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꿈의 끝 (36/200)

 # 36

꿈의 끝

검이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알베르트는 그 차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사부가 그에게 말했던 기억은 있다. 도는 어떤 것이고, 검은 어떤 것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알베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도라는 무기가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창천검법 2장

공절

같은 베기일 텐데, 밀려나는 것은 이쪽이다.

도와 부딪친 검이 비명을 지른다. 깎여나가는 검강을 메꾼 알베르트는 묵묵히 검을 뻗었다.

창천검법 5장

쇄천

소용없다.

도는 멈추지 않는다. 파괴력만으로 따지면 알베르트의 초식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간신히 튕겨낸 도강이 바닥에 떨어졌다. 또 하나의 구덩이가 계단에 새겨졌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강시들조차 강기에 휩쓸렸다. 그 기세는 누군가 말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강기를 부딪치고 있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은 알베르트의 검강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 싸움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망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는 알베르트의 머리를 노렸다. 피해낸다. 팟, 하고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열상과 같은 통증이 달렸다. 몸이 내지르는 비명을 외면한다. 틈을 발견했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다. 녀석의 가슴이 비어있었다. 검을 그대로 찔러넣는다. 곰 가죽과 부딪친 검이 튕겨졌다. 실망하지 않는다. 회수한 검으로 도강을 흘려 받는다.

충격을 완화할 수 없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아니, 이미 부러졌는지도 모른다. 검은 어떻게 들고 있는 거지?

극심한 통증에 사고가 흐려졌다.

발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근접전은 착실하게 알베르트의 체력을 앗아갔다. 물귀신이 달라붙은 것만 같다. 도에 실린 중압감은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독을 뿌리고 있었다. 도를 든 상대와는 어떻게 싸워야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부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알베르트를 덮쳤다.

녀석이 휘두르는 도의 압력만으로도 몸이 깎여나간다.

닿기만 해도 치명상에 이를 독수(毒手)는 계속해서 닥쳐온다. 멈추지 않는다. 틈틈이 찔러 넣는 검은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처음에는 방어를 취하던 녀석의 도는, 더 이상 알베르트의 검을 막지 않았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 판단은 옳다. 알베르트의 검은 녀석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호신강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망자가 두른 외기의 일종일까. 흐려진 검강은 녀석의 육체를 베지 못했다.

알베르트의 이 빠진 검강은 검기만도 못했다.

곰 가죽은 고사하고, 망자의 신체에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이미 승패는 결정 났다.

그러나 망자는 끝을 고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도를 휘두른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다. 검과 도를 섞는 이 순간이 모든 것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도강도 처음과는 다르다. 약해진 기세는 알베르트와 수십 합을 섞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포기하기는 이르다.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쥐어짠다면 한 번쯤은, 검강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기다린다. 시더와의 비무에서 그랬듯이, 결정적인 순간을 노린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

태산과도 같은 기세로 베는 초식이 다가온다.

몇 번이나 봤던 그의 장기다. 손을 다 잡은 망자가 흘러가듯이 도를 들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다.

알베르트의 검이 일순간 강한 빛을 뿜어냈다. 순식간에 공정을 마친 검사가 검강의 형태를 갖췄다.

벨 수 있다. 망자의 도가 떨어지는 속도는 빠르다. 하지만 이 검격을 따라올 정도로 빠르진 않았다.

천마신공 오의

천마혈참

뿌려졌다.

한 줄기의 빛이 망자의 도를 베었다.

캉!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휘리릭, 하고 부러진 검 끝이 지면에 박혔다.

검과 함께 날아간 알베르트는 등부터 떨어졌다. 일순간 숨이 멈추고, 시야가 점멸한다. 그래도 의식을 잃는 일은 없다. 내공과 수련으로 단련된 그 몸은 기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실패했다.

사부님의 독문 무공이, 망자의 도에 졌다.

믿을 수 없다.

부인하듯이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더 할 수 있다. 멈추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전의와는 달리 알베르트의 팔은 올라가지 않았다. 어째서? 천천히 고개를 내려보니, 무릎을 꿇은 다리가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다. 내공을 운용한다. 신체가 무리라면 억지로 움직이자. 허나, 내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비었다. 몸 안을 달리던 내공은 이제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몸은 알베르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멈춰버린 알베르트를 향해 망자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큼 교전을 겪었음에도, 녀석의 도에서는 서슬 퍼런 도강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 흔들리던 도강이 아니다.

선명한 색채. 선명한 불길. 완벽에 가까운 도강을 본 알베르트는 비로소 깨달았다.

망자는 힘이 빠진 게 아니다.

힘이 빠진 그와 좀 더 놀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도강을 약하게 만들면서까지.

타오르던 전의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압도적인 역량 차이가 눈앞에 있었다.

진정한 강자는 손을 드는 일이 없다.

그 압도적인 힘을 보고 나면 감히 반항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녹림왕.

천마의 뒤를 따랐다는 무덤 수호자 중 한 명.

신화의 시대를 살았다는 흑도인 중에서도 최강자라 불렀던 4인방 중 한 명이다.

알베르트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다.

기도가 다르다.

이루어낸 경지가 다르다.

쌓아 올린 무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망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그가 주군으로 섬겼던 천마 정도밖에 없겠지.

몸이 떨려온다. 오한이 드는 것도 아닌데 팔과 다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두려움일까. 알베르트는 이제 곧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망연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기다릴 뿐이다.

망자는 점차 가까워져 온다.

이제 알베르트의 앞까지 그의 걸음은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마치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보는 것 같다. 팔은 쉬지 않고 떨리고 있다. 떨림이 있다는 건, 움직일 수 있다는 걸까. 검을 드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을 잡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 같은 패배를 반복할 뿐이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약속한 것처럼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그런가. 그랬던 건가.

다가오는 망자를 보는 알베르트의 입가가 맥없이 풀어졌다.

결국,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아가씨를 구하는 것도.

전쟁을 막는 것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도.

이번 생애에서도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었다.

여기에서 쓰러지는 게 이번 생의 운명.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알베르트 라나의 종착점은 이곳이었다.

누구 하나 지키지 못한 이 늙은이가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가씨의 안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옳았다.

아가씨의 선택이 틀렸다. 이 짐은 노집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막을 내리자.

알베르트 라나가 주연이었던 무대는, 이 자리에서 끝이 난다.

마지막 관객은 자신의 앞에 있었다.

이 무대의 끝을 알리기 위해 녹림왕의 도가 높게 치솟았다. 더 볼 용무는 없다. 망자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태산은 이제 자신을 향해 떨어졌다. 천천히, 마치 사신의 낫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정말로 천천히.

천천히.

너무나도 천천히.

마치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

느릿느릿.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는 속도로.

하품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도 도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이 무대의 끝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

그래서,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방청객은 눈앞의 망자만이 아니다.

아가씨.

유피에르.

이곳에는 아직 그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하….”

그 순간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풀린 볼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터져 나올 것 같다. 피라도 한 움큼 뱉어내려고 하는 걸까.

입을 닫는 것은 무의미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하, 아하하핫!”

알베르트의 입가에서 광소가 새어 나왔다.

한 번 터진 감정의 물결은 막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밀려온 파도는 알베르트를 집어삼켰다.

절망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드리워지는 공포에 몸을 떨고 있었던 게 아니다.

알베르트는 그저, 광기 어린 흥분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왜 이제야 알아차린 걸까.

여전히 떨림이 멈추지 않은 손은,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다.

『무인의 희열이 이 앞에 있다고.』

알베르트의 눈에 붉은빛이 달렸다.

머리카락이 작열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천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붉은 머리카락이다.

텅 비어있던 전신의 내공이, 거짓말처럼 온몸의 혈도를 달리고 있었다.

성의 지하에서 느꼈던 내공과도 비슷하다. 당시의 내공은 바늘처럼 변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얇고 날카로운 검에 가깝다. 그러나 그 검은 혈도를 상처 입히는 일 없이 알베르트의 몸을 채우고 있었다.

망자는 멈추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머리가 타오르는 붉은빛으로 변했을 뿐.

태산과 같은 일격이 알베르트의 머리로 떨어졌다.

쾅!

손에 닿는 감각은 없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알베르트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반쯤 부러진 검을 바라보는 그는 망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망자는 포효했다. 쇄도하는 도는 좀 더 속도가 붙어있었다.

알베르트는 몸을 틀었다.

추격자는 멈추지 않는다.

도강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태산을 닮은 그 일격이, 지금은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녹림왕의 흉수는 위협적이다. 그러나 닿지 않는 이빨은 아무 소용이 없다.

몇 번을 반복해도 무의미하다. 이제 그의 도가 알베르트에게 닿는 일은 없다.

초조함을 느끼는 걸까. 망자는 손을 뻗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얼굴 옆으로 그 주먹이 지나갔다.

도가 모든 것을 부순다. 발을 빼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있었다.

돌진이 우습다. 허리를 트니 알아서 달려나간다.

그 무방비한 등을 바라보고 있잖니, 입가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아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즐겁다. 눈앞에서 오가는 도강을 보며 알베르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천칭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천성 무인이라는 말.

생각해보면 이 몸은 언제나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초식을 완성할 때마다, 생사결의 순간을 거칠 때마다.

중독될 것 같은 달콤함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무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부님은 말했다.

『무의 길을 걷는 자가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사부님.

자고로 무인이란, 이 생사결의 순간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법.

자신은 이제 평범한 집사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녹림왕의 기도가 달라졌다. 망자와도 같던 그 몸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다.

유피가 행했던 의식을 보는 것 같다. 너덜거리는 살점밖에 없던 골격에 장기와 근육이 생겨났다.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을 취한 그의 도강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신화의 한 장면이 재현된다.

일렁이는 강기를 춤추듯이 피하는 알베르트와 가죽을 눌러 쓴 녹림왕의 추격.

도강이 공기를 태우고 모든 것을 부수고자 속도를 올린다.

마치 알베르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속도에 맞춰 알베르트의 몸 또한 빨라졌다.

푸른 도강이 알베르트의 몸에 맞닿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도강이 주변을 둘러쌓고 있던 강시를 베어 넘기고, 모든 걸 집어삼켰다.

그래도 닿지 않아. 그런 식으로는 닿지 않는다.

쓰러뜨릴 수 없었던 강자가 이제는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보였다.

녀석은 앞만 보고 내달리는 맹수다.

무심코 장난을 치고 싶어질 정도다.

날뛰는 맹수를 달래듯이 알베르트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손가락과 맞닿은 녹림왕의 두개골이 터져나갔다. 뇌가 반쯤 날아가고, 수액이 흩날렸다.

거구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도 곰은 쓰러지지 않는다.

날아간 두개골과 내용물이 수복된다.

도를 크게 휘두른 녹림왕은 몸을 숙이고 두 다리를 벌렸다. 양손으로 도를 쥔 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상처 입은 맹수.

그 무시무시한 기세를 앞에서 보았음에도, 알베르트는 여유가 넘쳤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아직 내게 더 보여줄 것이 남아 있는가?

그러나 이제는 끝을 내야 할 순간이다.

언제까지고 이 즐거운 상황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알베르트는 마지막이 될 그의 도를 보았다.

천황도법(天皇刀法) 오의

천황일도(天皇一刀)

도가 떨어졌다.

거기에 다른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일격.

우직하게 벤다는 도의 본분을 다한다.

녹림왕 최강의 오의를 본 알베르트는 손가락을 뻗었다.

연약한 손가락이 태산을 베는 도와 맞닿았다.

쿵!

있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도강이 찬란한 빛으로 변해 부서졌다. 마치 보석이 흩날리는 것 같다. 아름다운 광경에 알베르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도강이 부서졌을지언정, 도는 아직 온전하다. 도강 아래에서 드러난 낡은 도를 녹림왕은 휘둘렀다.

부러진 알베르트의 검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아무것도 없었을 터인 검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솟아났다.

검과 부딪친 도는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도자루밖에 남지 않은 도를 든 녹림왕은 망연히 알베르트를 보았다.

알베르트의 검 끝이 그 목을 향했다.

“더 할 생각인가, 녹림왕?”

황홀감에 젖은 채 알베르트는 물었다.

「돌아오셨군요, 주군.」

녹림왕은 알베르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태산과도 같던 그를 알베르트는 내려다보았다. 위풍당당했던 그 체구가 지금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였다. 부러져버린 도는 마치 마음이 꺾인 남자를 보는 것 같았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여명은 아직도 밝아오지 않는 겁니까?」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까.

그는 천마가 아니다. 그들이 찾는 천마는 사부님이다.

알베르트의 시선에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

이제는 그가 천마다.

그들이 찾는 천마가 비록 자신은 아닐지라도, 그 이름을 이은 알베르트는 녹림왕의 물음에 대답할 책임이 있었다.

“아니, 새벽은 이제 눈앞에 있다.”

「그 새벽은, 주군이 꿈꾸던 시대입니까?」

알베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들이 말하는 시대가 무엇인지, 알베르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중원이라는 무림에서 정파와 사파가 서로의 무공을 논하며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길 바라는 화합의 시대.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후예들은 마족이라고 불리며, 마왕의 저주를 받았다.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은 쉬지 못한다. 망자가 되어 구천을 헤매고, 그 끝에는 강시가 되어 본능대로 세상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바라던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미 그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가.

알베르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아니. 내가 꿈꾸던 시대가 아니다.”

신화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그들이 쫓았던 시대도 없다.

녹림왕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그러나 알베르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자가 천마라면, 새 시대를 여는 자도 천마다.

“이 시대는, 우리가 바라는 아침이다.”

「······.」

녹림왕은 고개를 들었다.

그 두 눈에 순박한 빛이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건 알베르트의 바람일까.

「그렇군요. 이거 아쉽습니다, 주군. 못 배운 저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가능하다면, 새로운 시대를 이 두 눈에 담고 싶었습니다. 부디 이 시대를 바른길로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여명을 향해 나아가거라, 녹일두(綠一頭).”

「존명.」

녹림왕은 두 손을 모았다.

그 모습이 한 줌의 모래가 되어 흩날렸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강시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녹림왕을 시작으로 강시들은 녹아내리듯이 모래로 변했다. 바람이 분다. 쌓여있던 한 줌의 모래들은 나무를 타고 대산의 산맥으로 사라졌다. 수없이 많던 강시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붉은 머리의 알베르트와 낡은 병장기들뿐이다.

도신이 없는 도자루.

녹림왕 녹일두의 끝을 지켜본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무인이란, 이렇게나 슬픈 존재였던가.”

대산은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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