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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그 집사의 외출(4) (2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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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사의 외출(4)

성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일단 식재료부터 정리했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재료와 신선도가 중요한 재료를 분류한다. 마법 처리도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유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재료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네.”

빈방을 얼음창고로 만든 그녀는 문을 닫았다.

이 정도면 재료의 보관은 문제 될 것이 없으리라.

“일단락은 된 것 같아. 고마워, 유피.”

“됐어. 그럼 난 이만 자러 갈 거니까.”

그녀의 발치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걸어가는 것도 귀찮다.

유피는 단번에 방까지 공간 이동할 생각으로 보였다.

“바로 잘 생각이야?”

알베르트는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잡았다.

“뭔가 다른 용무라도 있어?”

“유피만 괜찮다면 홍차를 타주고 싶어.”

“홍차? 음···. 그럴까?”

반쯤 졸고 있던 유피의 붉은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잠시 후, 후원으로 나온 유피와 알베르트는 따뜻하게 우러난 홍차를 들고 있었다. 평소에 달이던 차와는 다르다. 잔에서 올라오는 향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피의 얼굴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향이 다르네. 찻잎을 바꿨구나.”

“나가는 김에 로얄 다즐링으로 하나 구해왔어.”

루드비히 공작가로 헌상 되는 찻잎 중 하나다. 가격도 비싼 편이고 매물도 적은 관계로 많이 구해오지는 못했다. 유피가 준 금덩이를 더 썼다면 충분히 당겨올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되면 사후 처리가 문제였다. 어디의 상단도 아니고, 외곽 지역에서 귀족들이 즐겨 먹는 고급 홍차를 대량으로 사 가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잊어서는 안 된다.

유피에르 바토리는 마족이다. 인간과 마족은 적대 관계에 있다. 꼬리를 밟히면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될 뿐이다. 알베르트가 웃을 수 있는 광경은 나오지 않는다.

의자에 앉은 유피는 네글리제 차림이었다. 바깥바람이 찬 관계로 스톨을 걸치고 있었지만, 얇은 스톨은 망토와는 달리 바람밖에 막지 못했다. 한기가 느껴지고 있는 걸까, 향을 즐기던 그녀는 입가로 찻잔을 가져갔다.

한 모금, 차를 머금은 유피는 두 눈을 감았다.

차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혀를 굴리며 달달한 맛을 즐긴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얼마나 구해왔어?”

“아껴 달이면 일주일 정도는 마실 수 있을 거야.”

“일주일? 다음부터는 더 구해와도 돼.”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찻잎이야.”

알베르트의 거절에 유피의 볼이 씰룩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설마 자신의 말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유는?”

“루드비히 공작가로 헌상 되는 물건이야. 대신에 다른 찻잎도 구해왔으니까, 그쪽도 한 번 마셔봐. 이것보다는 못해도 나쁘지 않거든.”

“이 찻잎이 루드비히 공작가로 들어가는 물건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그야 내가 거기서 일했으니까.”

“뭐?”

그 대답에 유피는 반문했다.

“내 출신이 루드비히 가문이라고 말했어.”

마족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잘못 들은 거로 생각했는지, 유피는 가만히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그러나 부정의 말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붉은 두 눈에 맺힌 상이 살짝 흐릿해졌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루드비히 공작가에는 집사가 한 명밖에 없을 텐데.”

“맞아. 로버트 집사장님이 유일한 집사야.”

“그럼 너는?”

“아직은 수습 집사 신분이야.”

유피는 찻잔을 내렸다. 후, 하고 숨을 길게 토해낸 그녀는 미간으로 손을 옮겼다.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유피는 먼저 주름이 생기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잠시 아미를 매만지던 그녀는, 테이블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하나, 둘 테이블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강하게 두들기는 건 아니다.

톡톡, 하고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생각이 정리된 유피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마족의 황녀인 건 알고 있지, 알?”

“물론이죠, 유피에르 황녀 전하.”

알베르트는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장난치는 것 같은 집사의 모습에 유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네 출신은 제국의 루드비히 가문이고. 루드비히와 마족의 관계는 알고 있어?”

“좋은 사이는 아니지.”

일찍이 있었던 대전쟁에서는 항상 전장에서 마주쳤던 두 세력이다.

제국의 선봉에 서는 가문은 루드비히와 크로만이다. 두 가문의 이름을 모르는 마족은 없을 것이다. 태연한 알베르트와 달리 유피는 머리가 아파져 온다는 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내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좋아. 네 출신은 당분간 비밀로 하자.”

“비밀로 할만한 사람도 없잖아?”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인지.”

요 1년간 유피를 만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성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 그건 금지된 숲에서 미아가 된 모험가들이지 않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찾아온 거야? 그것도 루드비히 가문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유피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일류 집사는 아가씨로 모실만한 주인님을 스스로 찾아가는 법이야.”

“말은 잘 하네.”

그 말을 끝으로 유피는 입을 닫았다. 생각할 것이 늘었는지, 그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차를 홀짝거렸다.

늦은 시간에 마시는 차는 어딘지 모르게 운치가 느껴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아가씨와 둘이서 차를 즐기는 일이 많았지. 알베르트의 눈동자가 그리운 빛으로 젖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아가씨가 아니다.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의 요정, 유피에르 바토리다. 자신의 곁에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떠나가버렸던 바람 같은 여인.

차를 즐기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흩날리는 은발이 마치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보였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한밤중에 떠오른 달은, 유난히도 밝아 보였다.

성을 나서기 전만 해도 상쾌한 기분으로 보고 있던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고,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베르트와 유피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종 관계라면 더 이야기할 것도 없는 거리감. 알베르트는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있지, 유피.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작은 용기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라면 그 경계선을 넘어도 될 것 같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곁에 없어도 되는 게 아닐까?”

이전 삶과는 다르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가씨의 곁을 지키던 집사 알베르트 라나는 없다.

빨라도 앞으로 4년이다.

마지노선으로 잡은 5년의 세월 동안 유피의 곁에서 수련을 마친다. 아리시엘 루드비히의 나이는 6살이 되겠지. 준비를 마친 그가 아가씨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말로 맞는 답인지, 알베르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천칭은 말했다. 아가씨를 구하고 싶다면 정말로 큰 힘이 필요할 거라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마족과 전면전을 펼칠 수 있는 힘. 그 힘을 쌓기 위해서는 이곳이 최고다. 사부님의 아래에서 수련을 닦으며, 그 유산을 찾으러 다닌다. 그렇게 얻고 쌓은 힘은 분명 아가씨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알베르트가 없더라도 아가씨의 곁에는 많은 식솔이 있었다.

참사만 막을 수 있다면 그녀의 곁에는 많은 가신이 남을 것이다. 자신이 그들 사이에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는 참을 수 있었다.

알베르트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인내심이라면 꽤 자신이 있었다.

가만히 알베르트의 말을 듣고 있던 유피는 다 식은 홍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거칠게 입안에 차를 털어 넣은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 무슨 애늙은이야?”

“뭐?”

“늙은이처럼 무슨 잡생각이 그리 많냐고 물었어.”

당황하는 알베르트를 앞에 둔 채 유피는 두 손을 모았다.

“그런 잡념 따위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네 의사잖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나는···.”

아가씨를 구하고 싶다. 그 일념뿐이다.

알베르트는 아가씨의 마지막 인사를 떠올렸다.

「작별이야, 알. 말은 안 했지만, 나. 당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했어.」

그때 아가씨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지?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어떤 얼굴로 알베르트를 내쫓았었지?

하나뿐인 집사가 떠나간다는 배신감?

자신의 곁을 떠난 집사에게 실망감을 느꼈나?

아니, 다르다.

아가씨는 그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슬픈 미소가 아니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안도하고 있었다.

떠나는 알베르트를 보며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안도하고 있었다.

어째서?

하나뿐인 집사가 떠나가는데도, 그녀는 왜 안도하고 있었지?

“아···.”

그런가. 불현듯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아가씨는 이제부터 향하게 될 전쟁터에 집사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적어도 알베르트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기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고향에서 눈을 감길 아가씨는 바랐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곁에 있고 싶네.”

한 번은 실패했다.

아가씨를 지키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알베르트는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가씨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꽃처럼 화사하고 활발하게 웃던 소녀. 저택의 식솔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성장하던 아가씨는 모든 것을 잃고 일변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아카데미에서 사귄 지인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단짝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루미에르 교의 성녀였다. 이윽고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지아비를 얻은 아가씨는 제국의 명운을 그 등에 짊어지게 되었다.

그 미래를 피할 수만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행복을 찾은 아가씨가 알, 이라고 자신을 정겹게 불러주기만 한다면. 그는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찻잔을 마저 비운 유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치에서 선이 달렸다. 발현된 마나는 마법진을 그렸다.

“고마워, 유피. 내 곁에 있는 게 너라서 다행이야.”

“일 없어. 꼬맹이면 꼬맹이답게 부딪혀. 더러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많은 걸 원하는 이가, 더 큰 위험을 지는 건 당연한 거야. 만약 네가 전력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뭐, 그러네. 그 손을 잡아주는 일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유피의 모습은 사라졌다. 자신의 방으로 공간 이동한 것이리라.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달만이 떠 있었다.

*&*

후원에서 나온 알베르트는 사부님을 찾았다.

밤낮이 없는 사부님은 문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며드는 달빛이 아름답다. 스켈레톤과 달빛의 조합은 불길한 상상만 불러왔지만, 어떤 의미로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오늘 성 밖에 나갔다 왔습니다.”

『마물을 잡으러 간 건 아닐 테고, 그래. 저 아이의 부탁이라도 받은 거냐?』

“그건 아니고···. 장을 좀 봐 왔습니다.”

『장? 겨우 그런 걸 보고하려고 이 몸을 찾아온 거냐?』

검붉은 내공이 이글거렸다. 사부님의 노기가 보이는 것 같다. 지팡이 검이 올라가기 전에 알베르트는 준비해온 물건을 꺼냈다.

“유피가 이런 쪽으로는 둔감하잖아요. 제자가 아니면 누가 챙겨드리겠습니까?”

『······.』

사부님 앞으로 알베르트가 내민 물건은 삿갓이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쓸모없는 짓을 했구나. 무인은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가요?”

차가운 사부님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삿갓을 다시 가져왔다.

기뻐할 거로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건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두고 가라.』

“네?”

『버리기엔 아깝지 않더냐.』

“아뇨, 다시 교환해오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라.』

“······.”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사부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본 알베르트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사부님의 머리에는 멋들어지는 삿갓이 있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사부님은, 의외로 귀여운 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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