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천마의 무덤(1)
유피의 지시를 받은 알베르트는 이른 아침부터 촉매제를 나르고 있었다.
산양의 피, 사슴의 녹용, 돼지의 내장, 스켈레톤의 잿가루, 흑염소의 심장. 마지막으로 만드라고라의 잎을 옮기고 나니, 유피가 정원으로 내려왔다.
“좋은 아침이야, 유피.”
“알도. 촉매제는 다 옮긴 모양이네.”
유피는 반투명해진 손을 들었다.
관객은 알베르트 혼자. 집사를 앞에 둔 채 아가씨의 지휘가 시작되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리는 손짓에 따라 촉매제들이 나뉘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진 촉매제는 커다란 마법진의 형상을 취했다.
“공간 이동으로 단번에 갈 수 있는 거야?”
“아무리 나라도 직통으로 가는 건 불가능해. 금지된 숲은 공간이 불안정하거든. 일단은 방해가 약한 근처 숲으로 넘어갈 생각이야.”
“조금 걸어야 한다는 말 같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런데 그게 왜? 하고 유피가 되물었다.
“발, 춥지 않겠어?”
“···?”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유피는 언제나 그렇듯 맨발이었다. 모양 좋은 하얀 발이다. 바깥 공기와 맞닿은 그녀의 발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낀 유피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뒤로 숨겼다.
“익숙하니까 괜찮아.”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아?”
알베르트는 말꼬리를 흐렸다. 마법으로 온기를 유지하고 있으면 모를까. 보온 장비 하나 없이 맨발로 한겨울의 숲을 걷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동상에 걸릴지도 몰랐다.
“그건 그 아이 나름의 의식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알베르트.”
“황자님을 뵙습니다.”
정원에 내려온 시더를 향해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치워라. 허례허식만큼 받아주기 귀찮은 것도 없다.”
손을 내저은 시더는 촉매제로 친 마법진 바깥에 앉았다.
“라피엘은 아직인가요?”
“라피엘이라면 아저씨를 보러 갔다.”
사부님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정원에 있던 사부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다.
“어디로 떨어질 거냐?”
“13무덤 옆의 공터로 갈 생각이야.”
“거리가 좀 되는데, 괜찮겠느냐?”
“관심도 없으면서 걱정하는 척하기는.”
잿가루를 따라 산양의 피가 흐른다. 피가 그려낸 마법진은 총 3개다.
유피는 오른손을 쥐었다. 공중에 떠 있던 흑염소의 심장이 터졌다. 붉은 피가 정원을 적셨다. 흥건한 피 위로 만드라고라의 잎이 떨어졌다. 잎과 닿은 피 웅덩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라피엘도 데리고 갈 거야?”
“당연한 걸 묻는구나.”
유피는 손을 폈다. 끓어오르던 웅덩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여전히 애지중지하네.”
“가신을 챙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눈치 없는 나는 모르겠네.”
정원 너머에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라피엘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숙인 뒤, 시더에게 향했다. 까치발을 한 그녀는 시더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런가.”
말을 마친 라피엘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설명을 요구하는 유피의 시선을 받은 그는 입을 열었다.
“무덤 수호자가 전부 있을지도 모른다는군.”
“전부? 곤란하게 됐네. 암독제도 그렇지만, 사희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데···.”
“동감이다.”
“만약 조우하면 오빠가 해결해.”
“노력해보마.”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알베르트뿐인 것 같다.
경우 없지만 여기서는 일단 물어보는 편이 좋을까?
“알베르트님. 무덤 수호자라는 건 생전 천마님의 뒤를 따르던 흑도인을 가리킵니다.”
라피엘이 머뭇거리는 알베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마의? 혹시 붉은 옷을 입었던 무인들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그분의 돌격대였던 홍마대(紅魔隊)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천마님의 아래에서 검으로 벼려졌지만, 무덤 수호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완성된 검이었죠.”
흑도의 꽃, 사희.
푸른 산의 지배자, 녹림왕.
악랄한 손속으로 이름이 높았던 뇌루(腦樓), 암독제.
까마귀라고 불렸던 전설의 살수, 천살귀.
네 무인의 이름을 담은 라피엘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신화의 시대를 풍미했던 흑도인들입니다. 이제는 명호밖에 남지 않은 이들이지만, 현시대의 무인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녔다고 하죠. 당시에 신석의 축복을 받은 정파인들조차 그들과 검을 맞대는 걸 피했다고 전해집니다.”
“4명의 무인이라···.”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분명 좌호법을 지나갔던 그 특색 있던 4명의 무인을 말하는 것이다.
“녹림왕 녹일두나 까마귀인 흑살귀는 생전의 능력을 다루시는 분들이지만, 나머지 두 분은 조금 특이합니다. 암독제의 경우 원체 암기에 능하셨던 분이니, 독은 물론이고 여러가지 잡기를 다루시는데. 그중에서는 마법 행사를 막는 암기도 있습니다. 본인의 실력도 뛰어난지라 상대하기 힘든 편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사희라고 했던가?”
“그분은 저주의 영향으로 아예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흑도의 꽃. 연검을 다루는 데 능했던 사희에 대해서 라피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주를 받은 사희는 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맞닿은 이를 또 다른 세계로 끌어들입니다. 사희의 정신세계. 통칭 악몽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는 외부세계의 간섭이 통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외부와는 분리된 세계, 악몽으로 빨려 들어간 자는 영락없이 그녀와 검을 섞어야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신화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 중에서도 최절정에 달했던 고수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무인 중에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겠죠.”
“시더 황자님도 말입니까?”
“황자님도 무리입니다. 전력을 다하시면 패배는 피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결과를 바라는 건 힘들다고 하시더군요. 문제는 악몽에서 당한 상처는, 곧 현실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즉 악몽에서의 죽음은….”
“현실 세계에서의 죽음이다.”
“그렇습니다.”
혹여라도 사희와 연관되는 쪽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하고 라피엘은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알베르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한데, 왜 그들이 무덤 수호자입니까?”
“천마님의 사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직도 죽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왕의 저주를 받았듯이, 그들도 저주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저주.
유피가 말했던 언급했던 그 말이 라피엘의 입에서 재차 흘러나왔다.
“특히나 천마님의 곁을 지키던 그들은 저주에 심하게 노출됐습니다. 부서진 공간으로 떨어져 버린 그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시공간이 뒤틀려버린 중원에서, 지금도 끝나지 않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천마님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말이죠.”
“······.”
“라피엘!”
“준비가 끝나신 모양이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시더의 부름을 받은 라피엘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빛나기 시작한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또 물어볼 기회가 있겠죠, 마스터.]
이제 마법진 바깥에 남은 건 알베르트뿐이다. 유피의 시선을 받은 알베르트는 마법진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곧 만드라고라의 잎을 삼켜버린 마법진은 강한 빛을 뿜어냈다.
*&*
전이가 끝나고 나타난 곳은 하얀 구조물이 보이는 숲속이었다.
공간 이동의 후유증일까. 눈앞의 풍경이 빙글빙글 돈다. 알베르트는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머릿속이 조금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실력이 늘었구나. 바로 옆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아니야. 무덤 근처의 마력장이 약해져 있어.”
유피의 표정이 밝지 않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다.
무덤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손을 들었다. 발걸음을 멈추자 조용해진 숲 너머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단장.”
“나도 이건 조금 불안한데···.”
무덤 앞에는 선객이 와 있었다.
그레이트 엑스(Great Axe)를 등에 멘 사내는 동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도전은 해봐야 할 거 아냐? 여차하면 셀리아의 텔레포트도 있잖아.”
“아니, 제이크. 내 텔레포트는 사용할 수 없어. 이 던전, 진짜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거야. 2서클밖에 다루지 못하는 나로서는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하기도 힘들어. 설마 진짜 알짜배기 던전이라니···. 우리 모험단이 도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야.”
티격태격 말이 길어지고 있다.
알베르트는 라피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은 저 문이 유일한 모양이다. 모여 있는 모험가들을 보고 유피에르는 시더를 돌아보았다.
“인족들이 왜 이 성소를 알고 있는 거야?”
“일부러 정보를 흘렸습니다.”
대답한 것은 시더가 아녔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라피엘이었다.
“어째서?”
“그 많은 진법(陳法)을 전부 부수면서 통과하기에는 벅차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보를 흘린 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 아마 대부분은 정리되어 있을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겨우 그딴 이유로 도굴꾼들이 꼬이게 했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 황녀님도 알다시피 저들의 힘으로는 무덤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마법진을 기동시킬 수 있는 건 발푸르기스의 자매들 정도입니다. 혹 제국의 대마법사라는 카라스가 오면 또 모르겠지만요.”
“······.”
설명을 들었음에도 유피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보다 못한 시더가 앞으로 나섰다.
“곧 알려질 장소였다. 루미에르 교와 크로만 공작가의 동향이 수상했지. 정규 조사대에게 무덤의 위치를 알리는 것보다, 모험가들에게 흘리는 쪽이 좋다고 판단했다.”
“은폐시키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아니면···.”
“무덤을 봉인한다는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다, 유피에르 황녀.”
“평소에는 뒤도 안 돌아보는 바보 주제에, 이럴 때만 신중하네?”
그녀는 쏘아붙이며 시더를 보았다.
그사이 결정을 내린 제이크 일행은 무덤으로 들어갔다. 다섯 모험가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유피는 숲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알베르트도 걸음을 옮겼다. 곧 두 명의 걸음은 네 명의 걸음으로 늘어났다.
입구로 들어가자 커다란 홀이 알베르트 일행을 맞이했다.
어두운 무덤을 밝히는 것은 홀 곳곳에 세워진 횃불이다. 이곳을 탐사한 모험가들이 세워놓은 불이겠지. 부서진 석상 위에 얹어진 횃불은 무덤을 훼손하고 있었다. 무인의 모습을 그린 석상이 불똥에 그을려 있었다. 유피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녀는 눈에 거슬리는 횃불을 전부 꺼뜨렸다.
석상을 지나 무덤 안쪽으로 향한다.
반파된 통로는 화살과 창 같은 것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함정이라도 발동한 모양이다. 검은 핏자국과 부서진 장치가 보였다. 주변을 관찰하던 알베르트는 어쩐지 이곳의 풍경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성의 지하에 있던 미궁 같은데.”
알베르트가 그 의문을 입에 담자 유피에르는 대답했다.
“같을 수밖에 없어. 거기도 천마의 무덤 중 하나니까.”
“거기가?”
그 미궁이 무덤이라고?
“하지만 무덤이라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아니, 네가 그 무덤을 통과했다면 봤을 거야. 천마가 남긴 것을.”
유피의 손가락이 흔들렸다.
그녀의 앞에 푸른 불길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 바깥에서 봤던 무덤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천마의 무덤이라는 건 말이야. 그분의 시체가 안치된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야. 13개의 무덤에는 말이지. 모두 그분의 유산이 흩어져 있어.”
“유산이 남은 장소를 무덤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래.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더러 있어.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에 보관한 재화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분에 관한 기록과 마족의 과거. 그 모든 것이 천마의 무덤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