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친구 (37/200)

 # 37

친구

알베르트의 붉은 머리카락이 타올랐다.

피가 말라붙은 손을 든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작열하는 머리카락은 뜨겁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정말로 이게 자신의 몸인 걸까? 꿈속을 걷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대산을 탐색하기 위해 내공을 흘려보냈다.

거미줄처럼 퍼져나간 내공이 알베르트의 감각을 연장했다. 팽창한 감각이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 일대에 강시가 남아 있는가. 혹 보지 못한 구조물이 있는가. 유피에르나 시더, 라피엘의 흔적은 찾을 수 있는가. 근처에서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이곳에 있는 건 알베르트 혼자다.

집결지는 산의 정상이다. 그곳에 가면 모두 모여있을지도 모른다.

내공을 회수한다.

그러나 녀석은 주인의 명령을 거절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내공이 뻗어 나간다. 산맥을 타고 다른 산봉우리에 도착한 녀석은 탐색을 이어갔다. 배회하는 강시와 길을 막는 독소. 불타오르는 새의 머리를 한 마족이 권갑을 두른 채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뱀이 춤을 춘다. 피막과 같은 날개를 드러낸 여인을 향해 은빛의 검이 쇄도했다. 강시들을 휩쓸고 꼽추 같은 망자와 대치하는 그녀가 보였다.

그만!

비명과도 같은 알베르트의 의지에 내공이 돌아왔다. 필요 이상으로 연장된 감각이 머릿속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눈앞이 핑글핑글 돈다.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10개가 넘는 풍경을 동시에 보는 기분이다.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량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은 알베르트는 우측에 보이는 대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피가 있던 산이다. 일단 그녀와 합류하자. 자신에게 일어난 이 현상을 그녀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에 이상을 느낀 건 그때였다. 그저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생각한 것처럼 발이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다리에 깃든 힘이 마땅치 않다. 몇 번이나 자리에서 넘어졌다. 구르고, 또 구르고 입안으로 흙이 비좁고 들어왔다.

알베르트는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아직 변화한 몸에 적응이 안 된 걸까?

그것도 이상하다. 그럼 녹림왕과 싸울 때 이상 징후가 나타났어야 했다.

그때는 귀신같이 흐르던 몸이, 지금은 고장 난 장난감 같다.

어딘가 부러진 것일까. 혹은 상처가 깊은 걸까.

실제로 알베르트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지혈된 것처럼, 흘러나오는 피는 많지 않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통증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 이상은 없다. 하지만 두통은 멀어지지 않는다. 현기증마저 이는 시점에서야 알베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독소의 늪이 펼쳐져 있었다.

‘이거 혹시 미궁에 있던 독기 아닌가?’

알베르트는 무심코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다른 때라면 돌아왔을 천칭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를 찾던 알베르트는, 뒤늦게 자신이 천칭의 의지를 억눌렀다는 걸 깨달았다.

내공을 거둔다. 미약하게 느껴지던 천칭의 의지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

[······.]

‘음, 미안하네.’

[······.]

알베르트가 천칭의 자율 의지를 억누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리 그가 귀찮더라도, 알베르트는 항상 천칭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걱정하는 천칭의 경고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그에게 강제로 족쇄를 채웠다. 돌아오는 답은 밝지 않겠지.

[마스터도 똑같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천칭이 말문을 열었다.

[결국, 필요할 때만 절 찾죠. 자신의 의지에 반한다고 생각되면 망설임 없이 잘라냅니다.]

차가운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할 말이 없었다.

부정의 대답은 낼 수 없었다.

실제로 그리 했으니까.

천칭의 어조에는 낮게 깔린 감정이 어려있었다.

노기를 품은 건 아니다. 천칭과 함께한 6년. 그의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실망하고 있었다. 믿었던 마스터에게 배신당했다는 감정이 그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네. 용서해주게, 내가 잘못했네.’

[마스터가 보기에도 제가 도구로 보입니까? 전 마스터였던 아리시엘 루드비히처럼, 천칭이라는 제 의지가 물건이라고 생각합니까?]

‘······.’

아가씨의 이름이 언급됐다.

알베르트가 그녀를 떠올릴 때 닿는 감정과 천칭이 그녀를 떠올릴 때 닿는 감정은 명백히 다르다. 적의를 갖고 있다고 하는 편이 좋다. 알베르트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지인들을 대하던 것과는 다르다. 아가씨는 천칭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마스터가 말했죠. 눈앞에서 감정을 드러내거나, 직설적인 화법은 피하라고 말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마스터.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해야만 간신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녀를 자극하는 단어를 꺼내지 않으면, 전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바깥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감옥에 갇힌 채 이용당하는 느낌.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마스터는 아십니까?]

그것이 천칭의 무례한 말 뒤에 숨겨진 사정이었다.

듣기 거북하고, 천박한 말을 끊임없이 뱉어냈던 것은. 사실 자신도 세상을 보고 싶다고, 바깥과 엮이고 싶다는 천칭의 비명이었다.

[성좌라는 건 말입니다. 관측되었을 때야 비로소 의지를 갖고 활성화됩니다. 인간의 시점에서 말하자면 막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것이 있다면 현세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관측되어서 내려온 저는 두 손을 묶이고, 두 발을 묶이고, 두 눈이 막힌 채 마스터가 말하는 아가씨에게 뿌리까지 이용당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말입니다. 노예로 부림을 당하는 것도 적당히죠. 그 감옥에서 간신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마스터를 떠넘긴다고요? 그 불합리가 어떤 건지 아시겠습니까?]

감정의 골이 깊어질수록 그의 말은 더 날카로워졌고, 이는 알베르트가 마스터가 된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전 마스터였던 아리시엘 루드비히로부터 받은 대우. 천칭이 마스터를 좋아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사람은 아가씨뿐인데, 그 아가씨는 천칭의 말에서 귀를 닫았던 것이다. 목소리를 낼 방법은 없다. 그저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무기력하게 벽을 바라볼 뿐. 그러나 힘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이용당했다.

[성좌라는 자리에 얽매이지만 않았다면 저도…!]

목소리가 격해지던 천칭은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억제된 것처럼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차분한 어조였다.

[물건은 물건으로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 마스터의 아가씨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입니다. 마스터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저 물건.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흘러나오는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물건이라면, 그렇겠지.’

[······.]

천칭. 아가씨가 다루던 고대 마법.

그는 자신이 위대한 성좌라고 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베르트는 알지 못한다. 자긍심으로 뭉쳐 있음에도, 알베르트가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가 천칭이라는 입버릇을 가지고 있는 건, 그것밖에 기댈 것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덧없고도 불쌍한 존재다.

독기가 완전히 빠진 천칭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물건에 지나지 않는 저는 분에 넘치는 의지를 가져버린 모양이군요.]

알베르트는 천칭이 가엾게 느껴졌다.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걸 통해서 간신히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천칭이다. 이 천칭이라는 아이는 타인과 평범하게 관계를 쌓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천칭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고, 정말로 같은 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알베르트의 곁을 지켰다.

거친 말과는 달리 알베르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때로는 직접적인 위기에서 그 몸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의 말처럼, 천칭은 알베르트를 증오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만약, 천칭이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알베르트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

천칭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

결정적인 물음은 회피하고, 밝히지 않는 비밀이 너무나도 많다.

때로는 그것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숨기고 있는 걸 끝까지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 지금 자신과 천칭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건….

‘자네는 물건이 아닐세, 천칭. 내게는 둘도 없는 친구라네.’

[······.]

친구.

알베르트에게 친구 같은 건 없었다. 어린 시절 슬럼가를 전전했던 그에게는 적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친구라는 게 있다면 이런 관계이지 않을까 싶었다. 루드비히 가문의 사용인들은 가족이지, 친구가 아니다. 가문을 모시는 다른 집사들과는 경쟁 관계일뿐.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때로는 다투면서, 때로는 손을 걸치면서, 땀과 흙으로 범벅이 돼도 결국에는 웃으면서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상대. 자신과 천칭은 그런 관계가 아닐까?

‘미안하네.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해버렸구먼.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내 약속하네.’

천칭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그를 친구로 여기고 싶었다.

자신과 함께 이전 세계를 기억하는 유일한 친구.

만약 그에게 육체가 있었다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알베르트의 사과에 천칭은 침묵했다.

조용히, 그저 조용히 감정을 갈무리한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친구, 친구라···. 그렇군요. 마스터는 친구의 입을 막고, 포박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군요.]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전 아리시엘 루드비히와는 다릅니다. 마스터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천칭. 저는 세상을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 천칭이니까요.]

자부심 넘치는 천칭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웃음을 지었다.

자신만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는 게 아니겠지.

‘고맙네. 앞으로도 함께 해줄 건가, 친구여?’

[인연이 끝나는 순간은 아직 멀었습니다.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절 마스터에게 맡긴 이유를 알 때까지는 싫다고 해도 따라갈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죠.]

든든한 대답을 들은 알베르트는 몸을 숙였다.

독기가 올라오는 늪을 살펴본다. 직경이 꽤 넓지만,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성 지하에 있던 독기와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이번에도 전부 치워버릴 생각입니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지금의 나라면 등평도수(登萍渡水)도 펼쳐낼 수 있을 걸세.’

[그 몸으로 말입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알베르트가 반문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마스터.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 겁니까?]

‘조금 현기증이 있을 뿐이지, 괜찮네.’

간간이 흘러나오던 피도 이제는 멈춰 있었다.

이상한 것은 없다. 알베르트의 몸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를 뿐이다. 이건 내공이 갖는 특이성 때문이겠지.

[일단 그 상태부터 해제하시죠, 마스터.]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둔 기분.

되는대로 내뱉는다면, 설령 사부님이 앞에 있더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시죠, 알게 될 겁니다.]

‘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내공을 달랬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한다. 명검과도 같던 내공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끓어오르던 몸 안의 기운이 식고, 타오르던 머리카락이 다시 검붉은 색으로 돌아왔다. 운기조식을 마친 알베르트는 눈을 떴다.

‘자, 이제 뭐가 달라졌는지···.’

그 직후, 알베르트의 세계가 반전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알베르트는 두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입 앞에는 차디찬 바닥만이 있었다. 손, 팔, 다리, 발. 어느 것 하나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저 두 눈을 있는 힘껏 깜박이는 것이 알베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픔이 엄습했다.

“우그그그으!?”

[제가 뭐랬습니까, 마스터. 이제 좀 정신이 드십니까?]

입안으로 들어오는 흙은 문제가 아니다.

엄청난 격통이 쏟아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성의 지하도 그랬지만, 이곳은 특별한 공간인 것 같군요. 마족의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봉인에서 풀려난 것처럼 말이죠. 시공간이 부서진 장소. 마계에 가까워지는 공간. 마족의 고향. 흠.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중원은 그들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입니다. 그럼 마스터의 힘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내공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끄, 끄으···.”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는다. 통증이 너무 심해 그 목소리조차 흐려지고 있었다.

[이것이 비단 사부님이 가르쳐준 무공 때문일까요? 천마의 무공을 배운 마스터의 몸에 무언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까요. 그리고 그 힘은 중원에서 강해진 다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요.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마스터?]

“닥치고 통증이나 막아주게!”

[아···.]

몸을 배배 꼬던 알베르트는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천칭의 도움으로 통증에서 벗어난 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게거품처럼 쏟아지던 침이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치 폐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넋이 나간 알베르트의 모습에 천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마스터.]

‘······.’

[혹시 아까 전의 일로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전 고귀한 성좌, 천칭이니까요. 진짜입니다. 그런 거로 삐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

[마스터?]

‘······.’

천천히 알베르트의 몸이 넘어갔다. 등을 바닥에 붙인 알베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담천(曇天)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깨져 나간 사고를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그가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하늘을 향해 한 여인이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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