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3) (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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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3)

시더는 차를 마시던 라피엘을 불렀다.

모포 위에 앉아 있던 것은 두 사람이었을 터인데,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시녀 한 사람이었다.

“일어날 시간이라고 좀 말해줘라.”

“또 하실 생각입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슬슬 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북부에서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왔습니다. 황자님의 생각보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실 겁니다.”

“알고 있다. 나도 그렇지만, 이 녀석도 한계다.”

“상태만 괜찮다면 하고 싶었다는 말씀이군요.”

질렸다는 듯 라피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반투명한 그녀의 손이 검붉은 머리카락에 닿았다. 찌릿, 하고 알베르트의 몸이 떨렸다.

“그런 방법이 아니라···.”

“어머, 확실하게 깨웠다고요?”

정신을 차린 알베르트는 실이 풀린 것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알베르트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더와 라피엘. 떨어진 검과 무릎 꿇은 자신. 이윽고 답이 도출됐는지 그는 두 손을 모았다.

“제가 졌군요. 귀한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무승부다.”

“제 패배입니다. 비무 중에도 몇 번이나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황자님께서 정면승부에 응해주지 않았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수는 몇 되지 않았습니다.”

“시끄럽고. 내가 무승부라면 무승부다. 사나이라면 쫑알쫑알 대지 말고 주먹으로 말해라.”

시더는 알베르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은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베르트는 부러진 검집과 검을 회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더는 말했다.

“너, 내 아래로 들어와라.”

“······.”

알베르트가 멍하니 시더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내 가신이 되라고 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인간입니다만?”

“인족이든, 수인족이든. 그딴 건 상관없어. 난 네가 마음에 들었다. 알베르트 란. 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가 널 원한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라피엘을 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입니까, 하는 시선을 받은 라피엘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런 분입니다, 하고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황자님의 곁에 인간인 제가 있어도 괜찮다는 겁니까?”

“황자인 내가 그러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인간인 절 거두면 입장이 곤란해지실지도 모릅니다.”

“내 그릇은 그렇게 작지 않다. 반대하는 녀석들도 모두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다.”

자신만만한 그 대답에 역으로 말문이 막힌 건 알베르트였다.

“넌 걱정할 필요 없다. 서로 주먹으로 이야기를 나눈 이상, 내 가신들도 이해할 거다. 그렇지, 라피엘?”

“죄송하지만 주먹을 나눈 건 제가 아니라 황자님입니다. 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봐라! 역시 마음씨가 넓다니까, 우리 라피엘은.”

“······.”

벽과 이야기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앞뒤 꽉 막힌 시더 황자의 대답에 라피엘은 말없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대답은 뭐냐?”

“황자님을 따른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제물이나 권력을 주실 건가요?”

“흠, 뭐냐. 넌 그딴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냐? 이상하군. 그런 인간으로는 안 보이는데···. 아쉽게도 난 그런 건 약속할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시더는 자신을 떠보는 알베르트의 말에 하얀 이를 드러냈다.

“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충성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사내라는 것만큼은 알려줄 수 있다.”

“······.”

두 주먹을 부딪친 시더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우드득, 하고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용병이나 할 법한 우악스러운 행동인데도 불구하고, 시더의 기개는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해 보였다.

‘이런 사람이었나, 1황자는?’

[불같은 남자라고 마스터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피가 불처럼 끓어오르는 남자 중의 남자라고요.]

‘아니, 내가 본 1황자는···. 불같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남자라기보다는···.’

유피와 싸우던 1황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마치 성난 황소처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해치우던 남자. 그 뒤를 쫓던 수많은 마족은 광신도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건 약이나 마법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충성심의 발로. 그저 이 남자를 흠모하는 수많은 가신이 시더의 부름에 답한 것이리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시더를 보고 있잖니, 무심코 알베르트도 그 뒤를 따라가고 싶어졌다.

이런 남자라면, 한 번쯤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정말로 대단한 분이군요, 황자님은.”

이 늙은이의 마음에 혈기가 들끓게 만들 줄은 몰랐다.

“뭐야, 갑자기 칭찬하는 거냐? 남자의 칭찬은 별로 기쁘지 않다만.”

한쪽에 있던 라피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느낌이다.

[신뢰받고 있군요, 1황자는.]

‘그러게 말일세.’

뒷머리를 박박 긁적이는 시더를 보며 알베르트가 입을 열던 찰나였다.

“내 성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별무리가 지는 은발의 아가씨, 성주인 유피에르 바토리다. 예의 네글리제 차림에 스톨을 걸친 그녀는 발코니에 서 있었다. 아직 마나가 다 회복되지 않은 탓일까? 정원을 내려다보는 유피의 안색은 어두웠다.

“응? 뭐냐. 네가 웬일로 날 마중하러 나오다니. 이제야 철이 좀 든 거냐?”

“시끄러워, 바보 오빠. 왔으면 들어올 거지. 왜 남의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정원을 둘러본 유피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동생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시더는 소리 내어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느냐? 여기는 원래 쓰레기통이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그딴 소리를 하면 바로 쫓아낼 거야.”

“이것 참 무서운 소리를 하는구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예쁜 법이야.”

유피는 손을 들었다. 반투명해진 손이 악단을 연주하는 것처럼 날갯짓했다.

그녀의 지휘에 맞춰 흩어진 흙더미가 정원 바닥으로 돌아갔다. 파였던 구덩이가 다시 복구되어간다. 하지만 그 위에 있던 잔디까지는 수복시킬 수 없다. 민둥산처럼 황량해진 정원 바닥은 높낮이가 완만해졌을 뿐이다.

“손님맞이 할 준비해, 알.”

“알겠습니다, 아가씨.”

발코니 안쪽으로 들어가는 유피를 향해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라피엘은 시더에게 망토를 건넸다. 그는 긴 망토를 한쪽 어깨에 멨다.

“뭐, 이 몸의 제안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봐라. 사나이의 인생을 걸 결정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알베르트님.”

으하핫, 하는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시더와 라피엘과 성안으로 들어갔다.

*&*

응접실에 들어온 시더는 유피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알베르트는 식당에서 챙겨온 샌드위치와 홍차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유피의 뒤로 간 알베르트는 말없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제법 성이 깔끔해졌구나. 설마 네가 쓰레기통을 비울 줄은 몰랐다.”

“대신 청소해 줄 거 아니면 신경 쓰지 마시지?”

“이제 괜찮은 무인을 만나서 시집만 간다면, 이 오빠는 더 바랄 게 없는 데 말이야.”

“일 없네요.”

유피의 대답에 시더는 홍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갓 달인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시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뜨겁군!”

“당연한 거 아니야?”

무슨 이런 바보가 다 있담, 기가 찬다는 듯 유피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흠, 라피엘은 항상 식혀서 주는데 말이지.”

“오빠가 매번 그런 식으로 마시니까 그런 거야.”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찻잔을 든 그녀는 홍차의 향을 맡았다. 올라오는 향이 마음에 들었는지, 언짢았던 표정이 밝아졌다.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사이 한 잔 더 홍차를 마신 시더는 찝찝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술은 없나, 알베르트?”

“와인과 맥주라면 조금 있습니다.”

“노주(露酒)는?”

“죄송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방문 때까지는 준비해두겠습니다.”

시더가 말하는 건 마족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유피가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성안에 따로 마련해둔 술이 없었다. 지금 있는 술도 알베르트가 요리를 쓰기 위해 준비해둔 술이어서 그 양은 많지 않았다.

“이상하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지하 창고는 확인해봤나?”

“창고 말씀입니까? 창고라면 텅 비어있습니다.”

“유피에르.”

“난 모르는 일이야.”

유피의 얼굴에 조금 피곤한 기운이 떠올랐다.

“술을 좋아하는 스켈레톤 아저씨가 애저녁에 다 마셨는지도 모를 일이지.”

“범인은 그 사람이었나.”

남매는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둘이 언급한 그 사람이 누군지 알베르트는 짐작할 수 있었다. 따로 생각해낼 필요는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마다 만나는 사부님의 이야기였으니까.

[마스터, 스켈레톤이 술도 마실 수 있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아무리 사부님이 특별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 육체는 스켈레톤이다.

골격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도 술을 마시는 게 가능했던 걸까?

다음번에 외출할 일이 생기면 꼭 술을 사 와야겠다. 스켈레톤이 술을 마시는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남몰래 다짐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가족을 찾아오는 데 이유가 필요했던가?”

“사전연락도 없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아무리 시더가 경우 없는 사람이라지만, 막무가내식으로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가벼운 이야기를 가져온 건 아니리라. 유피의 물음에 시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의 유산을 발견했다.”

“유산?”

“그분이 사용했던 검을 찾았지, 라피엘.”

시더는 손가락을 튕겼다. 시더의 뒤에 서 있던 라피엘이 낡은 부적을 꺼냈다.

부적은 테이블 위로 날아오더니 불길에 휩싸였다. 화마 속에서 아름다운 검의 형상이 떠올랐다. 알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푸른 검신이 인상적인 검이었다. 아름답다.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무기가 이런 예술품에 가까운 모습을 해도 되는 걸까?

“발언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말해봐.”

유피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피엘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천마님께서 사용했다는 신검(神劍), 월아(月牙)입니다. 통칭 달의 어금니. 하늘에서 떨어진 달의 광석을 제련해서 만들었다는 무기죠. 멸마(滅魔)의 기운이 담긴 신성한 검으로, 사악한 모든 것을 베어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이 어려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자신의 주인이 될 자를 스스로 가린다는 신검인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고? 전승을 부정하는 거야?”

“네. 전승이라고는 해도···. 천마님께서 갖고 온 이 검은, 그분 외에 사용한 자가 없는 검이기 때문입니다.”

“······.”

뜻밖의 사실에 유피는 무심코 실소를 흘렸다.

라피엘이 설명을 멈추자 그녀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전승이 사실이라면 월아는 자신을 쥔 자에게 악몽이라는 시련을 내린다고 합니다. 만약 그 시련을 통과할 수 있다면 월아는 힘을 빌려주지만, 반대로 통과하지 못한 이에게는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유주의 영혼을 모두 빨아들일 때까지 멈추지 않는 마검이 된다고 하더군요.”

“신검과 마검을 가르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결국, 분에 넘치는 욕심은 모든 걸 파괴할 뿐이야. 그게 설령 자신이라도 말이야. 그래, 그걸 막을 방법은?”

“월아와 한 쌍을 이루는 검집인 월순(月盾)이 근처에 있으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역시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너무 강한 사람이 소유주였던 것도 문제구나.”

화마가 사그라든다. 월아의 형상을 투영하던 부적은,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설명은 그걸로 끝이다. 라피엘은 발언 기회를 준 유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뒷걸음을 밟은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이야기는 충분하겠지. 이제 월아를 회수하러 갈 생각이다.”

“그래서 날 찾아왔구나? 전승이 사실이라면 월아는 대산(大山)에 있을 테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시더 아르테니아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올렸다. 턱을 손 위에 괸 그는 입을 열었다.

“도와줄 수 있겠나, 유피에르 바토리?”

“거절할게요, 시더 아르테니아.”

산뜻한 미소와 함께 유피에르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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