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천마의 무덤(2)
“그래서 성소라고 불렀던 거구나.”
“맞아. 그분의 기억과 무공, 기록과 자취.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들의 뿌리를 알려주는 것이 무덤에 남아있어. 그런데 저 오빠는···.”
시더는 라피엘의 허리에 손을 옮기고 있었다.
조심스레 허리로 들어간 시더의 손등을 라피엘의 손이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가 울렸다. 민망해진 시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손버릇이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유피는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달라지는 게 없는지. 철이 들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는데 말이야.”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인 거야, 유피.”
“네가 말하니까 설득력이 없는데? 넌 보이는 것과 달리 차분한 편이잖아.”
[그렇군요. 마스터는 애늙은이니까요.]
속이야 어떻든, 이제 소년에서 벗어난 알베르트다.
환골탈태를 겪으면서 청년에 가까운 외모가 되었지만, 유피에게는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거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말할 시간에 뛰어, 콥!”
“으하하핫, 역시 던전이라면 이런 재미가 있어야지!”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전방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출발했던 제이크 일행인 것 같다. 내공으로 예민해진 귀가 분주하게 달리는 발소리와 쿵쿵거리는 암석의 소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함정을 건드린 모양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스럽게 가는 편이 좋겠다. 바닥에 남은 돌 자국을 확인한 알베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같이 걷고 있었을 터인 세 사람이 뒤쪽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가 아니야, 알.”
유피는 벽을 짚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외벽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닳고 사라진 마법진의 구간에 마나의 흐름이 생겨난다. 실이 엮이는 것처럼 떠오른 마나는 마법진을 수선했다. 기하학적인 수식이 새겨진 마법진이 완성되자 벽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통로는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길이었다.
“먼저 가지.”
시더가 통로로 들어가고 그 뒤를 라피엘이 따라붙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유피의 시선을 받은 알베르트도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통로에 들어선 유피는 손을 들었다. 열렸던 벽은 천천히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남은 것은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미궁이 남았을 뿐이다.
*&*
「광구(光球)」
하얀 구가 통로에 떠올랐다. 유피가 만든 구는 좁은 통로에 은은한 불빛을 만들었다.
흐릿하게 어려있던 안개가 스르르 사라졌다. 라피엘의 뒤를 따라 알베르트는 통로를 나아갔다. 그녀의 단발머리를 지켜보던 집사는 입을 열었다.
“라피엘.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뭐가 궁금하신가요, 알베르트님.”
“시더 황자님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셨습니까?”
“황자님과 말씀입니까?”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전 삶에서는 라피엘을 본 기억이 없다. 그가 기억하는 시더는 앞만 보고 돌진하던 황소와 같은 남자였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가신들은 누구도 그런 그의 저돌적인 모습을 말리지 않았다.
가로막는 자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태워버리는 불나방.
끝없이 타오르는 불이야말로 알베르트가 기억하는 시더 아르테니아였다.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꽤 오래된 인연입니다.”
“뭐냐, 알베르트. 미안하지만, 라피엘은 내 여자다. 아무리 너라도 손을 대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황자님의 여자라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라피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라피엘과 시더 오빠는 말이지. 20년 넘게 묶인 인연이야. 오빠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던 전속 시녀가 라피엘이거든. 지저(地底) 출신의 시녀여서 말이 많았지만, 오빠가 강력하게 주장했어. 뭐, 오빠는 당시에도 저런 성격이어서 말이지. 라피엘이 고생을 많이 했어.”
꽉 막힌 시더 황자의 성격.
어쩐지 라피엘의 고생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음, 그렇지. 말하자면 라피엘과 이 몸은 불알친구다.”
“듣는 제가 다 민망하니까 그런 표현은 조금 피해주시죠, 황자님.”
“응? 실제로 불알이고 뭐고 살도 섞지 않았는가?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너만 좋다면 죽을 때까지 곁에 둘 생각이니.”
“······.”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시더의 말에 유피의 표정이 굳었다.
라피엘은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또 지나간 이야기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황자님께는 어울리는 여성분이 있을 테니, 시녀인 제게 마음을 주실 필요는 없다고요.”
“육체관계로 만족하라는 거냐. 음, 그런 건 내게 너무 어렵군.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자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돌려 말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 남자의 표정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명 시더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펴있을 테지.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게 그리 큰 욕심이냐?”
“황자님이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문제인 겁니다. “
그걸 알아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덧붙이듯이 말한 라피엘은 한숨을 쉬었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온다.
알베르트 일행 앞에 펼쳐진 것은 작은 동굴이었다. 일찍이 성의 지하에 무너진 전각이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는 부서진 객잔이 보였다. 3층으로 보이는 객잔은 반파된 상태였다. 안쪽 내용물을 그대로 드러낸 객잔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수호자가 있군.”
“무덤 수호자는 아니네.”
객잔 앞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망자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대지에 꽂아 넣은 검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앞에서 나타난 알베르트 일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스르르 일어난 망자의 몸에 갑옷과도 같은 철붙이가 다닥다닥 생겨났다.
“몸도 풀 겸, 내가 해결하지.”
말릴 틈은 없었다.
지면을 박차고 나간 시더의 신형은 일순간 망자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시더의 머리가 붉게 타올랐다. 알베르트가 본 광경은 그 장면뿐이었다. 다음 순간 시더의 주먹을 맞은 망자는 객잔을 꿰뚫었다. 튕겨 나간 망자의 몸은 멈추지 않는다. 객잔을 부수고 그 뒤로 수십 미터를 날아간 녀석은 굉음과 함께 동굴 벽에 처박혔다. 망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떠올랐던 철판에는, 시더의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알베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잘못 생각했다. 자신과 손을 섞었던 시더는 최선은커녕, 5할의 힘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식하기는. 다 부서졌으면 어쩔 뻔했어. 힘자랑 좀 적당히 해.”
“빼고 친 거다. 확실히 본신(本身)의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지는군. 정말 재밌는 곳이다, 이 무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터는 시더의 뒤를 따라 알베르트는 객잔으로 들어섰다.
망자가 뚫고 간 객잔은 반파된 상태였다. 부서진 테이블과 망가진 의자들. 식기들이 보이긴 하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의 손이 닿자 짙은 먼지가 묻어 나왔다. 방치된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객잔은 폐가에 가까웠다.
“진법이 많이 훼손되어 있어. 누군가 고의로 망쳐놓은 것 같은데.”
“사용할 수 없다는 거냐?”
“아니, 가능하기는 해. 하지만···. 조금 불안정할지도 몰라.”
유피의 손이 반투명하게 흐려졌다. 짐 속에서 챙겨왔던 촉매제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객잔의 바닥에 흩뿌려진 촉매제의 위치를 확인한 유피는 알베르트를 불렀다.
“마법진이 완성되면 안쪽에 만드라고라의 잎을 던져줘.”
“알았어, 유피.”
그녀의 손에서 잎을 받은 알베르트는 마법진의 바깥쪽으로 나왔다.
유피의 발치에서 시작된 마나는 마법진으로 흘러 들어갔다.
강한 빛이 떠올랐다. 떠오른 마법진은 이곳저곳이 훼손되어 있었다. 아예 반 토막이 지워져 있거나, 번진 선 또한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시작할게.”
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는 가슴섶을 열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 안쪽에서 작은 인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으로 나열한 인형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할 시간이야.”
시녀복 차림의 인형은 떠오른 마법진을 향해 날아갔다. 알베르트는 눈앞을 지나가는 인형을 보았다. 헤드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살점이 하나 붙지 않은 스켈레톤이었다.
[인형사라. 그렇군요. 어디 한 번 실력을 볼까요?]
지휘가 시작된다. 유피에르의 손짓에 맞춰 인형들이 마법진의 수복에 나섰다.
잿가루와 피를 옮기며 떠오른 진에 그림을 새겨 넣었다. 한쪽에서 산양의 뿔을 부러뜨린 인형들은 다시 한 번 가루를 채워 넣었다. 부족한 피는 흑염소의 심장을 짓뭉개는 거로 대신했다. 피범벅이 된 인형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법진의 수복을 마친 유피에르는 다시 가슴섶을 열었다. 그 안쪽으로 인형들이 다시 모습을 감췄다.
“저기 유피.”
“뭐야?”
“가슴 안쪽에 뭐가 있는 거야?”
“주머니가 있을 뿐이야.”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낀 탓일까, 유피는 서둘러 가슴섶을 여몄다.
“수복은 끝났어. 하지만 진법 자체가 너무 오래되어서 원하는 위치로 넘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원하는 공간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이냐?”
“아니, 그 점은 괜찮다고 보증할 수 있어. 문제는 우리 넷이 같은 공간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거야.”
“흠,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이냐?”
시더의 물음에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는 시녀를 보았다.
“라피엘. 너는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
“아뇨.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황자님.”
“너는 무인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한 몸 정도는 챙길 수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이네르를 데려올 걸 그랬군.”
살짝 입가를 찌푸린 시더는 유피를 보았다.
무슨 수가 없겠냐는 시선에 유피는 어깨를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롯과 블라우를 성에 두고 온 상태였다.
“안쪽에는 이미 망자로 변해버린 무인들로 가득할 것이다.”
“일반 망자가 아니라 강시(僵尸)에 가까운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안쪽 세계가 저희의 고향인 이상 저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본신을 드러내면 되니까요.”
“흠. 강시야 그렇다고 치지. 무덤 수호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전력을 다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자님.”
“대치 상태를 만든다. 좋다. 그럼 그 뒤에는?”
시더의 물음에 라피엘은 대답했다.
“황자님께서 구하러 오실 거라고 믿습니다.”
“······.”
시더는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어쩔 수 없군. 좋다. 같이 가자. 유피에르!”
“최대한 신경 써줄게. 하지만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어.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데려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그럼 네가 설득할 거냐?”
“설마. 우리 잘난 오빠의 가신을 내가 왜?”
“말 좀 예쁘게 해라, 망할 동생아.”
유피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흩어지게 된다면 대산 정상에서 만나자.”
“알았어, 오빠.”
시더의 말에 유피는 집사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알베르트는 만드라고라의 잎을 마법진 안으로 던졌다.
“우리 일류 집사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당연한 걸 물어보네. 오히려 나는 덜렁거리는 아가씨가 걱정인데?”
“어머,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유피의 두 손이 어우러졌다.
마법진의 발동과 동시에 일어난 강한 빛은 알베르트 일행을 집어삼켰다.
*&*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알베르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푸른 녹음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수풀과 두꺼운 거목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 사이로 트인 길은 오랫동안 이용된 적이 없는지, 정비된 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피도, 시더도, 라피엘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피의 말대로 모두 뿔뿔이 흩어진 모양이다.
[마스터 혼자입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습니다.]
‘빨리 합류하는 게 좋겠구먼.’
깨끗한 공기 탓일까, 알베르트는 어딘지 모르게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먼저 어디로 향하는 게 좋을까.
주변은 온통 나무뿐이다. 금지된 숲에 있던 오크나무와는 다르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