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4) (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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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4)

“유피에르 황녀.”

“말씀하시죠, 시더 황자.”

거절은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현기증을 느낀 시더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왜 거절하는 거냐?”

“그야 귀찮은 일이잖아요.”

“거래 조건조차 안 듣고 말이냐? 너답지 않다.”

“당신이 제게 줄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잖아요.”

들을 필요도 없다. 유피에르의 대답에 시더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론이죠, 시더 황자.”

자신만만한 유피에르를 보며 시더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라피엘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쪽을 확인하라는 듯 시더가 턱짓을 보냈다. 유피에르는 손을 들었다. 그녀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베르트는 손수건을 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에서 나온 내용물은 썩은 나뭇가지였다.

“네가 애타게 찾던 세피로스의 나무다. 이래도 거절할 생각이냐?”

“······.”

썩은 나뭇가지를 손에 쥔 유피에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손을 살짝 비비자, 검은 가루로 변한 나뭇가지는 후드득 손수건 위로 떨어졌다. 유피에르는 혀를 내밀었다. 손가락에 묻은 나뭇가루를 핥은 그녀는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진품이네요. 하지만 이 정도 현물로는 촉매제밖에 할 수 없어요.”

“그건 일부에 불과해. 지팡이를 만들 정도의 소체는 내 성에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흐응···.”

생각보다 유피에르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세피로스의 나무를 본 순간 그녀가 벌떡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차분하게 찻잔을 드는 유피에르의 모습에 시더는 이마를 좁혔다. 미심쩍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경우의 수를 제외한 시더는 말을 골랐다.

“설마, 산의 마녀가···.”

“좋아. 이 거래, 응해줄게. 대신 이 현물은 먼저 가져가겠어. 그 정도는 상관없지?”

손수건 위의 나뭇가지. 많은 양은 아니다. 가루로 만든다면 작은 통으로 1개도 나오지 않을 양이다.

하지만 그 촉매제가 세피로스의 나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가치를 아는 이가 다룬다면 다른 어떤 촉매제도 세피로스의 나무와 비할 바가 못 됐다.

흔히 촉매제를 다룬다는 건, 들어가는 문이 다르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반 촉매제로 여는 문과 세피로스의 나무를 사용해서 여는 문은, 뒤쪽으로 이어지는 길의 높낮이가 달랐다. 그 차이는 산과 평지만큼이나 컸다.

만약 그 문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도 가능할지 몰랐다.

“욕심이 과하군, 유피에르 황녀.”

“좋은 제안이었어요, 시더 황자. 아쉽지만 거래는 여기까지네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라, 망할 동생아.”

“저는 더 나눌 이야기가 없네요, 바보 오빠.”

거래의 주도권은 영락없이 유피에르가 쥐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지팡이를 손에 넣었다는 걸, 시더는 알지 못했다.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거다.”

“전 미련이 없다니까요?”

유피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베르트가 기억하는 미소다. 분명 아가씨를 놀릴 때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저 웃음을 보고 나면 항상 다툼이 일어났었다.

「왜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야?」

「어머, 동족혐오를 잘못 말한 거겠죠?」

「난 당신과는 달라, 유피에르.」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전 적어도 당신처럼 뱃속에 능구렁이는 키우지 않거든요.」

「지금 날 뱀이랑 비유한 거야?」

두 아가씨의 말다툼이 떠오른다.

그리운 추억의 편린을 본 알베르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시더와 유피에르는 몇 분 더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백기를 올린 건 시더였다.

“그래. 네가 이겼다. 다 가져가라.”

“매번 고마워, 오빠.”

나뭇가지를 가루로 만든 유피에르는 작은 통 안에 수납했다.

통을 흔들어본다. 스르륵, 스르륵 하고 가루가 쏠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얼굴에 꽃이 만개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천마의 무덤으로 가지.”

“몇 번째 가짜 무덤이야?”

“13번째다.”

“알았어. 출발은 내일 아침.”

“그러지.”

유피에르는 시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동생의 손을 바라보던 시더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잘 부탁해, 오빠.”

“흥. 발목이나 잡지 마라.”

테이블 위에는 빈 찻잔만이 남아 있었다.

*&*

『월아 말이냐?』

“네, 사부님이 쓰시던 검이라고 들었습니다.”

흠, 하고 사부님은 삿갓의 끝을 매만졌다. 검은 두 눈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확실히 홍령(紅鈴)을 다루기 전에 썼던 일족의 검이었지.』

“홍령이라는 건?”

『네가 그 아이에게 준 신석이다.』

지금은 유피에르의 손에 들어간 현자의 돌로 만든 검인가.

“그럼 월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른다.』

“······.”

『사희에게 대산(大山)에 보관하라고 명했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본교는 지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닿을 수 없는 공간에 있는 물건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있기는 하지만, 갈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시더는 유피의 힘을 빌려 월아가 있는 장소에 가고자 하는 것 같다.

『사담은 여기까지다. 너도 무인이라면 권아(券兒)와의 비무에서 뭔가 느낀 게 있겠지. 그 심득을 보여 봐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에게 새로 받은 지팡이 검을 꺼낸 알베르트는 검기를 끌어올렸다.

검을 살짝 덮은 기운은 이내 실로 변화했고, 곧 면을 만든 검사는 검강으로 변했다.

시더와의 비무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몇 번을 반복해도 실패만 했던 검강이, 이제는 알베르트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재현되었다.

『공정 과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검강을 운용하기 위한 내공이지. 무조건 내공을 많이 담는다고 검강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과한 기는 안에서부터 모든 걸 망가뜨리지. 그건 비단 검강에 한하는 게 아니다. 이번 기회에 잘 알아두거라, 아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이제 검강을 유지해 보아라.』

사부님의 지팡이가 천천히 흔들렸다.

대화는 끝났다. 이제는 검으로 말할 시간이다. 알베르트는 땅을 박찼다.

검강이 사부님의 머리로 떨어진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지팡이가 알베르트의 검을 흘려냈다.

『너무 정직하다. 첫 공격이 매번 같은 느낌이라는 건 네 나쁜 버릇이다.』

알베르트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양손에 쥔 검과 검집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정직하게 들어가는 검과 달리 검집은 변초를 취한다. 사부님의 턱을 노리는가 싶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늑골을 찌른다. 찌르기가 막혔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초식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힘으로 누른다.

단순하지만 검강이 어린 검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아무리 사부님이라고 해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알베르트와 검을 섞는 사부님은 절대 앞에서 그 검을 받아내지 않았다. 흘러들어오는 검의 타점을 계속 흐트러뜨린다. 그 기술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고 해도 좋다.

작열하는 검강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받아내고, 그걸로 끝내지 않고 공격을 가한다. 지팡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날아드는 검강 앞에서도 위축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알베르트의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조금씩 타격을 늘려갔다.

아직 나는 멀었다. 사부님의 움직임을 보며 알베르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검집과 검을 같이 다루는 건 좋다. 적과의 간격을 재는 방법으로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도를 다루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아직 검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녀석이 벌써 변수에 의존하는 거냐?』

일순간 사부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알베르트의 뒤통수에서 아픔이 달렸다. 모습을 돌렸지만, 사부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눈앞에서 별이 반짝였다.

『눈에 의존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기다.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몸으로 반응해라. 실전은 일순간에 끝나는 법.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생사가 오가는 그 순간에야말로 무의 극의(極意)가 있다.』

움직임을 멈춘 사부님의 주변에서 나뭇가지가 떠올랐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수백이 넘어간다. 사부님이 든 지팡이의 끝이 알베르트를 가리켰다.

나뭇가지가 일제히 사출되었다.

알베르트의 검이 춤춘다. 피어난 꽃잎이 검막을 만들었다.

창천검법 4장

화무

쏟아지는 나뭇가지는 흡사 화살비와 같다.

두들기는 나뭇가지 사이로 지팡이가 들어왔다.

한 수.

사부님이 펼친 단 한 수에 꽃잎이 찢겨나갔다. 그 반동으로 튕겨 나간 알베르트는 나무에 부딪힌 뒤에야 간신히 멈췄다.

『방심하지 마라. 항상 눈앞에 뱀이 있다고 생각해라. 뱀은 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움직이는 법이지. 그건 간사하다거나, 약삭빠른 게 아니다. 그 끈질김이야말로 뱀의 본질이다.』

흔들리는 시선을 바로 잡듯이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현기증을 떨쳐내는 알베르트의 앞으로 사부님은 다가왔다. 그는 지팡이로 알베르트의 이마를 눌렀다. 꾸욱, 하고 그 끝에 실린 힘이 붉은 자국을 남겼다.

『본좌가 너에게 준 건 힘만이 아니다. 본래 무인이라면 일평생을 바쳐 알아낼 하나의 길을, 너는 수십 개가 넘도록 알고 있다. 도착점에 닿을 수 있는 길이 한 개가 아니라는 것. 그게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르겠느냐? 네 선배가 어떤 길을 걸어갔고,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너라면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도 알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 제자는 그분들의 기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는. 생각나지 않는 게 아니다. 네가 그들의 기억을 볼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탓이다.』

“······.”

사부님은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의 이마에서 지팡이를 뗐다.

『흔히들 말하지, 무를 연마한다는 것은 체(體)와 기(氣), 심(心)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체라는 것은 무를 연마하는 육체를 말한다. 손을 뻗고, 발을 딛기 위한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주체. 체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무를 갈고 닦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조차 가질 수 없다. 기라는 것은 만물에 깃든 위대한 힘을 말한다. 우리는 기를 그릇에 담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쌓은 기가 내공이 되며, 이를 운용하는 게 무의 첫걸음이다. 자, 그렇다면 하문하마. 마지막으로 남은 심은 무엇이겠느냐?』

삿갓 아래로 드러난 사부님의 눈이 고요하다. 생각을 정리한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체와 기를 쌓았다고 한들, 그것을 다루는 주체가 인형이라면 무를 행할 수 없습니다. 심이라는 것은 즉, 무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심이라 함은 네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체와 기는 시간을 통해 준비할 수 있지만, 심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심이 없는 무인은 업(業)을 등에 짊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업을 가진 자는 결코 자신을 무인이라고 자칭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그저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일 뿐이다.』

무인이 아니다.

심을 잃어버린 이들은 사냥꾼이다. 사냥꾼이라는 명칭을 잊지 말자. 가르침을 되새기는 알베르트를 향해 사부님이 물었다.

『그럼 너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냐?』

그 물음은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알베르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셋 전부입니다.”

『좋은 대답이다. 너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나약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번 네 혈도가 다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심과 기는 닦여져 있으나 그걸 받아내는 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본좌가 준비해둔 환골탈태를 겪었음에도 모자른다. 기를 담아야 할 그릇이 너무나도 작다.』

수련을 빙자한 구타가 계속 이어졌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던 모양이다.

『초조해하지 말아라. 조화를 꾀하는 이 세 기운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이게 되는 법이다. 이를 위한 수련이 바로 심법이다. 검기와 검강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다루는 기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수련해도 그릇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차라리 기를 봉인하고 수련에 임하는 게 너에게는 어울리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정진하거라. 무에 지름길 같은 건 없다.』

사부님의 가르침은 천금보다도 더 귀한 이야기였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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