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본신(1) (38/200)

 # 38

본신(1)

유피에르 바토리는 드물게도 화가 나 있었다.

산문을 앞에 두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허리가 굽은 망자다. 망태기와 같은 누더기를 뒤집어쓴 망자는 손에 자신의 뼈를 들고 있었다. 유피에르는 손을 휘저었다. 마나가 술식을 공정하고 기적이 발현된다. 떨어지는 화염구를 본 망자의 손이 휘둘러졌다. 검은 안개가 흩뿌려진다. 안개와 맞닿은 화염구는 맥없이 사라졌다.

귀찮게 됐다.

유피에르는 혀를 찼다. 상성이 좋지 않다. 암독제를 상대로는 술법을 쓸 수 없다. 평소에는 적당히 대적하다가 사라지는 영감이, 오늘따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추하게 달라붙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늙은이.”

불만을 입 밖으로 내뱉은 유피에르는 마나를 갈무리했다.

소단위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위 마법을 쓰는 것도 곤란하다. 힘 조절이 되면 다행이겠지만, 잘못했다가는 불안정한 공간을 망가뜨릴지도 몰랐다. 이 공간에 있는 것이 그녀 혼자라면 모를까, 동행이 있는 이상 힘 조절은 필요했다.

무슨 벌칙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음에도 그 수를 쓸 수 없다는 답답함. 이것도 저것도 전부 바보 같은 오빠 때문이다. 월아를 회수하고 나면 진심을 담아서 괴롭혀줘야겠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이 기분도 조금은 개운해질 것 같다.

“롯이라도 데려올 걸 그랬네.”

수족과도 같은 그녀의 사역마는 이곳에 없다. 무덤 수호자와 손을 섞는 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암독제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가져온 인형도 몇 되지 않는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전투용으로 만든 인형은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다.

별수 없나.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다.

유피에르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긴 눈꺼풀이 내려앉고,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안구가 변했다. 마치 용의 그것과도 비슷한 눈이 된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로브 뒤로 한 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은빛으로 빛나는 날개가 세계를 수놓는다. 번들거리는 검은 꼬리가 치마 밑에서 흘러나오고, 손 위로 섬뜩한 악조(惡爪)가 투영되었다.

흡사 전설 속의 마왕과도 같은 모습이다.

이 힘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걸 발아래 둔 것 같다. 머릿속에 잔류하는 건 힘에 대한 욕망이다. 금방이라도 그 광기에 휩쓸릴 것 같다. 유피에르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날뛰는 기운을 얌전히 재운 그녀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 위로 투영된 악조가 땅과 맞닿았다. 한 번의 휘둘림, 불길이 지면을 달렸다. 강시들의 시체로 더러워진 주변 일대가 정리됐다. 땅바닥에는 3갈래의 손톱자국이 남았다. 지면에 남은 상흔에서 압도적인 힘의 편린이 엿보였다.

그녀의 첫수는 조심스러웠다.

단순히 손을 들어 아래로 내려찍었다. 허공을 가르는 손과는 달리 투영된 악조는 그대로 암독제에게 떨어졌다. 꼽추의 손에서 뼛조각이 사출됐다. 10개의 뼈 중 날아간 뼈는 5개. 악조의 손가락 중간 마디마디에 3개의 뼈가 각각 꽂혔다. 나머지 2개의 뼈는 손바닥의 안을 찔렀다. 그러나 악조는 멈추지 않는다. 속도가 늦춰졌을 뿐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뼈를 본 암독제는 재빨리 몸을 물렀다.

암독제가 있던 자리에 악조가 떨어졌다.

충격파가 지면을 강타했다. 충격에 몸을 실은 꼽추의 몸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유피에르는 멈추지 않는다. 추격을 개시한 그녀는 두 악조가 휘둘렀다.

암독제는 두 악조가 겹치는 부분을 향해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응축되는 강기의 구, 강환이 주먹 끝에서 발했다. 강환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악조가 벌어졌다. 악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꼽추의 손이 유피에르의 얼굴로 향했다. 그 위로 검은 꼬리가 떨어졌다.

꼬리를 맞고 튕겨 나간 꼽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하고 유피에르의 엉덩이에서 튀어나온 꼬리가 지면에 꽂혔다. 꼬리의 힘으로 공중에 떠오른 유피에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큰 효과가 없다. 만약 암독제의 얼굴에 살점이 붙어 있었다면, 그 입가에는 웃음이 맺혀있었을 것이다.

악조가 손짓했다. 지면을 가르고 뻗어지는 손톱을 피해 암독제가 내달렸다.

꼬리가 용수철처럼 구부러졌다. 유피에르는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소매에서 나온 인형들이 지면에 닿더니, 곧 검은빛의 늑대로 형상화됐다. 입에 날붙이를 문 늑대들은 유피에르의 손짓에 따라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악조와 늑대. 몰아치는 손톱과 발톱 사이에서 암독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진각이 울릴 때마다 대지가 요동쳤다. 몸체가 떠오른 늑대는 유피에르의 악조에 휩쓸렸다.

그 모습을 본 암독제의 턱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조소.

그 웃음을 본 유피에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악조가 춤춘다. 이전과는 그 움직임이 다르다.

악랄한 발톱은 방해되는 모든 것을 부술 기세로 휘둘러졌다.

암독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악조 사이로 들어간 그는 강기를 박아 넣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폭발이 멎지 않는다. 투영된 악조가 흔들린다. 왼손에서 달리는 통증에 유피는 눈가를 찌푸렸다. 이쪽의 공격은 암독제에 닿지도 않는 반면, 녀석의 강기는 차곡차곡 피해를 주고 있다. 아무리 본신이라고 해도 지나친 타격을 받으면 유지하기가 힘들다.

일단 악조를 회수한 유피에르의 소매에서 인형이 쏟아졌다.

인형은 크지 않다. 마치 병정 인형과도 비슷하다. 모래 먼지가 일었다. 장난감처럼 생긴 강철검을 든 열 명 남짓의 인형들이 암독제를 향해 내달렸다.

인형을 확인한 암독제의 손이 빨라졌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자신의 복부로 손을 가져간 그는 한 움큼의 내장을 쥐었다. 썩어버린 내장이 병정 인형을 향해 떨어졌다. 내장과 닿은 병정 인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날붙이도, 인형의 몸체마저 견뎌내지 못한다.

병정 인형을 제거한 암독제의 손에서 뼛조각이 튀어 올랐다.

대여섯 개 남짓의 뼈가 유피에르를 향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손을 들었다.

은빛 마법진이 떠오른다.

마법진과 맞닿은 뼈가 힘없이 떨어졌다.

“실수를 인정할게. 좋아. 나는 당신들과 같은 무인이 아니야.”

본신을 드러낸 것은 실수였다. 육탄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유피에르는 악조를 거두어들였다. 검은 꼬리를 치마 속으로 회수한 그녀의 두 날개가 펄럭였다. 날아오른다. 암독제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 손에서 펼쳐진 강환이 유피에르가 있던 장소에 떨어졌다.

비상한 유피에르는 지면을 향해 작은 관을 던졌다.

“일할 시간이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관 속에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인형은 점차 크기를 불리더니, 10척이 넘는 거인이 되었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검은 거인은 뛰어오르는 암독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쿵, 하고 강기에 맞닿은 주먹이 부서졌다. 지하여장군이 기우뚱 흔들렸다. 그러나 넘어가지 않는다. 마치 기사처럼 유피에르를 보호하듯이 선 그는 작은 적대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오너라, 한 줄기의 빛이여. 지고한 왕관이 그대를 부르니라.」

유피에르의 발치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에 세피로스의 지팡이는 없다. 시더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 지팡이를 꺼낼 순 없었다. 순전히 자신의 기량만으로 암독제를 제압한다.

「뿌리에서 시작된 권능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룰지어니.」

인형은 암독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강기와 부딪칠 때마다 몸체가 떨어져 나간다.

유피에르도 알고 있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하여장군은 그저 시간 벌이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양손에서 마나의 실이 흘러나왔다. 손목을 감싼 마나는 작은 마법진의 형상을 취했다.

「순수한 지성이 그대가 향하는 길을 안내하리라.」

차륜과도 같이 손목의 마법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선율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유피에르의 두 손에서 나온 마나는 그녀의 앞에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떠오른 마법진은 총 4개. 몰아치는 폭풍을 멈출 방법은 없다.

「베일을 벗은 지혜가 영광의 길을 안내하니. 그 의지가 이곳에 나타나리라.」

지하여장군의 몸이 넘어간다. 암독제는 반파된 인형을 뛰어넘었다.

강기를 머금은 두 손이 유피에르를 향했다.

그러나 늦었다.

그의 흉수가 뻗어지는 것보다 먼저, 유피에르의 손끝이 암독제를 향했다.

「천홍뇌편(天紅雷鞭).」

빛이 내달렸다.

*&*

검붉은 번개가 흐린 하늘을 찢었다.

시계를 가득 채우는 것은 번뜩이는 빛이다. 내달리는 빛줄기를 굉음이 뒤따랐다. 지축이 요동치고 대산이 흔들렸다. 일순간 멀어버린 알베르트의 청각에는 이명만이 달렸다. 떨어진 것은 무엇인가. 한 줄기의 뇌견(雷犬)이다. 천상에서 추락한 검붉은 개는 세계를 조각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두 눈으로 목도했음에도 머릿속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뇌견은 누구를 향해 떨어졌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노도와 같은 저 번개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둠을 몰아낸 번개가 소리를 앗아가고, 공기를 태웠다.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멀어진 오감이 현기증을 불러왔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집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검붉은 뇌견은 멈추지 않는다. 지면으로 쇄도하는 빛줄기는 끝이 없다.

땅을 부수고,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공복감을 달래듯이 하늘을 가르는 벼락은 연이어서 지면을 강타했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앙이다.

신벌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지축을 흔드는 번개가 얼마나 떨어졌을까.

하늘을 찢던 울부짖음이 끝나고 대산에 정적이 찾아왔다.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신은 비로소 노기를 거두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보기 흉한 모습이네, 알.”

유피의 두 발이 지면에 닿자, 은빛 날개가 별 부스러기처럼 흩어졌다.

아직 낙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점이 흐릿하다. 그저 번뜩이는 빛만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혹시 죽은 건 아니지?”

“죽었으면 아마 유피 때문이라고 생각해.”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멀쩡하구나.”

뭔가 개운한 표정을 지은 유피는 알베르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이 알베르트의 몸을 덮었다. 어머니의 손길에 닿은 것처럼, 포근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상처가 아물고 천천히 통증이 사라졌다. 신기한 힘이다. 루미에르 교의 신성력을 보는 기분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마족인 유피는 다프네 여신님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예상외로 상처는 깊었던 모양이다. 유피의 손은 시간이 흘러도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무덤 수호자랑 만난 모양이구나. 상대는 누구였어? 흑살귀?”

“아니, 녹림왕이었어.”

“이겼어?”

“당연한 걸 묻네.”

졌다면 이곳에 있지 않으리라.

알베르트의 대답에 유피는 짧게 웃었다.

“그러네. 뭐, 그리 강하진 않았을 거야. 그들도 여기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거든. 이곳에서 사라진다 한들 어차피 어긋난 순환은 계속되니까. 또 다른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야. 그 족쇄를 끊으려면 순환의 고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뿐이야.”

“순환의 고리라면, 유피가 아침마다 하는 의식을 말하는 거지?”

“그래. 원래는 일일이 한을 풀어주는 게 맞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니까.”

치료가 끝난 것일까, 유피는 알베르트로부터 손을 거두었다.

그 뒤를 따라 알베르트도 몸을 일으켰다.

“일단 급한 대로 외상은 치료했어. 내상은 별로 달래지 못했으니까 무리는 하지 마. 특히 내공은 조심하고.”

“알았어. 고마워, 유피.”

통증은 없지만, 몸의 피로는 그대로다.

만약 녹림왕과 같은 무덤 수호자와 한 번 더 교전을 치른다고 하면, 알베르트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럼 바보 오빠와 합류하러 갈까?”

알베르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유피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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