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1) (2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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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1)

하얀 검신 위로 거미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발이 춤을 춘다. 거미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붉은 실이 그림자처럼 눌어붙었다. 검신 위를, 거미는 흘러가듯이 타고 올라간다. 뱀이 꽈리를 트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실은 마치 교미하는 생물처럼 엉키고 설켰다. 실타래가 된 실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나간다. 튼튼한 내실을 잡고, 이제는 바깥으로 나아갔다. 견고한 건물을 만드는 것 같다. 주춧돌 위에 차곡차곡 쌓인 벽돌은 이내 하나의 면을 만들었다.

오러 블레이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검강이 알베르트의 손에서 구현되었다.

『그런 식으로는 힘들다고 하지 않았더냐.』

사부님은 손에 쥔 돌멩이를 나무로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는 나무 안쪽에 박혔다.

알베르트의 집중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형태를 갖추고 있던 검강은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부서졌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다.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검강을 만드는 데 실패한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야, 뭐가 문제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사부님. 이번에는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공정 과정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검사를 차곡차곡 쌓아갔던 건데, 그럼에도 검강은 유지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다.』

“천천히 만든 게 말입니까?”

딱!

사부님의 지팡이가 알베르트의 머리를 때렸다.

『멍청한 놈. 그 잡념 말이다. 어떻게 된 게 넌 나이도 어린 것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것이냐?』

팔짱을 낀 사부님은 알베르트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다.

『일단 검사부터 쌓자. 이 기운은 저기를 보강하는 게 좋겠다. 탑을 쌓을 때는 천천히 만들어야지. 기반이 가장 중요하니까. 만들다 보니 저쪽도 부실하군. 일단 내공을 부어서 해결할까? 멍청하기는. 넌 검강을 만들고 싶은 무인이냐, 집을 짓고 싶은 도편수냐?』

“······.”

『잡념은 필요 없다. 네 직감대로 해봐라. 본좌가 너에게 전수한 것은 억지로 먹어 치운다고 해서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부님의 조언을 받은 알베르트는 다시 한 번 검강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허허. 그것참, 이해할 수가 없구나. 겉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인데, 알맹이는 세상 다 산 노인네라니.』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 사부님은 발길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떠나가는 사부님의 뒷모습에 인사를 올린 알베르트는 제자리에 앉았다. 심법을 운용해 달아오른 내공을 달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 성취라는 건 단번에 이룰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마스터가 예외라고는 해도 단계를 밟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겠죠.]

‘세상사 쉬운 일은 하나도 없구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알베르트는 성안 쪽으로 향했다.

유피의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온 알베르트는 못다한 청소를 이어가고 있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고철 덩어리를 쌓아놓은 공간이 점점 산처럼 변해갔다. 아직 성의 반절도 치우지 못했는데 이만한 양의 쓰레기라니, 안쪽까지 전부 정리하고 나면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올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한 명 정도 인력이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유피는 망자들을 청소에 동원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한다고 했잖아, 알. 난 손을 빌려주지 않을 거야.’

“이상한 데서 속이 좁은 여자라니까.”

[마스터,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들으라고 말하는 거네. 짧게 덧붙인 알베르트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청소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일손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청소를 거들어주고, 유피의 사생활을 지켜줄 수 있는 시녀가 한 명만 더 있어도 지금보다 훨씬 편해질 것이다. 빗자루를 든 그가 다시 성으로 향하는데, 문득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단발머리의 여성은 마족들이 입는 시녀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트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냄새는…. 인족? 당신은 누구죠? 왜 이 성에 있는 겁니까?”

시녀의 푸른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대기의 마나가 팽팽해졌다.

“본성의 임시 집사를 맡은 알베르트 라나라고 합니다. 무슨 용무로 본성을 찾아오신 건지 물어도 될까요?”

알베르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해를 사게 되면 대처할 방법이 없어진다. 잠시 시험하듯이 알베르트를 지켜보던 시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황녀님이라고 말하지 않는 건 아직 알베르트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특정 대상, 즉 유피에르 바토리를 지칭하지 않은 건 그가 외부인일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는 것 같다.

“유피 아가씨를 말인가요?”

알베르트는 허물없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성에 있는 게 아니다. 유피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어필했다. 알베르트의 의도는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갔다. 라피엘의 주변에 떠올랐던 마나의 기세가 죽었다.

그 사이 알베르트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오늘 손님이 찾아온다는 언질은 듣지 못했다.

점심을 먹은 유피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망자를 돌려보낸 게 피곤했던 듯, 잠시 잠을 청한다고 했던가.

그 순간이었다. 권풍이 알베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마스터!]

천칭의 경고보다 먼저 알베르트의 손은 반응하고 있었다.

사부님 아래에서 행한 수련이 성과를 발한다. 적의를 감지한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목을 노리고 들어온 권풍을 알베르트는 지팡이 검으로 받았다. 검집을 타고 그 위로 바람이 달렸다. 빙글, 하고 바깥쪽으로 검집을 넘기자, 미끄러지던 권풍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아갔다. 권풍이 맹렬한 기세로 돌아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맨손을 들었다.

“핫!”

당찬 기합 소리가 울렸다.

한 손으로 권풍을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깨져나갔다.

“제법이구나. 뭐냐, 넌?”

알베르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권풍을 짜부라뜨린 그는 알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이 자는···.]

잘못 본 게 아니다.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타오르는 머리카락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알베르트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마족의 1황자인 시더 아르테니아였다.

상정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알베르트의 사고가 빙글빙글 돌았다.

왜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유피와 자주 만나던 사이였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유피와 시더의 사이는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싸움을 걸러 온 거면 모를까. 시더가 시간을 내서 유피를 만나러 오다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사고를 털어낸다.

더는 기다리게 만들 수 없었다. 시더는 알베르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군요. 본성의 주인이신 유피에르 바토리 아가씨의 집사인, 알베르트 라나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귀인의 존함을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뭐야, 인족치고는 제법 예의가 바르군. 그 골격 애호가인 동생의 사용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군. 거기에 여자도 아니고 남자라….”

알베르트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좋다, 네 녀석 정도라면 이 몸의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지.”

시더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녀는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마족의 제 1황자이신 시더 아르테니아님입니다. 저는 황자님의 시녀를 맡은 라피엘 슈네르라고 합니다.”

“미안하다. 내 입으로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지.”

툴툴거리는 시더의 목소리에 라피엘의 눈썹이 호를 그렸다.

“외인이 보고 있습니다.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황자님.”

“딱딱하게 그러지 말라고.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니까.”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일까. 시더는 연신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황녀 전하를 보러 오신 겁니까?‘

”그래, 동생을 보러 왔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말이다. 한데, 그건 조금 뒤로 미뤄도 될 것 같군.“

”급한 용무라도 생각나신 겁니까?’

“그렇지. 바로 너라는 녀석을 말이다.”

암석 같은 주먹이 알베르트의 얼굴로 쇄도했다.

반응은 늦지 않았다. 캉, 하고 검집과 부딪친 주먹은 마치 철이 맞물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둔한 통증이 손목에 실렸다. 장난이 아니다. 진심이 담긴 주먹이었다. 알베르트의 시야가 시더로 가득 찼다.

“!”

“너, 나랑 한 번 붙어보자!”

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는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그 눈이 전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시끄럽군! 남자면 주먹을 들어라! 말보다 주먹다짐이 더 많은 걸 말하는 법이니까!”

손이 얼얼했다. 내공이 담긴 시더의 권은 허투루 볼 힘이 아니었다.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검집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시더의 주먹을 받은 검집은 주먹 자국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시더가 어떤 마족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지 않나?’

초면에 주먹부터 휘두르는 황자님이라니. 적어도 다른 절차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알베르트의 소리 없는 항의는 통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낼 여유조차 없다. 알베르트의 검은 쇄도하는 주먹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시더를 말려줄 거로 생각한 라피엘은 정원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모포를 바닥에 깐 그녀의 곁에는 어느새 온 건지, 사부님이 엉덩이를 내리고 있었다.

“드실 건가요?”

라피엘이 찻잔을 건네자 사부님은 거절했다.

아니, 사부님은 또 거기에 왜···.

사고가 끊겨나간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얼굴이 뜨겁다. 알베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붉은빛이 춤췄다. 충격을 수습할 여유는 없다. 반사적으로 검을 든 알베르트는 묵직한 돌과 부딪쳤다.

일격, 이격. 연격은 끝나지 않는다. 시더의 주먹을 따라가는 팔이 무거워진다.

균형을 잡고 있는 하반신이 흔들린다. 지지대로 삼은 발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이 밀리지는 않았다. 내공으로 강화한 신체가 충격을 버텼다.

이번에는 알베르트의 차례다.

방어가 문제가 아니다. 공격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그건 얕은 생각이었다. 알베르트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한 번 더 검 위로 충격이 떨어졌다.

2차 충돌.

이미 끝난 거로 생각했던 시더의 주먹이 한 번 더 알베르트의 검을 두들겼다.

공격을 위해 자세를 바꾸던 찰나다. 불안정한 몸은 충격을 흡수하지 못했다. 알베르트의 신체가 붕 떠올랐다. 지지할 곳을 잃은 두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졌다.

[위험합니다, 마스터!]

온다. 시더의 입가에 퍼지는 미소처럼, 두 주먹이 강렬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대처할 방법이 없다. 두 손으로 검을 쥔 알베르트는 충격에 대비했다.

3차 충돌.

붕 떠버린 알베르트는 볼썽사납게 정원을 굴렀다. 두 세바퀴 정도 정원 바닥을 구른 그는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방금은 좀 건방졌다. 이 몸을 앞에 두고 딴 곳을 바라볼 여유가 있나 보지?”

오른쪽 주먹을 든 시더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주먹 위에 맺힌 내공은 알베르트가 만드는 미완성된 검강보다 뚜렷한 것이다. 권강이다. 입 안에서 비릿한 맛과 통증이 느껴졌다. 입안을 비좁고 들어간 흙을 알베르트는 뱉어냈다. 건더기에는 붉은 핏자국이 딸려 나왔다.

“진심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말했지? 말은 필요 없다. 너도 남자라면 주먹으로 말해라.”

불평은 넣어둔다.

시더의 주먹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다.

그는 알베르트보다 강자다.

알베르트의 검에서 실이 엮이기 시작했다. 검강을 만들 수는 없다. 지금 알베르트가 쓸 수 있는 최선의 수는 검사다. 자세를 갈무리한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황자님이 시작하신 겁니다.”

“쫑알쫑알 말이 많구나!”

푸른빛으로 물든 시더의 주먹과 알베르트의 검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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