의 가신이야.”

“알고 있다.”

우선순위가 다르다. 그녀의 대답에 시더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까마귀가 지키고 있던 전각이 보였다.

“전진하지. 그녀가 착실하게 산 정상으로 향했다면,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앞서나가는 시더의 뒤를 따라간다.

잿더미를 지나 전각으로 들어가자 황량한 홀이 알베르트 일행을 맞이했다. 장식물이라고 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텅 빈 전각 안은 흙먼지만이 가득했다.

유피에르는 손가락을 튕겼다. 홀 바닥에서 은빛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알베르트는 쏟아지는 빛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알베르트의 앞에 텅 빈 대산의 정경이 들어왔다.

[반대쪽이 전부 날아갔군요.]

마법이 은닉하고 있었던 걸까. 전각의 반대쪽은 휑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깥과 그대로 연결된 구조물은 모양새만 전각에 지나지 않았다.

전각의 끝. 벼랑 진 그곳에 박쥐와 같은 검은 날개를 편 여인이 있었다.

라피엘이다.

“흠,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군.”

한시름 걱정을 놓았는지, 시더의 어조가 밝아졌다.

다가오는 시더의 기척을 느낀 라피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더의 발이 멈췄다. 라피엘의 손에 무언가 낯선 것이 들려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검. 아름다운 검신이다.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한 그 검은 분명, 천마의 유산인 월아였다.

“빌어먹을.”

시더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월아도 문제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라피엘의 목을 기어 다니는 하얀 뱀이다. 위협하는 것처럼, 백사(白蛇)가 쉬쉬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째 사희가 안 보인다 했지.”

“좋지 않아, 오빠.”

유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월아를 쥔 라피엘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피부가 타버린 손은 살점이 익어가고 있었다.

“사희도 문제지만, 월아가 더 문제야. 라피엘의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사희를 떼어내지.”

“무슨 수로?”

“정면으로 붙는다.”

“월아에 닿으면 아무리 오빠라도 무사할 수 없어.”

월아에 깃든 멸마의 힘은 마족에게 치명적이다.

피가 짙지 않은 라피엘도 저 모양이다. 검 자루를 쥐었을 뿐인데 손이 벗겨지고 있다. 달의 힘이 깃들었다는 검신에 몸이 닿기라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사희가 붙은 이상, 네 술법도 소용없다.”

“알고 있어, 오빠. 우리가 어떻게 하는 건 사희가 아니야. 월아야.”

“저걸 막자는 건가? 무슨 수로?”

“월순이 있잖아.”

월아와 짝을 이루는 검집.

전승이 사실이라면 월아가 지닌 힘을 수납하는 것이 가능할 터.

“기의 흐름으로 볼 때, 월순은 반대쪽 대산에 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 전까지 라피엘이 무사할 것 같나?”

“내 술법으로 라피엘의 몸을 지켜볼게.”

“술법을 쓰는 순간 사희가 널 제거하려 들 텐데. 롯도, 블라우도 없는 지금의 네가 그녀의 접근을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느냐?”

“그건···.”

“기각이다. 그냥 내가 사희를 떼어내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시더의 앞으로 유피가 나왔다.

“안 돼. 그것만이 문제가 아냐. 월아가 정상적으로 떨어질 거로 생각해? 전승이 사실이라면 월순 없이는 그녀를 악몽에서 떼어낼 수 없어.”

월아의 악몽에 먹혀버린 이들은 영혼을 모두 빨아들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월순을 회수해 오는 게 맞았다.

“유피에르 황녀.”

“라피엘이라도 이렇게 했을 거야.”

시더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네가 해보겠느냐? 아무리 월아라고 해도, 너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

“그럴 생각이 없다면 날 말리는 건 그만둬라.”

“오빠.”

유피에르의 시선이 흔들렸다. 시더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유피에르는 혼혈 마족이라고 했었죠. 월아에 깃든 힘이 사악함을 몰아낸다고 했으나, 순혈 마족이 아닌, 인간의 피가 섞인 그녀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유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긍심 높은 그녀라면 결국 자기를 희생하는 방법을 택하리라. 망설이는 그녀를 본 알베르트가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마스터?]

몸 상태는 좋지 않다. 그러나 라피엘의 몸을 잠시 붙잡아두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알베르트, 말은 고맙지만 네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을 끄는 것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더는 고개를 저었다.

“사희와 싸운다는 건 일반적인 사투와는 다르다. 사희와 맞닿는다면 너는 그녀의 정신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 공간에서 상처를 입는다면, 그 상처는 현실로 돌아온다. 만약 네가 거기서 죽는다면 현실의 네가 죽는다는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라피엘에게 들었습니다.”

무덤에 들어서기 전, 라피엘이 알려준 이야기다.

어째서 사희를 피해야 하는지. 그녀가 가진 위험성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지. 알베르트. 사희가 만든 세계에는 타인이 간섭할 수 없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너의 혼과 그녀의 혼이 싸울 뿐이다.”

“그럼 오히려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제 몸 상태와는 상관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사희는 오랜 세월 망자로 지낸 다른 무덤 수호자들과는 격이 다르다. 천마를 따르던 전성기 시절의 그녀와 힘을 겨루게 된다. 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던 무인이다. 우리도 본신의 힘을 쓰지 않으면 쉽게 승리를 점할 수 없는데, 네 힘으로는···.”

“그렇지도 않아.”

시더의 말을 자른 건 유피였다.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알베르트 란.”

초조함을 느끼는 건지, 그녀는 윗입술을 혀로 핥았다.

“네가 시간을 끈다면 내가 월아로부터 최대한 라피엘의 몸을 보호할게. 할 수 있겠어?”

“물어볼 필요 없어, 유피.”

아우성 거리는 천칭의 항의를 무시한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명령해. 나는 네 집사니까.”

“······.”

알베르트의 대답에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순을 부탁해, 오빠. 라피엘은 우리가 책임지고 지킬게.”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겠느냐?”

“위나 바토리의 이름을 걸고.”

“······.”

그 이름을 들은 시더는 흠,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시선이 흔들린다. 고민을 얼굴에 드러낸 그는 곧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부러진 검을 매만지는 알베르트를 향해 시더는 입을 열었다.

“알베르트 란.”

“황자님.”

“라피엘을 부탁한다.”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굳게 쥔 주먹을 내밀었다. 시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권갑을 벗고 자신의 주먹을 알베르트의 주먹과 맞댔다.

“뒤는 맡기지.”

시더의 머리카락이 타오른다. 한 마리의 화조로 변신한 그는 하늘로 비상했다.

무너진 전각을 뒤로 한 시더는 반대쪽 대산으로 향했다. 불씨를 흩날린 시더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피는 말했다.

“월아의 기운은 너에게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 조심해.”

“나는 인간이잖아. 괜찮아, 유피.”

사악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월아의 힘이라면, 알베르트에게는 그저 평범한 명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알. 그래, 너는 인간이었지.”

유피에르는 뭔가 곱씹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손을 뻗었다. 검은 공간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붉은 스태프가 딸려 나왔다. 그녀의 반신과도 같은 세피로스의 지팡이다.

“나는 라피엘의 몸을 먼저 보호할 거야. 알은 사희가 내 쪽으로 오지 않게 시간만 벌어주면 돼. 아마 사희와 접촉하는 순간 너는 그녀의 정신세계로 빨려 들어갈 거야.”

“조심해야 할 건?”

“어떤 악몽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희와 마주하면 도망쳐. 최대한 방어에 전념해. 오빠는 그런 식으로 버텼으니까.”

“내가 이기고 온다는 생각은 없나 보네?”

알베르트의 당돌한 대답에 유피는 헛웃음을 지었다.

“살만한가 보네, 집사?”

“물론이죠, 아가씨.”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바닥과 맞닿았다.

은빛 마법진이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라피엘이 둘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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