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그 집사의 외출(2)
기세 좋게 덤벼들던 마물들이 공포를 느낀 건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쫓아오던 놈들과 부딪친 녀석들은 두려움을 내쫓기 위해 포효했다. 곧 녀석들은 알베르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마물들은 마치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았다.
트롤의 도리깨가 들어온다. 노리는 곳은 알베르트의 머리다. 알베르트의 발이 춤춘다.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움직임. 보법. 상대방의 사각지대로 나아간다. 알베르트는 몸을 숙였다. 트롤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녀석의 몸 안쪽으로 파고든다. 왼손에 쥔 검집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놈의 몸이 꺾였다. 머리가 내려온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트롤의 목을 날린 알베르트는 오크의 허리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우아하고, 유려하게 움직인다.
나아가는 발은 이미 사부님의 가르침을 재현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다가오는 놀(Gnoll)을 확인했다. 일순간 그 몸이 튕겨졌다. 놀과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든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알베르트의 모습에, 놀의 반응은 한 박자 늦었다. 알베르트의 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불나방처럼 몰려오는 마물들의 손을 검집으로 막고 검으로 조각낸다. 이후로 이어진 건 단순한 반복 행동이었다. 알베르트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녀석이 죽어 나간다. 초식이고, 무술이고 필요 없다. 그저 순수하게 갈고 닦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한다.
발목을 노린 고블린. 검집에 맞아 날아갔다.
신체의 힘만 믿고 들어오는 오크의 도끼, 두 손을 잘라내 위협을 제거한다.
두 주먹을 모은 오우거. 이미 목이 달아난 놈의 주먹은 갈 곳을 잃었다.
검무(劍舞)는 멈추지 않는다.
베어내고, 찌르고. 잘라낸다.
그렇게 정신없이 녀석들을 쓰러뜨리다 보니, 어느새 알베르트의 주변에 마물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뿐이다.
에일린의 어깨 위에는 운디네가 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알베르트를 바라보는 정령의 눈빛에는 경계심 외에 다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흘러내린 피가 에일린의 얼굴을 타고 내려갔다. 알베르트는 꾸러미에서 유피가 준 금창약을 꺼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알베르트를 위해 유피가 준비해준 약이다. 금창약을 내밀자, 에일린은 조심스럽게 약을 받아갔다.
“마족이네. 왜 날 구해준 거야?”
인족이 사용하는 약이 아니다.
마족이 쓰는 약이라는 걸 확인한 에일린의 경계심이 좀 더 짙어졌다.
뭐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알베르트는 고민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에일린의 과거에 대해서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엘프와 마족의 혼혈. 마족에게서 버림받고, 엘프에게서도 버림받은 그녀는 두 종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감정은 증오심이라고 봐도 좋았다. 에일린은 과거사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짧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두 종족이 그녀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위험해 보였으니까 구했을 뿐이다.”
“위험해 보여서?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는 편이 좋지 않았어?”
적의를 드러내는 에일린의 모습에 천칭이 속삭였다.
[마스터, 늦지 않았습니다.]
‘뭐가 말인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시죠.]
‘자네는 아직도 그 소린가?’
위기는 넘겼다. 더는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알베르트는 에일린을 뒤로 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고 있습니다, 마스터.]
‘알고 있네.’
한 발치 뒤에서 에일린이 알베르트의 뒤를 밟고 있었다.
‘모습을 숨기고 좀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숲 밖으로 안내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누가 말리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마스터.]
에일린의 마나가 회복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금지된 숲 한가운데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로엔 경은 대체 어딜 간 건가?’
[저에게 물어봐도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알베르트가 걷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에일린의 발걸음에 맞추고 있다 보니, 속도가 나질 않았다. 숨이 차오르는지, 에일린의 허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체력도 바닥, 마나도 바닥. 그녀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건 역소환 되기 직전의 운디네뿐. 위태롭게 걷던 에일린의 신형이 무너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비틀거리는 그녀를 받은 것은 알베르트였다.
옷 너머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몽롱하게 풀린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초점이 흐릿하다. 더 걷는 건 무리다. 머리의 열상 때문인지, 그녀의 몸은 열로 가득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주변에 쉴만한 곳이 있는가?’
[성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안 될 말이네.’
에일린을 유피의 은신처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유피는 마족의 하나뿐인 황녀다. 에일린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둘의 만남은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 어디로 향하는 게 좋을까?
[좋습니다. 그럼 적당한 곳에 그녀를 두고 떠나죠.]
‘그러다가 몹쓸 짓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에일린은 세 살 먹은 아이가 아닙니다, 마스터. 자기 한 몸 정도는 알아서 챙기겠죠.]
알베르트는 에일린을 한쪽 어깨에 들쳐 멨다. 부드러운 여인의 몸이 옷을 넘어 전해졌다. 피와 땀 냄새가 코를 괴롭히는데도, 알베르트의 몸은 자극에 반응했다.
[참 줏대 없는 몸이군요.]
‘젊다는 건 피곤하구먼.’
운디네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산책은 끝났다. 가볍게 두 발을 푼 알베르트는 속도를 올렸다.
잰걸음과 같이 나아가던 발은 어느새 바람을 해치며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운디네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운디네를 올렸다. 순식간에 치고 나가는 속도에 운디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루드비히 저택으로 갈 걸세.’
[설마 시험을 끝낼 생각입니까?]
‘에일린만 두고 올 걸세. 뒤는 지각한 로엔 경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자기 여자 정도는 알아서 챙기면 안 되는 건가?
말이 되지 못한 알베르트의 노기는 속도로 드러났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알베르트의 어깨를 붙잡은 운디네의 몸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기 바빴다. 항의조차 할 수 없다. 그녀의 의사는 주인인 에일린에게 전해질뿐인데, 정작 그 에일린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운디네가 할 수 있는 건 안간힘을 다해 알베르트의 어깨에 매달리는 일 정도였다.
숲의 끝이 가깝다.
그리운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속도를 늦췄다. 저택의 외벽에는 기사와 사병들이 순찰 중이었다. 4명이 한 조. 전방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기사는 루드비히 공작가가 자랑하는 굴지의 검, 사자기사단 출신의 기사다.
순찰조가 지나가자 알베르트는 순찰로에 에일린을 내려놓았다.
눈이 핑글핑글 도는 운디네가 에일린의 어깨로 뛰어내렸다.
그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걱정과 불안이 담긴 눈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곳 사람들이라면 네 마스터를 받아줄 거야.”
실제로 에일린은 루드비히 공작가의 식객이긴 했어도, 그 취급은 귀인에 가까웠다.
이제는 대륙에 몇 남지 않은 엘프다. 비록 그 출신이 마족과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함부로 밝히고 다니지 않았다. 거기에 인품까지 뛰어났던 에일린은 저택 내에서도 인기인이었다. 활기차던 아가씨가 그녀를 잘 따른 것은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알베르트는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금창약이 잘 스며든 것인지, 피는 벌써 멎어있었다. 알베르트는 조심스레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으, 하고 에일린이 앓는 소리를 냈다.
“흉이 질 것 같진 않네.”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유피가 챙겨준 금창약의 효과가 생각보다 더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 은혜는 맛있는 식사로 보답하자. 다음 순찰조가 가까워지고 있는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알베르트는 숲속으로 걸음을 돌렸다. 커다란 오크나무 위로 몸을 숨긴 그는 다가오는 기사를 지켜보았다.
금발에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 로엔 발 나하드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그 남자군요. 시험의 날에 오러를 뽑았던 기사 말입니다.]
‘맞네. 그의 검은 신속으로 유명하지. 로엔 경은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이니 말이네.’
의식이 없는 에일린을 업은 로엔은 사병들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시선을 돌려 저택 안쪽을 보았다. 내공으로 뚜렷해진 알베르트의 눈에 정원의 모습이 담겼다.
거인같이 커다란 체구의 남성은 정원사인 필립이다. 위협적인 거구와는 달리 순박한 성격의 필립은 시녀들 사이에서 종종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물론 필립의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다. 그가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무서운 인상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필립을 지나친 알베르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정원 안쪽. 아직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작디작은 아가씨가 그곳에 있었다.
“······.”
공작부인과 노아의 모습도 보였다.
주인님이신 라시엘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간 때라면 아직 집무실에 계실 시간이다. 금지된 숲과 맞닿은 루드비히 공작령은 의외로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뛰어난 집사장인 세바스찬이 함께 하고 있으니 업무가 밀리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으나, 일이 생기는 건 집사장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어린 아가씨는 정원을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다.
알베르트는 숨을 깊게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와 맞닿은 숨은 하얀 김을 만들어냈다.
‘가세나, 천칭.’
[안 보고 가도 되겠습니까?]
‘충분히 봤네.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지.’
[그렇습니까?]
나무에서 내려온 알베르트는 숲속으로 걸음을 돌렸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유피의 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
루드비히 공작령 외곽에는 라베린 도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지된 숲과 맞닿은 곳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특색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도시였다. 비옥진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만한 관광지도 없었다. 이 도시에서만 나는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수를 구하는 게 그나마 쉬운 편에 속했지만, 루드비히 공작령 내에서 성수를 구하기 힘든 마을은 없었다. 항상 마족의 위협을 받는 이곳에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성수만큼 흔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라베린 도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소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동인구는 늘어난다. 이는 도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유가 뭐죠, 마스터?]
‘일반 사람이 금지된 숲을 들어가고 싶다면, 이 도시를 지나갈 수밖에 없다네.’
말하자면 숲의 입구다.
라베린 도시 반대편에 있는 클레멘트 도시도 금지된 숲과 맞닿아 있었지만, 그쪽은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가 까다로웠다. 공작령의 주인인 루드비히 저택이 있는 도시다. 약간의 돈만 찔러주면 숲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이곳과는 치안 수준이 달랐다.
‘모험가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곳을 찾아왔지. 숲 안에서 마족의 물건을 발견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런 모험가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잡화상과 은퇴한 용병들. 제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변방으로 몸을 숨긴 범죄자들. 동료를 구해서 숲 안의 던전을 탐색하는 트레져 헌터들이 모이면서 자연히 만들어진 게 라베린 도시라네.’
가진 자들이야 손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더없이 차가웠던 마을이기도 했다.
알베르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은, 그런 이중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마스터의 집도 여기에 있습니까?]
‘이젠 없다네. 내가 이곳을 떠날 때 부숴버렸지.’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이었다.
슬럼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판자촌이 알베르트와 병든 어머니의 집이었다. 그 집에 좋은 기억은 없다. 알베르트가 8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슬럼가의 고아가 된 알베르트는 뒷골목을 전전해가며 살아왔다. 그런 그를 발견하고 루드비히 공작가로 데려온 것이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이었다.